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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법 - 관용, 인간관계의 고통을 없애줄 확실한 키워드
백강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20년 8월
평점 :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하는 방법을 알면 세상사는게 편해 질 것 같다.
저자 백강이는 치열하게 사색하는 생각여행가, 10년차 작가이자 사색가, 네티즌이 선정한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 따뜻하고 다정한 문체, 핵심을 파고드는 통찰력 넘치는 글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늘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작가는 글을 쓰는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독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작가는 오늘도 힘겨운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만족도 필요하지만 독자의 편에서 힘이 되어야 한다.
관용을 베푼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삶의 질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
타인은 또 다른 나, 또 다른 우리이다.
우리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듯이 그들 또한 때로는 실수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은 고사하고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다른 이에게 향하는 증오의 칼날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워도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만이 참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만큼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은 없다.
누구든 용서하고 사랑으로 이해해야 한다.
관용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용서받을 짓 한번쯤 저지른다.
끊임없이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삶이 보다 행복하고 평화로워 질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관용은 달리 말하면 ‘용서’라고 할 수 있다.
관용과 용서는 비슷한 말이구나,,
관용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관용은 진정한 정의로 용서를 뛰어넘는 것이다.
관용은 나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존재를 용서하는 것이다.
또한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즉 관용은 용서와 이해와 사랑이 토대이자 주축이다.
관용이 얼마나 우리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알아야 한다.
살아오면서 관용만큼 인간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도 없다.
저자는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용기를 내어 관용에 관한 책을 썼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관용은 그다지 상업성을 지닌 키워드가 아니다.
특히 노골적인 성의 상품화와 자극적인 기사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관용은 더욱 낯선 단어일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표면적으로는 경제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더 신중하게 자신의 내밀한 면을 들여다보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넓은 가슴임을 알게 된다.
그 가슴이 바로 관용인가,,
용서와 이해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 핵심 키워드를 머리에 깊숙이 각인시킨다.
한 문장으로 관용의 정의를 압축해본다.
관용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하며,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사랑하려는 인간의 굳은 의지다.
관용은 그것을 실행하고자 하는 인간만이 획득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다.
용서는 잘못을 용인하거나 묵인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고귀한 행위이다.
그 사람이 잘했든 잘못했든 그 어떤 행위를 했든, 그 사람을 전적으로 수용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용서는 방대하고 한 점 의혹이 없이 순결한 일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존재를 자신의 삶에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교류하고 교감하면서 삶을 유지하는 존재다.
인간은 다른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만큼 타인은 우리 자신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런 소중한 존재들을 수용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드는 일과 다름 없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인생에 전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즉 이해는 인간에 대한 최고의 경의라는 의미다.
더 세밀하게 파악해보면, 이해한다는 것은 한 인간의 역사를 전적으로 인정해준다는 의미다.

이해는 다른 사람의 살아온 날들을 가감 없이 인정해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역사는 바로 우리 자신의 나머지 역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사랑은 인류의 희망이요, 삶의 결정적인 축이다.
사랑이 없는 세상은 전기가 차단된 어두운 세상일 것이고 산소가 결핍된 죽음의 세상일 것이다.
빛과 공기가 사라진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 없다.
사랑은 빛과 전기보다 더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다.
사랑은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궁극의 가치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쉽게 생각해본다.
사랑은 한없이 주는 것이다.
엄마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표본이다.
엄마는 자식의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행복이다.
그만큼 엄마의 사랑은 진정성 있고 깊다.
이처럼 사랑은 엄마처럼 다른 존재들을 한없이 걱정하는 것이다.
이런 심정으로 상대방을 염려한다면 상대방은 고마워할 것이다.
관용은 사랑으로 인해서 완성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궁극적으로 사랑이야말로 관용의 최대 요소다.
아무리 이해하고 아무리 용서한다고 해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 될 것이다.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 전적인 이해와 용서, 무조건 기다려주는 것, 무조건 수용해주는 것, 무조건 믿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지닌 사람이 된다는 건 관용적인 인간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사람은 사랑을 할 때 가장 행복해진다.
사랑은 불행을 행복으로, 가난을 풍족함으로, 불평을 감사로, 분노를 자비로움으로 바꾸는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그것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긍정적인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가능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그런데 불가능은 관용을 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악마의 선물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악마는 언제나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포기와 절망이다.
이 포기와 절망의 근원에는 무관용이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불가능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관용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한 사람이 산을 오르기 전에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난 저 산을 절대로 오를 수 없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는 당연히 산에 오를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산에 오르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가능성과 내면에 잠재된 힘을 믿지 않는 무관용을 했기 때문에 산에 오를 수 없게 된 것이다.
관용적인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산을 보면서 “난 저 산을 오를 수 있어, 정상에 올라서 멋진 풍경을 볼 거야, 도전해보자.”라고 얘기한다.
