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엘리트를 위한 서양미술사 - 미술의 눈으로 세상을 읽는다
기무라 다이지 지음, 황소연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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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엄마가 미술에 빠져 있어서 나도 엄마한테 계속 미술에 대해서 듣고 있는데 기상천외하다.

클림트가 여자가 많고 자식도 많고 암튼 화가들은 여자가 많다.

고갱도 바람을 많이 피고 창녀촌에도 많이 가고 암튼 화가들은 문란한 문화가 있는 것 같다.

최초의 여성 화가는 아르테미스 젠텔스키인데 그림 배운다고 하다가 아빠 친구랑 관계를 가져서 성폭행범이라고 법정소송도 엄청 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화가들의 삶도 유니크해서 정말 재미있는데 그 그림과 관련된 미술사는 더 장난 아니게 흥미로울 것 같다.

엄마가 박사과정 장학금이 안되면서 숭실대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가서 듣고 싶은 과목들을 전부 공부하고 계시다.

거기서 미술에 대한 걸 재미있다고 많이 들으신다.

엄마 때문에 미술관에 간다.

엄마는 자세히 보시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푹 빠져서 얘기를 하신다.

요즘 가요나 팝송을 듣기 시작했는데 클래식방송에서 영어방송이나 기독교방송으로 라디오주파수를  바꿨는데 영어방송은 절반이 중국어만 나온다.

외국어공부법도 책을 많이 보고 안 건 그냥 자기입으로 많이 되뇌이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이런저런 깨달음도 많이 왔으면 좋겠다.

엄마랑 친한 언니가 농대 나온 이모인데 또 화초나 그림, 시에 관심이 많으셔서 덕수궁미술관에 계속 가자고 하신다.

덕수궁미술관은 기간마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한다.

난  끌리는 그림만 빨리 보고 덕수궁주변의 나무 같은 거만 보고 온다.

참관하는 시간을 1시간을 주지만 난 1층 2층 30분이면 다 본다.

엄마랑 이모를 기다릴 때 밖에서 나무를 더 많이  본다.

난  나무가 더 좋은 것 같다.

그림은 세계공통언어같다.

이 책을 읽고 2500년 미술사를 공부해도 나무보다 그림을 더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다.

미술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거라고 하는데 그 얘기도 맞는 것 같다.

이 책을 보면 인문학과 역사, 경제, 문화까지 관통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 기무라 다이지는 서양 미술사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뒤 영국 런던의 소더비 미술교육원에서 전문가 양성을 위해 예술품과정을 수료했다.

영국 런던 유학 시절에는 역사적인 미술품, 인테리어, 식기 등 진품을 직접 보고 익히며 폭넓은 소양을  쌓았다.

일본 각지에서 지식뿐 아니라 예술의 혼을 소중히 여기는 강연회 및 세미나를 연간 100회 정도 개최했으며, 왕성한 저술 활동과 새로운 미술사계의 엔터테이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옮긴이 황소연은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첫 직장이었던 출판사와의 인연 덕분에 20여 년간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10년 전부터는 바른 번역 아카데미에서 출판번역 강의도 맡고 있다.

국제화 시대에 발맞추어 미술사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 기관이나 기업에서 미술 관련 세미나를 자주 개최한다.

미술사는 현대인의 필수 교양이자 서양 사회에서는 중요한 공통 인식, 의사소통의 도구로 기능한다.

실제 세미나 현장에서 보면, 서구 주재원이나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미술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기업체 경영자나 임원 등이 그 지위에 상응하는 현지인과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미술을 화젯거리로 삼아 만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저자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는데, 재학 중에 미술의 중요성을 실감한 사건이 있었다.

미술사 강좌의 상급 과정인 초기 네델란드 회화를 수강했을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상급 과정을 수강하는 학생은 대개 미술사를 전공하는 이들로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강의 첫 시간에 처음 보는 학생이 눈에 띄었다.

몇 주후, 마침 그 학생과 따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저자가 미술사를 전공하냐고 물으니까 그 학생은 물리전공이라고 했다고 한다.

물리전공인데 왜 미술사를 듣냐고 하니까 그 학생은 이다음에 사회에 나갔을 때 자기 뿌리가 되는 나라의 미술을 모른다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했다.

그 학생은 네덜란드계 미국인이었다.

그 학생의 얘기를 듣고 저자는 ​미술사를 중시하는 미래 글로벌 리더의 의식이 오롯이 전해졌다고한다.

​저자에게는 미국에서 명성이 자자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는 친구가 있다.

​저자 친구의 아내도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예일 대학교 법과대학원으로 진학한 수재다.

부부가 모두 흔히 말하는 지성인이다.

