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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벽을 넘어 세상을 바꾼 101명의 여성
줄리아 애덤스 지음, 루이스 라이트 그림, 김혜림 옮김 / 니케주니어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 될 거라는 편견에 맞서며, 고정 관념을 깬 여성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녀들이 있어서 다행인데 요즘에는 페미와 공산주의 단체와 합작을 한다고 해서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들의 공로를 못 본 체하고 그 가치를 깎아내리며 잊고 지낸다. 많은 문화권에서 여성은 교육받을 필요가 없고 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으며 육체적으로 약하고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믿어져 왔다.
반면에 남자들은 특별한 혜택을 누리며 자연스럽게 세계의 중요 문제에 관해 결정을 내리고 역사를 서술해왔다.
그러나 이런 불리한 환경에서도 여성들은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
최초의 누드화를 그린 것도 독일의 파울라라는 여성이었다.
여성들이 처음으로 한 일도 많은 것 같다.
그들은 앞장 서 변화를 추구하고, 여성도 남성만큼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준 개척자들이다.
여성들의 업적에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 우주선의 수학 계산을 한 것도 흑인여성이었다.
초기 문명에서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이 전사도 되고 여사제나 리더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와 로마 같은 고대 문명에서는 다른 원칙들이 세워졌다.
남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리더이며 여성들은 집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남성만큼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는 강력하고 분명한 시각을 가진 여성 리더들이 나온다.
이 여성들은 국가와 회사와 공동체를 이끌고 군사작전을 지휘했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훌륭하게 해내면서도 ‘여성’이라는 편견에 맞서야 했다.
어떤 여성은 가난하고 혜택 받지 못한 환경에서 리더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갖은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을 거두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개선하고 변화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여성들은 모두 자신을 믿었고 목표 달성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여성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그들의 걸었던 길을 따르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들의 끓임 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세계는 이 여성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안전하고 공정하게 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BC 69-30)는 로마제국이 최전성기였을 때 이집트의 여왕이다.
그녀는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시우스와 거래해 이집트를 로마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냈다.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지녔던 여성 중 한명이다.
부디카는(BC 30-60) 이세족이라는 켈트부족의 여왕이었다.
서기 60년 그녀는 10만 명이 넘는 국민을 이끌고 영국을 함락하러 온 로마군에 대항해서 싸웠다.
뛰어난 전사였던 여왕은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로마 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선덕여왕(?- 647)은 신라 제 27대 왕으로 한반도 역사상 첫 여성 군주였다.
선덕여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특히 계속되는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당과 친선을 도모하고 불교를 장려했고,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분황사 석탑과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동양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첨성대도 만들었다.

베나지르 부토는 정치가다.
베나지르 부토(1953-2007)는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태어났다.
당시 파키스탄은 영국령 인도의 무슬림 지역이다.
1947년에 세워진 겨우 6년밖에 안 된 나라였다.
베나지르의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지주이자 부유한 정치가였다.
1967년 파키스탄 인민당을 창당하여 1971년에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1968년 베나지르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하버드대학에 입학해서 졸업 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과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1977년 베나지르는 조국으로 돌아와 수상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그해 7월 군 수뇌였던 지아 장군이 파키스탄 정부를 뒤집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베나지르의 아버지가 처형되었고 베나지르와 어머니는 근처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베나지르는 파키스탄 인민당의 당수가 되어 군사정권을 끝내기 위해 다른 정당들과 협력했다.
그러다 여러 번 투옥되기도 했다.
1984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그녀는 파키스탄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전 세계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1985년 남동생의 장례를 위해 파키스탄을 방문한 그녀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 때까지 가택염금을 당하기도 했다.
다음 해 그는 파키스탄으로 영구 귀국했다.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그녀의 귀국을 환영했다.
인파가 너무 많아 12킬로미터를 가는 데 자동차로 아홉 시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1988년 지아 장군은 선거를 공표했다.
이 선거에서 베나지르가 승리하여 무슬림 국가 최초의 여성 수상이 되었다.
하지만 집권 2년 만에 불법 활동으로 기소되어 강제로 물러나야 했다.
1993년 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했으나 3년 후 또 물러났다.