이런 도전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관용이다.
자신을 관용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 미진한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관용의 삶을 사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자신이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기대를 갖는다.
그러한 기대가 삶 자체에 그대로 적용되어 어떤 일이든 의욕적으로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관용하는 사람은 풀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침착하고 현명하게 그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그것은 관용의 잠재된 힘이다.
하지만 관용을 배척한 삶을 사는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은 불가능한 이유를 더 잘 찾아낸다. 이렇게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고 거기에서 도전을 멈춰버리는 것이 무관용한 사람의 패턴이다.
관용이 없이 산다는 건 가능한 일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름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관용이 없다면 관용을 채워 넣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없던 관용을 어떻게 내면에 채워 넣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진실이 있다.
인간은 원래 관용적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태어나기 전부터 관용이 있었던 것이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진실이다.
이 점이 의문스럽다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된다.
우리는 서로가 행복한 관용을 추구하던 존재라는 점이다.
관용은 마치 화분에 심은 식물과도 같다.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어야만 잘 자라는 식물처럼 우리의 관용도 늘 주인의 관심과 사랑으로 유지되고 더 성장하는 가치인 것이다.
관용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새롭게 그것을 채워 넣어야 한다.
먼저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겠다는 명백한 의지를 지니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날마다 새롭게 변화시키면 하지 못할 일이 없고, 머뭇거리면서 포기하고 훗날 후회할 일도 없을 것이다.
환경이 비참하다고 해도 관용하는 삶을 산다면 누구나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절망하거나 포기하기 전에 가슴속에 먼저 관용을 채워 넣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꿈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교류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꿈을 이루기는커녕 있던 꿈도 내팽개치고 다른 사람들과도 불화하면서 불행에 겨운 일생을 산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왜 누군 행복하게 살다 가고 누군 죽지 못해서 사는 걸까,,
어떤 선택일까,,
바로 행복해질 것인가, 불행해질 것인가 양 갈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열이면 열, 모두 다 자신의 행복을 바랄 것이다.
행복하게 한평생 무난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어쩌면 모든 인류의 소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행의 악순환을 멈추게 하는 것은 관용이다.
어떻게 관용이 그런 놀라운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지 의아해하는 시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관용은 생로병사를 주관하는 신의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관용을 한다는 건 신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가는 성스러운 행위다.
불행의 악순환을 관용으로 멈추게 만든 사람의 예도 있다.
K는 천애 고아였다.
부모는 그를 낳자마자 비닐봉지에 담아서 쓰레기장에 버렸다.
게다가 청각장애인이었다.
그의 장애는 당시의 의술로는 도저히 고칠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그는 입양되었지만 양부모에게 학대를 당했고, 결국 학대를 피해 집에서 도망쳤다.
그는 대낮에도 목숨 걸고 다녀야 한다는 할렘가에서 구걸하며 목숨을 연명했다.
그런 그가 불행한 인생으로부터 벗어나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건 그가 어느 날 자신과 한 다짐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산다면 난 영원히 불행한 삶을 살 거야. 이제부터 내 삶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살겠어. 그래서 내게 있는 불행의 씨앗을 모두 제거해버리겠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겠어.”
그는 당장 그 거리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건실한 일자리를 구했다.
배우지 못한 그가 할 일이라곤 육체노동뿐이었지만 그는 그렇게라도 일할 수 있음을 고마워했다.
열심히 10년간 돈을 모아서 그 돈으로 음식점을 차렸다.
다행히 음식 맛이 좋았던 그의 식당은 성황을 이루었고, 그는 더 이상 굶주리면서 불행해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요리 공부를 해서 대학교수가 되었다.
이제 그는 예전의 자신처럼 불행의 늪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기부와 봉사를 하면서 행복을 전파하며 살고 있다.
그는 늘 행복하다고 자랑한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인생을 믿는 것이 바로 관용이다.
관용으로 자신을 휘감고 있던 불행의 사슬을 끓어버린 것이다.
불행을 부르는 것은 잘못된 신념과 사상이다.
즉 자신은 언제나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자조가 그것이다.
그런 반관용적인 사상과 신념은 불행을 절대 벗어버릴 수 없게 만든다.
관용은 불행의 악순환을 멈추게 하는 기적을 선물해준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또 양부모에게 학대받던 가난하고 불쌍한 고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하는 사람이 된 K는 관용이 주는 기적을 선물 받은 사람이다.
한번 불행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다.
더 이상 희망의 빛이 안 보인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다시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관용이다.
관용은 그런 자들에게 절대로 불행해지지 않는 기적을 선물해줄 것이다.
누구든 관용을 베풀고 성공한다면 누구나가 다 자기를 좋아하게 만들 것이다.
관용은 다른 사람에게도 베푸는 것이지만 자기자신에게 가장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