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녕, 통증
최명원 지음 / 아침사과 / 2020년 7월
평점 :

통증을 알면 통증 관리가 쉬워진다.
저자 최명원은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도미니칸대학교에서 물리치료를 공개 전공하였으며, 다년간의 치료경험 끝에 통증을 조절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제대로 된 교육’임 깨달았다.
현재의 최명원의 시그니처 강의 ‘통증학교’를 통해 일반인에게는 통증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의료인에게는 통증관리를 도울 수 있는 교육에 힘쓰며 통증완화에 앞장서고 있다.
통증을 통제하지 않으면, 통증이 우리 삶을 통제한다고 한다.
‘통증학교’를 통해 통증을 바로 이해하고 스스로 통증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좋다.
아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통증은 누구에게나 경계 대상이다.
통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실체를 본 사람 또한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간혹 자신의 아픔을 보여주기 위해 아픈 부위를 잡고 있거나 인상을 찌뿌리거나 점잖은 사람이라도 날카로운 어조로 말하기도 한다.
통증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통증을 재해석하는 일은 통증조절에 있어 꼭 필요한 과정이다.
저자는 24개월도 채 되지 않은 딸을 보면서 유아 때부터 통증은 싫어하는 반응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는 걷다가 넘어져서 상처가 날 때뿐만 아니라 재밌게 놀다가 어딘가에 살짝 부딪혔을 때에도 슬픈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다쳤으니 봐달라는 것이다.
통증에 대해 공통적으로 쓰이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통증은 감각신경에 의해 뇌로 전달되는 불쾌한 느낌이다.
이 통증의 정의는 의학 사전에서 찾은 것이다.
치과에서 사용하는 국소마취제를 연구했던 치과의사 레오나르드 먼하임은 통증에 대한 정의를 유해한 자극에 의해서 발생된 불쾌한 감정으로, 이것은 특화된 신경 네트워크를 통해 통증을 해석하는 뇌로 전달된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통증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와 같은 질문을 한다면 ‘손상’이란 단어와 연결 지어 설명한다.
쉽게 말해 ‘다쳤으니까 아픈 거지’, 라는 식이다.
통증의 정의에서 조직 손상이라든가 유해 자극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통증의 발생과 조절, 통증의 의미, 그리고 중추 감각이라고 불리는 현상까지 설명한 것이다.
우리가 예상했던 통증의 원인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을 때도 있다.
조직의 손상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통증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통증이 예견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환자들은 심한 통증을 느낀다.
통증 연구는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신경과학을 접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만성통증에 대한 접근’으로 시작하면 된다.
통증에 대한 깊은 이해는 통증조절에 있어 중요한 발발점이다.
고대에는 통증을 영혼의 고통으로 생각했고, 통증을 느끼는 주체는 심장이었다.

중세시대를 연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우리가 통증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손과 머리에는 비어 있는 관이 연결되어 있다. 망치로 손을 내리치면 손에서 만들어진 통증이 비어 있는 관을 통해 머리까지 이동하게 되고, 통증이 머리에 있는 종을 치면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통증을 느끼는 기관은 심장에서 머리로 옮겨졌고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비어 있는 관, 즉 통증 신경을 없애주는 것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4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데카르트의 통증 개념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영국의 신경생리학자 찰스 세링턴(1857-1952)은 1906년에 데카르트가 발견한 ‘비어 있는 관’에 통각신경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독일의 생리학자 막시밀리안 폰 프레이 (1852-1932)는 통각신경과 연결되는 감지기, 자율신경종말을 발견하게 된다.
1965년에는 통증 연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새로운 이론이 발표된다.
캐나다인 로널드 멜작과 영국의 패트릭 월이 발표한 ‘관문 조절설’이 그것이다.
이론이 발표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체 말단에서 뇌로 전달되는 통각신경은 조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손상된 말단과 뇌는 통각신경을 통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널드 멜작과 패트릭 월은 척수 교양질이라는 문이 하나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문을 통해 말단에서 올라오는 통각신경은 조절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감각신경들은 택배기사로 비유하자면, 문을 통과할 수 있는 택배기사는 한 명인데 가벼운 촉감을 전달하는 택배기사가 통각을 전달하는 택배기사보다 달리기를 더 잘해서 재빨리 문을 통과하는 바람에 한발 늦은 통각 택배기사가 정보를 뇌까지 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로널드 멜작과 패트릭 월은 관문조절설로 해결되지 않은 현상들로 인해 자신들이 발표한 ‘관문조절설’ 에 대한 의문을 여러 차례 제기했다.
