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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의 인간 수업 - 300년 경제학 역사에서 찾은 인간에 대한 대답 36
홍훈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자본주의사회에 살려고 하면 경제학적인 지식이 없으면 거의 문맹인같은 삶을 살게 된다.
진정한 자본주의를 알려면 경제학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알아야 하는 것 같다.
이 세상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것으로 가르친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것을 알았다.
경제학책을 읽으면서 돈이 무엇인가와 경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내 자신도 기준이 명확했으면 좋겠다.
고전학파에서부터 신자유주의까지 정리를 하기는 했는데 아직도 모르는게 너무 많다.
경제적인 가치관을 잘 세워야지 실질적인 나의 인생의 비전을 잘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구조를 잘 알면 그 구조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복지정책이 잘못된 것인지지 경제 위기는 왜 계속 생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경제에 윤리도덕법칙이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경제는 인간이 배제되고 돈과 시스템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적인 감정이나 도덕이 다시 포함되고 있다.
저자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뉴욕사회과학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부에서 경제학설사와 정치경제학을 가르쳤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여러 기관에서 강의를 진행하면서 집필중이다.
경제는 시스템과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윤리규범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까지는 저번 경제학책에서 알게됐는데 이 책은 경제학이 여성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경제학은 다중적인 자아가 극단화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입장은 중심을 지닌 주체로서의 인간을 부정한다.
요즘 입장은 인간중심적이라는 사실,,
포스트모더님즘은 서양 근대에서 인식의 주체이자 신을 닮은 존재로서 등장한 데카르트의 나를 부정한다.
또한 그런 인간을 담고 있는 일체성을 지닌 몸을 거부한다.
이것은 서양 유럽의 백인 남자를 표준으로 삼는 근대적 인간과 이성에 대한 비판이다.
표준적 경제인인 로빈슨 크루소는 이미 유럽의 식민지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두터운 구조를 지닌 자아 대신 외적,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얇고 분해된 그리고 분산된 주체와 몸통을 상정한다.
이런 인식의 주체가 대상으로 삼는 실체나 본질도 부정한다.
현상에 대한 여러 가공적인 담론들이나 수사들이 공존할 뿐 이들 사이에 우열이 없다.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도 분명하지 않다.
경제학이 자랑하는 수리적 모형이나 계량분석을 여러 수사들 중 하나로 간주해 이것들에 대해 증명이나 검증의 능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경제학의 근대성을 대표하는 합리적인 행동주체, 가치실체, 균형이나 질서, 확실성 등이 비판의 주요 대상이다.
탈근대는 주체도, 실체도, 균형도, 없이 진행되게 한다.
사회과학에서 과학성을 자부하는 경제학과 경제인에게 탈근대는 심각한 도전거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서양 근대의 산물인 자유경제사상과 인간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신고전학파가 비판의 대상이다.
신고전학파의 발전과정에 탈근대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는 얘기도 있다.
욕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인 요소가 있다.
현시선호이론 등을 통해 기수적 효용이나 효용 자체로부터 벗어나려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노동이나 생산의 주체로서 등장하는 인간은 신고전학파의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근대적이다.
신고전학파의 효용처럼 노동이나 가치를 실체로 여기면서 현상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파악에 머물고 있다는 점 또한 근대적이다.

경제적인 과정을 자본의 논리와 착취 등 주체의 개입으로 설명하고 있다는것도 문제가 된다.
사회를 변혁시키는 주체로서 등장하는 노동자계급을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받아 들이지 못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취하는 방향은 주체가 없는 과정이나 실체 없는 형태가 된다.
주체나 조직 원리 없이 진행되는 과정이란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진화적인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노동자계급이나 합리적 개인이라는 하나의 중심적인 사회경제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을 생각한다.
시민, 여성운동가, 환경주의자, 인종평등주의자, 동성애자 등을 고려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고정된 하나의 정체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알튀세르는 행동주체에 대한 사회적 규정은 중층적인 것이 된다.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식민주의로 이어진다.
탈식민주의는 문화의 우열을 따지지 않고 공존과 다양성을 내세운다.
유럽문화와 지역문화 사이의 상호구성, 상호작용, 상호진화를 주장한다.
지역문화의 혼합적인 성격을 내세운다.
경제와 관련해 역사와 문화는 제도로 나타난다.
영미자본주의의 법이나 규칙들이 공식적인 제도를 이루고 지역문화에 근거한 관습이나 습관 등이 비공적인 제도를 이룬다.
한국에서는 준법투쟁의 유효성이나 사외이사제도의 무용성이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행동주체와 경제주체도 공식적 영역과 비공식적 영역의 이중성을 지닌다.
경제에도 공식 부문과 비공식 부문이 공존하게 된다.
경제와 시장은 경제학이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경제주체도 사회적으로 분산된 채 구성된다.
경제주체는 외적으로 분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이중적이거나 다중적이다.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경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효용극대화와 이윤극대화의 주체가 누구인지 인터넷에 근거한 플렛폼에서는 복잡하다.
생산자, 소비자, 교환의 주체 등 전통적인 구분도 재검토해야 한다.
소비자는 수요자가 되기 이전에는 제품을 규정하고 그것의 위치를 설정하는 데 참여한다.
소비자는 제품 자체를 규정하는 적극성을 지니고 있어 기업이 공급하는 제품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데 그치는 표준이론의 소비자와 대비된다.
이런 상황은 소비자가 지식을 제공해 생산과 기술혁신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밀착된다.
경제주체들이 지닌 경제지식이 중요해지면서 반영성이나 수행성의 영향도 증가한다.
여성주의 경제학은 경제인에 담겨 있는 남성중심주의를 끄집어낸다.
경제인이 여성으로 연상되는 인간의 특징이나 역할을 배제하거나 경시하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입장에서는 경제학도 사회의 산물이고 남녀차이도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경제인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근대 서양의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의존해 남성적인 자율성이 강조된 인간이다.
경제인은 서양적일 뿐만 아니라 남성적이다.
경제인은 자연이나 타인과 연결된 자아가 아니라 이들과 분리된 자아다.
경제인에 담겨 있는 여러 가정이나 제한은 이로부터 파생된다.
사람들 사이의 효용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경제학의 전제는 분리된 자아라는 형상에 부합된다.
이런 전제에 근거하고 있는 파레토 효울성은 재분배를 외면한다.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이기적인 데 비해 가정에서는 이타적이라고 생각해 인간을 이원적으로 파악한다.
경제인은 이성, 자율성, 강인함을 강조하고 감성, 관계, 부드러움을 억압한다.
이기적 행위를 강조하면서 감정이입이나 배려를 사소하게 만든다.
시장을 중시하면서 전통적으로 여성의 역할로 인식되어온 가정이나 가족을 무시한다.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개인이 계산적인 선택을 부각시키므로 물질적 필요의 충족이라는 상식적인 의미의 경제관념을 약화시킨다.
인간의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경제학자로서 이 부분을 가장 강조한 학자는 애커로프이다.
소득수준, 계층이나 계급, 인종, 성별 등이 그것이다.
정체성의 형성과 변동에는 본인뿐 아니라 집단이나 주변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한국 사회의 학벌, 정형화, 낙인, 왕따는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 책은 400페이지가 넘는데 나랑 약간 문체가 안 맞아서 그런지 읽는데 조금 속도가 느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