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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 -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9월
평점 :

요즘 우리나라의 혐오의 분위기를 보면 정당한 근거가 있는데 일어나는 현상인지가 의문이 든다.
참혹한 혐오의 역사를 만드는 것도 인류라면 그 역사를 바꾸는 것도 인류이다.
마녀사냥과 홀로코스트를 보면 정말 슬프고 같은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잘 안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인터넷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으로 인종차별과 혐오범죄가 일어나서 공포스러운 것 같다.
혐오의 실체를 잘 파악해야 하는 것 같다.
혐오는 비뚤어진 공감이라고 하는데 요즘엔 인터넷상에서 심각해지는 것 같다.
혐오가 아니라 화해와 공존을 해야 한다는 게 맞는 것 같다.
혐오의 실체를 파악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자들이 여러 해답을 제시해준다.
혐오의 기원에 대해서 항상 궁금했었는데 어느정도 풀린 것 같다.
혐오의 역사를 일으킨 사람들을 보면 엄청나게 악마처럼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독일의 경우에는 일반 군중이고 합법으로 일으켰다.
혐오의 역사에 마침표를 정말 찍었으면 좋겠다.
밥먹을 때는 항상 텔레비전을 보는데 kbs의 옥탑방인지 뭔지 하는 프로에서 퀴즈를 푸는데 미국은 코로나 치료를 하는데 자가부담금이 4300만원이라고 해서 이상했다.
미국친구에게 물어보니까 공짜라고 했다.
정말 kbs랑 mbc는 수신료를 주면 안되고 봐도 안되고 나중에 민영화를 해야 한다.
거기서 얻은 정보는 왜 이렇게 틀린 것도 많은지 그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안 보려다가 봤는데 될 수 있으면 보지 말아야 겠다.
요즘 영어성경을 봤는데 미국친구는 영어성경을 보면 옛날 표현이 많아서 회화에는 도움이 안된다고 했다.
영어공부론에 대한 책을 보면 어떤 책은 미드를 봐라, 어떤 책은 미국 영화를 봐라, 어떤 책은 영어 동화를 봐라, 어떤 책은 영어성경을 봐라,어떤 책은 영어소설을 봐라 등등 다 다르다.
책 제목이 헤이트인데 나도 요즘 미운 사람들이 있다.
홍준표, 유승민, 이재명은 그냥 싫고 싫고 또 싫고 뭘해도 그냥 계속 싫다.
미국친구가 왜 싫으냐고 해서 이유도 없이 싫고 존재자체가 싫고 말하는 것도 싫고 걸어다니는 것도 싫고 헤이트 그 자체라고 했다.
우리의 뇌는 차별과 혐오, 폭력과 공격으로 가득 찬 시상하부와 편도체가 존재한다.
시상하부와 편도체에는 그들을 구별 짓고 내집단과 외집단을 편 가르기 하며 내집단에게는 더없이 너그럽지만 외집단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공격을 퍼붓는 우리의 본성이 작동한다.
혐오의 치유는 공감만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하고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며 애착과 공감을 만들어내는 사회성 뇌 영역은 거울의 양면처럼 혐오회로에 맞닿아 있다.
사랑이 없다면 미움도 없고 공감이 없다면 혐오도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여러 명으로 많다.
최인철, 홍성수, 김민정, 이은주, 최호근, 이희수, 한건수, 박승찬, 전진성이다.
혐오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사전에는 어떤 것들을 증오하고 불결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이라고 되어 있다.
혐오는 단순하게 미워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비도덕적인 존재 혹은 비위생적인 존재에 대하여 느끼는 역겨움의 감정이다.
단순한 미움이 아닌 매우 높은 강도의 강한 감정이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회피하고 싶은 행동적인 요인들까지 들어가 있는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이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고 같은 인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혐오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감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감정으로 국한시켜서 저자는 얘기한다.
사이가 좋지 않아서 한 개인을 혐오하는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강력한 미움과 역겨움이라 할 수 있는 그런 도덕적인 감정들이다.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집단에 의존하게 되고 그 집단 의존성이 강하게 되면 부작용으로 다른 집단에 대한 혐오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코로나 상황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전에 없던 집단 간 차별이나 편견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 보인다.
인간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어하는데 자존의 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을 자기 집단,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을 긍정적인 집단으로 보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 내집단에 대한 애착이 오작동해서 안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이 혐오일 수 있다.
공감과 혐오는 서로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기 쉽다.
공감을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의 필수 조건으로 여긴다.
우리의 도덕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하면서 공감에 대해서 무한정 긍정적이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감정을 그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느껴보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은 나와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맥락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공감은 자신과 같은 역사적, 문화적, 시대적 맥락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는 공감을 경험하기가 어렵다.