그런데 그 부부 역시 서구의 다른 엘리트들처럼 미술사에 대한 소양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기부하고 있는 미술관에서 열린 특별 강연회에 함께 참석했을 때, 전문 미술사가에서 던지는, 당당하면서도 본질을 꿰뚫는 질문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저자는 강연회에서 미술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예술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미술사를 짚어보더라도 서양미술은 전통적으로 지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미의식을 더 우위에 두었다.

또한 고대부터 신앙의 대상으로 숭상된 서양미술은 보는 행위뿐 아니라 읽는다는, 일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전해 왔다.

각 시대의 정치, 종교, 철학, 풍습, 가치관 등이 조형적인 형태로 완성된 것을 우리는 미술품 또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따라서 미술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글로벌 시대에 소통의 으뜸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은 알몸일까?

난 그 시대는 의복이 발달하지 않아서 거의 알몸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이 책에서 그 의문이 풀리는구나,,

아름다운 몸은 신도 기뻐하신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은 아름다운 신들이 그러하듯, 알몸으로 경기를 치렀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했던 신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유일신과 달리 초인적이면서도 기쁨, 분노, 그리고 애증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개성이 풍부한 존재였다.

아울러 인간의 몸은 신이 내려주신 선물로,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가 신들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남자의 나체는 신도 기뻐하신다'는 발상에서 아름다움은 곧 선함 이라는 신념과 가치관이 생겨났다.

남자가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은 덕을 쌓는 일이자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수려한 외모를 갖추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뒷받침해주듯이, 남성의 육체미를 높이 평가한 배경으로 당시 그리스 남자에게 부여된 병역의 의무를 꼽을 수 있다.

이처럼 몸을 단련하는 것은 그리스 남성의 으뜸가는 덕목이어서, 그 결과 우람한 육체를 서로 경쟁하듯 겨루게 되었다.

철학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본명은 아리스토클레스로, 우리에게 친숙한 플라톤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넓은 어깨'라는 뜻의 별칭이다.

플라톤이 이름인줄 알았는데 별명이었고 원래 이름도 처음 알았다.

고대 그리스 미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먼저 기원전 600년경부터 기원전 480년까지 이어진, 흔히 고졸기라고도 부르는 시기에 아르카익 양식이 탄생했다.

한편 현대인의 관점에서 고전 시대 조각상의 표정이 다소 무덤덤하게 보이는 까닭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은 삼가야 한다는 그리스인의 가치관이 작품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감정 표현을 억제하는 그리스의 미의식은 헬레니즘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처럼 그리스 문화권이 순식간에 확대되면서 그리스 고유의 가치관을 반영한 작품 외에도 다양한 정서를 표현한 예술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지배한 오리엔트 문화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함으로 미술 양식도 변모했다.

바로 이것이 14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나서 유럽의 여러 나라로 퍼지며 16세기까지 이어진 르네상스.

부활’,  재탄생을 뜻하는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으면서부터 유럽에서 부정당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학문과 예술을 부흥한다는 의미다.

그 결과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에서는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신화가 작품의 주제로 등장하고, 라틴어 문학의 지식을 구사한 분야 중에서도 가장 심오하면서 격조 높은 알레고리 그림, 즉 우의화가 탄생했다.

상업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상인 계급도 문화 혁신 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상인이나 중세 유럽에서 상인들이 결성한 동업자 조합인 길드 같은 공화국뿐 아니라 군주가 다스리는 공화국도 있었는데, 경제 발전은 당연히 그 지역의 영주들에게 부를 안겨다주었고, 영주가 머무르는 궁정은 문화인이나 화가, 조각가들을 후원하는 장소로 부각되었다.

르네상스시대 특징으로는 인간의 지위 향상과 인간 존중을 꼽을 수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조토 디 본도네가 미술사에 등장함으로써 서양 회화는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했다.

조토가 그린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프레스코 벽화들은 회화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어준 작품으로 유명하다.

요컨대 예배당을 장식한 조토의 작품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현대적인 그림으로 참신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자기소개서는 페스트의 대유행으로 이탈리아에서 꽃피기 시작한 미술사의 새로운 흐름은 15세기 이탈리아인들이 애정을 가득 담아서 콰트로첸토라고 부르는 시대에 피렌체 중심으로 건축, 조각, 회화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예술적인 움직임이 태동했다.

이때 화가나 조각가 등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것이다.

즉 손을 쓰는 노동자, 기능인의 신분에서 귀족적인 문화인, 지적인 예술가로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다만 그림이나 조각처럼 단지 한 분야에만 능력을 발휘하는 미술가는 여전히 하급 기술자로 푸대접 받았고, 마치 신처럼 다방면으로 재능을 갖추고 활약해야 비로소 예술가 대접을 받았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드 다 빈치는 스스로 작성한 자기소개서에서 먼저 무기나 전쟁에 필요한 기계를 만드는 군사 기술자로 자신을 부각하고, 자기소개서 말미에 조각과 회화의 기량을 갖추고 있다는 자신의 강점을 밝혔다.

