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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35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3월
평점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하면 카타르시스라고 학교 다닐 때 외웠다.
하지만 그 이상의 내용은 모르니까 더 알고 싶어서 읽었다.
플라톤은 감정을 깎아 내렸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와 연민을 불러 일으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를 통해서 성숙한 인격에 이르고 높은 미덕에 이른다고 했다.
그 당시 그리스인의 삶은 비극과 서사시로 윤리학과 정치학에 닿는 수단이 된다고 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방을 하다가 시를 쓰게 된다.
비극도 모방에서부터 시작한다.
비극이 훌륭하려면 플롯이 복합적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 들어 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학문을 두루두루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게 했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항상 관심이 많았다.
그를 보면서 책이나 정보, 자료가 없는 시대에 어떻게 그런 방대하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항상 생각했었다.
그를 보면서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을 믿게 되는 근거를 가지게 됐다.
진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설계한 대로 처음부터 사고하는 뇌를 가지고 있는 거란 걸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서 알게 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BC384~322까지 살았다.
기원전 384년에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왕의 주치의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릴 때 죽었다.
17세 때 어머니마저 여의자 후견인 프록세노스는 스승 플라톤이 있던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로 그를 보냈고 그는 거기서 20년간 머물랐다.
기원전 347년에 플라톤이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를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포스에게 맡기고 철학의 후원자였던 철학의 후원자였던 소아시아 아소스의 왕 헤르메이아스에게 갔다.
이름들이 왜 이렇게 어렵냐,,
헤르메이아스의 조카 피티아스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다.
기원전 342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된 왕세자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기원전 335년,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독자적인 교육기관 리케이온을 세웠고 이것이 소요학파의 기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대부분은 이 기간에 쓰였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나서 아테네에 반마케도니아 정서가 강해지자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떠나 그다음 해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함께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이다.
1998년 저명한 철학자들이 뽑은 사영철학사에 가장 영향을 끼친 철학자 1위에 뽑히기도 했다.
그래서 자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끌렸던 것 같다.
그의 지성과 관심 분야의 폭 그리고 깊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설계된 게 맞다니까,,
그가 다룬 분야는 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심리학,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미학, 동물학, 식물학, 자연학, 철학사, 정치사 등으로 아주 넓었다.
그의 저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수사학, 형이상학, 자연학, 정치학, 범주론, 명제론, 시학 등이다.
전부 다 읽어 보고 싶다.
시학은 당시 많은 시인이 본능에 따라 쓰고 대중이 재미로 즐기던 비극과 서사시를 하나의 철학이자 학문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흥행하고 살아남는 이야기 및 서사에 담긴 비극 ⇒정화 ⇒즐거움 코드는 지금도 인기 있는 구성 방식이며 감정의 정화를 통한 인격 성숙과 미덕 향상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

난 어려운 책을 항상 좋아한다.
이 책은 이름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시는 인간의 선천적 원인때문에 생겨난 거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어릴 때부터 모방 본능이 있다.
인간은 처음에는 모방을 통해서 배우고 모방하는 데 가장 뛰어나며 모방된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아주 혐오스러운 동물이나 시신처럼 그 자체로는 보기에 역겨운 형체도 그것을 그대로 모사해놓은 것을 볼 때는 즐거움을 느낀다.
학습은 철학자뿐 아니라 일반 사람에게도 지극히 즐가운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람은 모방해 좋은 것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모방한 것이 무엇인지 추론하고 배우기 때문이다.
실물이 생소하다면 모방해놓은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모방 기법이나 색채, 그 밖의 여러 이유로 즐거워한다.
모방과 선율, 리듬도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 본능적으로 아주 강력하게 끌리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즉흥적으로 모방했다가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시가 출현한 것이다.
시는 시인의 성향에 따라 두 갈래로 나뉜다.
고결한 시인들은 훌륭한 일과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모방해서 찬미시와 칭송시를 썼지만 천박한 시인들은 비열하고 사악한 자를 모방해서 풍자시를 썼다.
호메로스 이전에 쓰인 풍자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때도 풍자시를 쓴 시인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호메로스를 필두로 그 이후에는 풍자시가 많이 등장했다.
풍자시에는 단장격이 쓰였는데 그 운율이 풍자시에 어울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운율을 이암베이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시인들이 이 운율을 사용해서 시로 풍자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옛 시인 중 일부는 영웅시인이 되었고 일부는 풍자시인이 되었다.
호메로스는 모방을 발했을 뿐 아니라 극적인 요소가 있었다.
훌륭한 행위를 모방하는 데도 탁월한 시인이었지만 사람의 결점을 포착해 풍자하는 것이 아닌 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극화하여 희극의 양식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호메로스의 마르시테스와 희극의 관계는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와 비극의 관계와 비슷하다.
비극과 희극이 등장하자 시인은 각자 성향에 따라 둘 중 하나를 따라갔다.
이렇게 해서 풍자 시인은 희극신이 되었고 서사시인은 비극시인이 되었다.
새로운 양식이 예전 양식보다 더 훌륭해서 사람들에게 갈채를 더 크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비극 자체나 무대 공연과 관련해서 비극이 고유한 형태를 현재 다 갖추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다.
어쨌든 비극은 원래 즉흥 연기에서 생겨났고 희극도 마찬가지다.
비극은 디티람보스의 선창자에게서 유래했고 희극은 오늘날에도 많은 성읍에 일종의 전통으로 남아 있는 남근 찬가의 선창자에게서 유래했다.
그 후에 비극은 사람들이 새로운 요소를 차례로 선보임에 따라 조금씩 성장하고 발전해 나갔고 변화를 많이 거친 후에 고유 형태를 갖추게 되자 발전을 멈췄다.
아이스킬로스는 처음으로 배우의 수를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렸고 합창을 줄이고 극이 대화 위주로 진행되게도 했다.
소포클레스는 배우의 수를 세 명으로 늘렸고 무대에 배경 그림을 도입했다.
나중에는 비극이 사티로스극에서 완전히 벗어남으로써 짧던 플롯이 길어졌고 우스꽝스럽던 대사가 중후하게 바뀌어서 장엄함을 갖추었으며 운율도 장단 4보격에서 단장격으로 바뀌었다.
비극이 처음에 장단 4보격 운율을 채택한 것은 사티로스극의 요소와 무용의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사 위주로 바뀌면서 거기에 어울리는 운율을 찾게 되었다.
대사에는 단장격 운율이 가장 잘 어울린다.
우리가 대화할때에는 대체로 단장격 운율을 사용하고 통상의 대화 어조에서 벗어날 때만 아주 드물게 6보격 운율로 말한다.
에피소드의 수도 많아졌다.
에피소드는 합창대의 노래와 노래 사이에 나오는 대사 부분을 가리키며 오늘날 막이나 장에 해당한다.
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너무너무 관심이 많았는데 이 책을 읽고는 그가 좋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