공감이 매우 좋은 것이지만 그 타인이 자기가 속한 집단에 국한되면 오히려 그것의 부작용으로 내집단이 아닌 사람들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무관심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공감은 우리 집단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작동할 수 있지만 다른 집단 사람들에게는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에 공감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타집단 사람들에 대한 이타적인 행위가 나타날 가능성이 떨어진다.
우리에게 혐오가 생기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악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집단을 통해서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도 집단이 중요하다.
이 집단이 과도하게 작동하게 되면 그것의 파편으로서 혐오가 나타날 수 있다.

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개인의 정체성을 지나치게 지금 속해 있는 국지적인 집단에 한정하지 않아야 한다.
한국 사람, 서울 사람, 어느 지역 사람이다라는 아주 좁은 의미의 집단 정체성에 우리 자신을 가두는 것을 지양해야 하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공감이 변질될 수도 있으니까 공감이 기초가 돼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공감하는 마음을 갖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행동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과 제도를 갖춰놓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시스템을 갖추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 자신의 내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끓임없는 자기성찰이 중요하다.
다른 집단에 대해 갖고 있는 우호적인 생각이 그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위장된 혐오는 아닌지, 우리 집단에 대한 충성이나 애착이 다른 집단에 대한 협동, 이타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은 되고 있지 않은지 계속해서 성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자유와 평등 정신으로 로마 제국안에서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
초기 로마는 관용적인 자세로 그리스도교를 대했지만 로마 네로 황제는 도시의 3분의 1이 불탄 사건의 책임을 그리스도교의 문제로 덮어씌웠다.
국가의 정치적 목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생활을 왜곡하여 혐오를 만들었다.
그리스도교는 밀라노 칙령 이후 자유를 얻고 이후 392년 국교로 지정되었고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가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박해받는 종교가 아니라 가장 힘 있는 종교가 되었고 십자군 전쟁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7세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모두 성지로 예루살렘을 지정했다.
이슬람이 이곳을 점령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순례를 가는 것에 어려움을 겪게 되어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런 요청을 활용하여 분리되어 있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통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가짜 뉴스가 큰 역할을 하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분노하여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다.
1차 십자군 전쟁을 통해 예루살렘을 되찾게 되고 그곳에 예루살렘 왕국과 3개의 공국을 세우게 된다.
십자군은 포로들의 목을 잘라 투석기로 성채에 던져 넣는 만행과 같은 끔찍한 살육을 저지른다.
8차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십자군 전쟁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이슬람 세계에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고 이슬람의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학살도 이어진다.
200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가혹한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가 천 년이 지난 후 가해자가 되어 잔혹한 전쟁을 시작했다는 사실들은 혐오의 역사에 중요하다.
혐오는 로마 황제나 교황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책임이지 일반 사람들은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럽의 역사는 간단하지가 않다.
중세 말기에 찾아온 페스트는 혐오의 역사가 일부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페스트라는 질병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소빙하기가 찾아오며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100년 전쟁이 발생했으며 기독교와 가톨릭의 30년 전쟁까지 더해져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죽었다.
사람들의 분노와 타인에 대한 혐오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쾰른에서는 가짜 뉴스로 인해 유대인들을 집단으로 화형시키는 학살이 일어났다.
일반 사람들이 저지른 혐오의 대표적인 사건은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은 중세를 넘어 과학혁명과 계몽주의가 발생했던 근대 초기에 더 많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소문만으로 마녀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평소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대상을 마녀로 만들기도 했고 재산 탈취나 정치적 목적으로도 마녀를 만들어냈다.
마녀사냥 같은 혐오와 폭력은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데올로기로 인해 만들어지고 교육되고 학습되며 퍼져나갔다.
혐오는 기간이 없다.
지금도 인터넷상으로나 가짜뉴스로 계속 퍼지고 있다.
과거에 일어났던 문제를 제대로 반성하고 돌아보지 않으면 반복될 수 있다.
역사적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언제든 희생양이 만들어질 수 있다.
혐오의 현상만 보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며 진정한 공감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온라인상의 혐오표현에 대해서는 대항표현이 있다고 한다.
대항표현은 혐오표현에 담긴 객관적 사실을 반박하는 방식,
혐오표현에 담긴 가치의 정당성을 반박하는 방식, 혐오표현 발화자의 진정성에 호소하는 방식, 전복, 탈환, 패러디의 방식을 통해 가능,
대항표현을 해야 할 주체는 혐오표현의 피해자 개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이다.
대항표현을 통해 평등의 가치, 차별 반대의 목소리, 긍정적인 감정을 전파한다.
개별 정보의 진위를 판별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지적 편향이나 정보 처리 능력의 한계 등을 이해하고 이로 인해 우리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둔 상태에서 사회적 이슈나 공공연하게 돌아다니는 혐오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잘 정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