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계절의 클래식
이지혜 지음 / 파람북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  하루종일 클래식음악만 듣는다.

공부할 때나 책을 읽을 때 정말 엄청나게 집중할 때 빼고는 클래식을 틀어  놓는다.

머리 감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세수를 할 때도 항상 클래식을 틀어 놓는다.

내 방은 클래식이 항상 흘러나오는 상태이지만 클래식에 대한 정보나 지식은 거의 없다는게 아쉽다.

라흐마니노프의 3번 교향곡이 제일 끌리는 음악이다.

다른 가요나 팝송, 요즘에 트롯이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들어 보니까 좋은 음악도 많았지만 그래도 클래식이 우선은 제일 좋다.

저자 이지혜는 학부에서 철학과 음악(바이올린)을 전공한 데 이어 음악교육학 석사학위와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20년부터 클래식음악 해설가로 마이크를 잡았다.

국내 유수 교향악단의 연주회에서 작품을 해설하거나 음악회를 진행하면서 청중의 이해를 돕고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친밀감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 연수원에서 최우수 강사로 선정된 이후, 국가 공무원인재개발원 등의 공공기관 연수에 참여하여 예술의 효과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특히 기업에서 진행하는 그녀의 강의는 가장 만족도가 높은 강의로 손꼽힌다.

 그녀의 강의에서는 철학과 역사, 미술과 무용, 음악 등 예술 전반에 관한 이야기들이  통합되어 있다.

사람들은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겪는 일 중 하나가 실패의 경험이다.

실패는 유쾌하지 않다.

사소한 실수이든 큰 손실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든 간에 실패와 좌절 없이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역경을 만난 이후의 태도다.

자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 듯 금세 일상으로 돌아와 태연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의 순간을 곱씹으며 헤어나지 못한 채 다시 그 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도 있다.

인생에서 장애물을 만나거나 실패를 경험했을 때, 그것에 대처하는 자세를 회복탄력성이라 한다.

마음의 근력이 지닌 탄력성, 즉 인생의 바닥에서 다시 튀어 오르는 힘이다.

흥미롭게도, 실패로 인해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회복하는 사람들은 원래 있었던 위치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크게 성공한 사람일수록 크게 실패해봤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회복탄력성의 차이는 불행이나 역경에 대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스스로의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노력, 주변 사람과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는 대인관계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누구든지 섬광과 성취를 맛볼 수 있다.

세르게아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을 초연한 뒤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심혈을 기울여 써낸 작품이 연주단과 지휘자의 연습 부족 등으로 형편없이 끝내 버린 것도 모자라 사정을 모르는 비평가들은 오로지 라흐마니노프를 향해 거친 비판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악몽 같은 기억에 발목이 잡혀 극심한 우울증에 걸려버렸고, 더 이상 작곡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던 라흐마니노프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2여 년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간신히 우울증을 이겨낸 라흐마니노프는 1899년부터 <피아노 협주곡 2>을 쓰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식적인 초연으로 자신의 재기를 알렸다.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재기 무대를 마련한 그는 작품성과 연주력 모두 인정받으며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세르게아 라흐마니호프는 러시아 태생의 음악인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작곡가와 지휘자로, 미국 망명 후에는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대표적인 러시아적 감성하면 광활한 설원 위를 내달리는 장면이나 독주를 마시면서 추는 민속춤의 격한 몸짓들이 떠오른다.

러시아 문학에는 열정만큼의 광기와 서늘한 비극성이 혼재된 경우가 많다.

라흐마니노프가 여기에 보탠 것은 신선한 낭만성 내지는 우울감이다.

그의 음악에서 흘러나오는 울적함이란 도리어 로맨틱한 감성을 더욱 자극 한다.

특유의 우울감은 서정성과 박력과 쌍벽을 이루며 청중의 마음을 파고든다.

아버지 바실리 라흐마니노프는 장군 가문의 후손으로 상속받은 거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귀족 집안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더욱 부유한 귀족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바실리는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허세와 낭비가 심했고, 계속되는 놀음과 여자 문제 등으로 재산을 탕진했다.

급기야 세르게이가 아홉 살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서민 아파트로 이주해야 할 정도로 몰락했다.

결국 부부는 파경을 맞았고, 이후 아버지는 어딘가로 사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1870년대 러시아 귀족 계급이 겪었던 전형적인 단편이지만, 라흐마니노프에게는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고통스런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에 사는 동안, 그는 두 명의 형제마저 잃었다.

정신적 충격이 더해지면서 라흐마니노프는 점점 더 침울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다행히 그에게는 피아노가 있었다.

네 살 무렵 시작한 피아노는 부모의 이혼 뒤에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음악원에 진학한 뒤에는 작곡 공부도 열심히 해서 졸업하던 해에 첫 작품으로 <피아노 협주곡1>를 발표했다.