베르지르는 5년 임기를 채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약속한 일들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학교를 세우고 수천 개의 마을에 전기를 연결했으며 언론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많은 일을 하기를 희망 했다.
1999년 파키스탄에서는 또 다른 군사 쿠테다가 일어났다.
베나지르는 아랍 에미리트연방으로 망명했다.
2007년 다시 민주 선거가 치러질 때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의 귀국을 환영하던 사람들 속에서 두 개의 폭탄이 터져 149명이 사망하고 402명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베나지르는 다치지 않았지만 두 달 후 자살 폭탄 테러로 결국 살해당했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그녀의 관 위에 장미 꽃잎을 뿌렸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경제적 기회에 고무된 사람들은 극단주의에 단호히 등을 돌릴 것이다.
헬렌켈러는 사회운동가, 작가다.
헬렌켈러는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19개월이 되었을 때 병에 걸려 눈이 멀고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말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무척 까다롭고 화를 잘 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도 많았다.
그런 헬렌켈러를 훈육하고 친절함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앤 설리번 선생님이었다.
자신도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헬렌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 설리번 선생님은 짧고 간단한 이름을 가진 사물을 가리키는 것부터 시작해 헬렌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단어의 철자를 써주면서 글을 가르쳤다.
그 덕분에 헬렌은 몇 개월 만에 단어와 사물을 연결하고 점자로 인쇄된 문장들을 읽었으며 펜으로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해졌다.
열 살 때는 선생님의 입술과 혀, 목에 손가락을 대고 진동을 느끼면서 말하는 법을 배웠다.
헬렌은 눈과 귀가 먼 사람으로 최초로 대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작가가 되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1903년 출간된 자서전<내 삶의 이야기>는 5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수차례 강연을 하고, 자신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활동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위한 캠페인도 벌였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또한 그것을 극복하는 것들로도 가득하다.” 고 말했다.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정치가다.
(1947-)미국 시카코에서 태어난 힐러리는 교육관과 근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힐러리에게도 두 명의 남자 형제들과 똑같은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힐러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진 것을 학창시절부터였다.
그녀는 학생회에 들어가 교지 만드는 일을 했다.
정치학으로 학위를 받은 후에는 인권운동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녀는 행정 시스템을 좀 더 공정하게 만드는 일을 하려고 변호사가 되었다.
코네티컷주에 있는 예일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남편인 빌 클린턴을 만났다.
대학 졸업 후 그녀는 민주당에서 경력을 쌓고 있던 클린턴이 있는 아칸소로 옮겨갔다.
두 사람은 1975년 결혼을 했다.
3년 후 빌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가 되었다.
힐러리는 계속 법조계에서 일을 했다.
두 번이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잇는 변호사100인’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1992년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두 사람은 워싱턴 D.C에 있는 백악관으로 들어갔다.
힐러리는 뒷자리에 앉아 자기 목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영부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웨스트 윙에 자신의 사무실을 차렸다.
자신을 위해 일할 직원들을 고용하고 새로운 보건 정책을 수립했는데, 그 정책은 아쉽게도 통과되지 못했다.
2000년 영부인이었던 힐러리는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기가 끝날 무렵 재선되었다.
그녀는 2008년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를 원했지만 버락 오마바의 지지율이 높다는 것을 알고는 뒤로 물러나 그를 지원했다.
힐러리는 오마바대통령 내각의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녀는 112개 나라를 방문했다.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위해 강력한 목소리를 냈다.
1915년 힐러리는 다시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2916년 11월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배했다.
힐러리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2917년 ‘온워드 투게더’ 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좀 더 공정하고 포용력있는 미국을 위한 힐러리의 비전을 지지하는 정치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모든 여자아이들에게,,,,여러분은 가치 있고 힘이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취할 자격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미국친구는 열렬한 트럼프지지자라서 나도 얘기를 듣다보니 영향을 받는다.
민주당쪽은 사회민주주의라서 사회주의와 좌파당이다.
난 미국친구를 통해서 트럼프가 보수라는 걸 처음 알았다.
트럼프책도 읽고 하면서 트럼프에 호의적으로 변했다.
트럼프를 위한 기도모임카페도 가입했다.
101명의 여성 중에 이런 사람들이 최우선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