정리하자면 손상과 통증 관계가 불분명한 경우가 있는 점, 이 통증이 일어나는 위치와 손상 부위가 다를 수 있다는 점, 통증은 손상된 조직이 회복되고 난 뒤에도 계속 될 수 있다는 점이 ‘관문조절설’로 풀 수 없는 숙제였다.
통증은 뇌로 유입되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방출된다는 것이다.
의학기술의 발달 덕분에 우리는 뇌를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앞으로도 통증에 관한 신경매트릭스의 연구는 더욱 활발히 진행될 것이다.
통각신경은 ‘전외측 척수 시상로’라는 신경섬유를 통해 뇌로 전달된다.
사람들은 과거 수십년 동안 시상을 지나온 통각신경들은 결국 감각정보를 처리하는 일차체감각피질로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촉감을 느끼거나 온도의 변화를 느끼는 것과 같이 결국 통증도 느끼는 감각이기 때문에 일차체감각피질이 그 역할을 하기 에는 제격인 것처럼 보였을 수 있다.
통각신경을 타고 뇌에 도착한 정보들은 뇌의 일차체감각피질 영역에서 처리하는 것이다.
물리치료는 매일 받지 않는 게 좋다.
하루는 길을 걷다 노부부가 다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보통 같았으면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을 테지만 ‘물리치료’라는 단어가 귓가를 스쳤을 때 이미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상황을 짐작해 보니 허리가 아프니 물리치료라도 받아보라는 할머니의 권유에 할아버지가 버럭 화를 낸 것이다.
할아버지는 효과도 없는 물리치료를 뭐하러 받느냐며 소리를 지르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물리치료 하러 갔더니 그냥 붙여주기만 하고, 몇 분 꿀렁거리다가 끝나던데 그걸 왜 하라고 그래?”
붙여주기만 하고 꿀렁거리다 끝난다?
할아버지는 전기치료를 받으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전기치료가 아닌 물리치료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대중들은 물리치료를 이해할 때 보통 전기치료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대다수의 환자들이 물리치료사를 만나는 곳이 바로 전기치료실이기 때문이다.
전기치료는 물리치료사가 다룰 수 있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물리치료사는 다양한 영역에서 환자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심장재활이나 호흡기능 부전에 대한 치료를 담당하기도 하고, 여성 질환이나 산전 산후 관리에도 도움을 준다.
또한 뇌졸중이나 신경 손상으로 인해 재활이 필요한 경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스포츠 재활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대다수의 물리치료사는 단지 전기치료만 다루는 직업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만큼 전기치료를 필요로 하는 근골격계 환자들이 많다.
환자들은 기대하는 것보다 통증이 줄어들지 않게 되면서 불만이 발생하는데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 어느 마취통증학과에서 다음과 같은 슬로건으로 홍보하기도 한다.
백날 물리치료 받아봐야 효과 없다면,,,,환자들이 물리치료실에서 백날 전기치료를 받았음에도 효과가 없었다면 전기치료 자체가 문제가 있다기 보다 ‘백날’ 똑같은 전기치료만 했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닐까?
우리나라는 물리치료사가 처방을 낼 수 없다.
의사의 처방에 의해 치료할 뿐이다.
그렇다면 ‘백날’ 똑같은 처방만 내준 의사에게도 효과 없는 물리치료에 대한 동등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책임하게 들리지도 모르겠으나 효과 없는 물리치료-실은 전기치료- 의 책임이 전적으로 의료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낮은 수가 구조와 의료시스템 속에서 찾은 나름의 생존 전력이 지금의 치료 환경을 만들었다.
물리치료에 대한 수가가 원체 낮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물리치료사 한 명이 많은 환자들을 한 번에 치료해야 한다.
환자의 증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은 항상 부족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결과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기보단 치료를 해주었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때가 많다.
전기치료는 통증의 원인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전기치료의 목적은 통증을 단기적으로 줄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환자들은 전기치료가 관절염을 낫게 하고 허리디스크를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병원에 다닌다.
물리치료라고 불리는 전기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통증과 이별하는 방법은 운동을 하고 부항, 안마기, 물리치료, 도수치료가 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