<교향곡 1>이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피아노 협주곡2>으로 재기한 이듬해에 결혼식을 올리고 볼쇼이 극장에 지휘자로 취임했다.

하지만 1905년 혁명과 총파업은 너무나 치열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문을 닫은 극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 드레스덴으로 피신해 3년 정도 머물다 돌아갔다.

라흐마니노프는 부모 세대가 귀족이었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을 예견했다.

마침 스웨덴의 초청을 받았던 그는 스톡홀름에서 연주를 마친 이듬해,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 도착한 라흐마니노프는 마흔 다섯 살의 나이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하지만 혹독한 연주 스케줄에 시달리면서 요통과 관절염, 피로를 떨치지 못한 인생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그렇게 횜들었다니 더 동정과 연민이 가면서 더 끌린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불치의 향수병까지 더해 그의 우울은 영원히 그의 삶 속에 머물렀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러시아계 미국인 파아니스트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최고이자 유일한 전 유럽에 악명을 떨치던 이탈리아 출신의 어느 바이올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에도 온갖 괴담들로 가득하다.

바이올린이 귀재이자 명연주가 파가니니를 사람들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천사도 아니고 하필이면 왜 악마일까,,​

단지 놀라운 연주 솜씨에 대한 극찬이라기에 너무나 괴기스럽다.

파가니니가 자신의 별명을 달가워했는지는 알수 없다.

비쩍 마르고 병색이 짙은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해 현란한 연주를 펼친 뒤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는 파니니, 그는 과연 어떤 바이올린 소리를 들려주었던 것일까,,

<24개의 카프리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바이올린 테크닉을 총망라한 작품집이다.

1809-1817년 사이에 작곡한 것으로 추진되는 데 자신의 테크닉 공개를 지독하게 꺼리던 파가니니가 생전에 출판한 유일한 작품집이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으로 선보인 대부분의 기교가 들어 있는 만큼, 그 어떤 작품보다도 기교적 난이도가 높다.

사정이 이러하니 후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일깨운 작품집이면서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는 좌절을 안기기로 악명이 높다.

무반주로 작곡했지만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반주를 붙여 연주하기도 한다.

니콜로 파가니니는 이탈리아 제노바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다.

파가니니 형제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권유로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파가니니는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794년 열두 살이 되던 해부터 연주 인생을 시작했다.

고향 제노바를 시작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돌며 이름을 알렸다.

관객들에게는 파가니니의 연주뿐 아니라 외모, 무대 뒤의 모습 등도 흥미로운 얘깃거리였다.

우뚝 선 메부리코, 항상 충혈된 눈은 기인의 전형처럼 받아들여졌다.

연주 직전 줄 담배를 피우고 서성이면서 신경과민 증세를 보이기도 했는데 1시간 이상 연주 시작이 늦춰져도 관객들은 웅성거릴 분 그를 기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름 끼치는 소문이 돌수록 파가니니의 인기는 더욱 높아지고 그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엘리자 나폴레옹은 루카 지방의 새로운 군주가 된 직후 파가니니를 궁정 음악가로 임명했다.

그녀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다.

1805년부터 1809년까지 엘리자는 수시로 파가니니의 연주를 청해 들었으며 그녀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소리에 실신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염문설이 있을 뿐이다.

루카 궁정을 나온 뒤, 파가니니는 이탈리아 전역에 순회 연주를 다녔다.

경제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던 시기다.

점점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는 홀로 남겨질 어린 아들을 위해 연주에 매달렸다.

1828년부터는 해외 활동에도 공을 들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해 체코 프라하, 독일의 드레스덴과 베를린, 그리고 파리와 런던까지 가는 곳마다 파란을 일으키며 큰돈을 벌어들였다.

그의 연주회 티켓은 매우 비싼 가격에도 매진되기 일쑤였다.

암표 값이 10배 이상 치솟아 연주회를 잠정 연기해야 할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파가니니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임종 기도를 위해 방문한 사제는 악마가 씌였다는 소문이 맞느냐며 몰아세웠다. 후두암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파가니니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를 위한 모든 기도는 멈췄다.

고통 곳에서 삶을 마감한 파가니니는 자그마치 36년 동안이나 땅에 묻히지 못한 채 떠도는 불행을 겪었다.

제노바의 교회 묘지에 안장 되었던 열네 살이던 아들은 50세가 되어서 아버지를 고향 땅에 묻을 수 있었다.

1896년 파가니니는 파르마의 묘지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다.

파가니니에 대한 영화가 있는 걸 아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다.

그의 인생을 예습도 했고 영화에 연주도 나올테니까 언젠가는 볼 생각이다.

관심있는 음악가들에 대해서 읽어 보는데 평범하지는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