특히 천재 예술가에 열광하던 시기는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세 명의 거장이 동시대에 활동하며 걸작을 쏟아내고, 혁신적인 회화 기법이 총동원 되면서 르네상스 발전의 정점을 이룬 전성기 르네상스였다.

미켈란젤로는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들이 모이던 메디치가를 통해 성장했다.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기능인에서 예술가로 향상되었음을 상징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지시를 받고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다.

창세기를 주제로 인류의 탄생과 죽음을 표현한 대작이다.

당초 교황의 주문은 예수를 따르던 12사도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판단으로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고 있는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아담의 창조>를 살펴보면, 미켈란젤로는 신이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었더니 인간이 탄생했다는 성경 구절을 신과 아담의 손가락이 서로 맞닿는 구도로 묘사하고 있다.

즉 천장화가 완성되었을 때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로 추앙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림을 그린 이의 독자적인 해석인 견해가 인정되었고, 이는 더 이상 기능공이 아닌 예술가로서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궁정화가였던 라파엘로는 3대 거장 중 가장 사교적이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궁정인으로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1508,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라파엘로는 2대에 걸쳐 교황을 모시고 대형 공방을 운영하며 전성기 르네상스를 빛낸 세 명의 위인 중에서 가장 빨리 세상을 떠났는데도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레오나르도보다 서른한 살 연하이자 미켈란젤로보다 여덟 살 어린 라파엘로는 구도나 명함법 등 두 명의 선배가 탄생시킨 양식이나 기법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서 완성시켰다.

그리고 라파엘로의 양식은 이후 서양 회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다른 책에서 초상화를 봤는데 라파엘로는 엄청 잘생기고 남자가 청순하게 생겼다.

라파엘로의 작품은 서양 회화의 고전 양식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미켈란젤의 어린 시절 스승으로 유명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등 콰트로첸토 르네상스 시대의 피란체파 거장들은 예술가가 아닌 기교를 부리는 장인으로 금세 잊히는 존재가 된다.

그들의 작품은 고전지상주의에 반기를 든 호사가들이 등장한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재평가를 받으며 다시 주목을 끌었다.

종교개혁의 거센 바람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영국국교회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하는 등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종교개혁 운동으로 서유럽에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이런 혼란은 17세기까지 이어진 유럽 제국의 전란으로 확대되었다.

로마 교회를 송두리째 뒤흔든 로마 대약탈사건이 발생했다.

로마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왕인 카플 5세의 군대가 침입해 약 9개월에 걸쳐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거장들의 작품이 최고조에 이른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가 지나고, 16세기 중반부터 이탈리아에서는 화가나 조각가가 자기만의 특정한 방식을 추구한 매너리즘 미술이 발전했다.

오늘날에 인상파하면 흔히 프랑스 회화와 화가들을 대표적으로 연상하지만,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인들이 생각한 인상파는 이단적인 존재로 미술계의 주류와는 아주 거리가 먼, 전위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유파였다.

그래서 인상파는 인정을 받지 못했나보다.

이른바 미술계의 반항아가 바로 인상파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리는 대상의 고유색이 아닌, 빛이나 공기의 영향을 받아 시시각각 달라지는 색채를 그리려고 했다.

형태 및 색채와 관련된 사물의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시각에 진실하려고 했다.

보이는 대상 자체가 아닌, 화가 자신이 받은 인상에 충실하고자 한 셈이다.

인상파는 빛나는 찰나를 감각적으로 캔버스 위에 표현했다.

인상파는 빛나는 찰나를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섞지 않고 색채 분할 기법을 구사했다.

색채 분할법이란 아주 가느다란 붓질로 나열한 두 가지 색을 멀리 떨어져서 보면 서로 섞여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시각 혼합 또는 망막 혼합이라고 일컬어지는 과학적인 현상을 이용한 기법이다.

즉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지 않고 따로따로 캔버스 위에 나열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마네와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린 세계는 근대화된 파리 및 이를 둘러싼 부르주아의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마네를 비롯해 대부분의 인상주의 화가가 부르주아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부르주아지를 말하는 것으로 21세기 사회에서 흔히 일컫는 대중적인 중산층과는 거리가 멀다.

1648년에 창립한 이후 귀족적인색채가 강했던 프랑스의 미술 아카데미와 대비되는, 새로운 부르주아적인것이 인상주의 미술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도 당시 인상파는 매우현대적인유파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현대적인 줄 몰라도 지금은 고전적으로 보인다.

인상파화가들은 빛의 찰나를 그려서 역동적일 것 같지만 그림을 보면 정적이고 따뜻하고 잔잔해보인다.

그들은 의외이고 역설적이라서 더 끌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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