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스티브 잡스가 반한 피카소
이현민 지음 / 새빛 / 2020년 2월
평점 :
품절


스티브잡스의 일하는 스타일이 어떤 규격같은 걸 정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디자인을 그냥 얘기하고 그 디자인에 맞는 내용물을 만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랬던 이유가 이 책을 보니까 조금 알 것 같다.

예술은 치유이고 이번에 읽은 책은 예술재테크라고 또 했다.

이 책은 예술은 창의와 상상, 소통이라고  한다.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잘하면 창의가 넘치는 천재가 된다.

난  항상 미술작품을 보면서 왜 가격이 엄청나게 비싼가인데 책도 많이 읽고 미대교수님한테 물어봐도 완전히 수긍은 안 간다.

합리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왜 명작인지 정말 궁금했다.

내가 볼때는 그냥 우중충한 그림일뿐인데말이다.

어제 엄마가 모네랑 마네가 다른 사람이냐고  했다.

마네는 풀밭위의 점심으로 시험문제에 나온 사람이라서 아는데 풀밭에서 밥을 먹는데 옷을 벗고 먹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여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남자가 또 있던데 민망해서 어떻게 그러고 밥을 먹을 수 있는지,,,

아마 실제가 아니라 무슨 상징 같은 것 같다.

피카소는 왜 유명한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림을 보면 그냥 애들이 장난을 친 것 같다.

마르셀 뒤생의 변기는 다다이즘의 상징이라고 시험문제에 나오던데 그것도 책을 읽기는 읽었는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 걸까,,

그래서 난 여성교수님들의 가르침을 소중히 받아들이고 있다.

엄마의 글도 읽어줄 때 잘 들어드린다.

프리다 칼로가 위대한 여성 화가이다.

프리다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고흐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았다.

나도 예술을 통해서 창의성을 얻어서 천재가 됐으면 좋겠다.









저자 이현미는 경희대학교에서 객원교수를 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이유는 내안의 천재성을 일깨워주고 꺼내준다고 하니까 읽었다.

난 스티브잡스가 관심 있었던 피카소보다는 여성 화가에게 관심이 무지 갔다.

17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세계 최초 여성 화가이다.

이 화가의 그림은 전에 본 적이 있다.

여성화가의 작품인지는 몰랐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긴데 자기 이름을 잘 알까라는 생각이 항상 든다.

아르테미시아는 르네상스적 화풍 가운데 바로크 화풍이 서서히 등장하던 시절에 활동하던 천재화가이다.

여성의 미술 공부를 허락하지 않던 당시 그녀는 23살 때 최초로 피렌체 디세뇨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는 영예를 얻으면서 세계 최초의 여성화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당대의 여러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피렌체 우피치 박물관 소장)와 같은 명작을 남겼다.

난 이 작품을 책에서 여러 번 봤다.

그녀를 미술사책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비평가와 학자들에게 재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시아는 카라바지오 이후 가장 뛰어난 바로크 화가로 평가되고 그녀에  관한 전기소설과 영화가 나왔다.

나도 여성 작가나 여성 변호사들에 대한 영화는 찾아서 보는데 아주 행복하거나 밝은 인생은 아니다.

힘들고 어둡고 전쟁같은 삶들을 다 살았다.

그녀의 여러 작품들이 강인한 여성을 주제로 하고 있고 그녀를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라고 부른다.

그녀에 대한 영화는 유명한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재능을 이어받고 태어난 딸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아가 17세기 때 당시 여성에게 금지된 누드화를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가 아르테미시아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어도  이름이 길어서 잘 외워야 할 것 같다.

남자만이 미술학교에 가고 화가가 될 수 있으며 인체탐구는 미술의 기본 덕목으로 여기던 당시였다.

학교는 못 가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뛰어났던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벗은 몸을 통해서 여체를  탐구하고 어부 폴비오의 누드로 남성 인체 묘사를 학습하기도 했다.

남녀 성관계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구 충족을 위해서가 아닌 그림 공부를 위한 인체탐구일 뿐이다.

그녀의 타고난 재능과 열정과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는 그녀를 친구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보낸다.

이 나라 이름은 우리나라이름의 길이에 2배이상이다.

아고스티노는 처음에 그녀의 그림지도를 거부한다.

이유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아가 여자라서이다.

정말 짜증이 난다.

안되는 이유가 여자라서라는게 같은 여자로서 화가 난다.

아르테미시아는 그동안의 연구작품들을 아고스티노에게 보여주고 아고스티노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그의 제자가 된다.

그녀가 아고스티노에게 보여준 연구작품 중에는 수많은 남자의 인체누드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고스티노에게 새로운 기법 등의 그림 지도를 받으면서 그에게 야릇함을 느끼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순결한 아르테미시아에게 아고스티노는 육체적 첫 남자가 되었다.

둘은 불륜이고 아버지의 친구이고 지금도 용납되기 어려운 관계인데 그당시는 어땠을까,,

이탈리아나 외국은 개방돼서 괜찮은게 아닌가보다.

이 둘은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고 아버지 오라치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친구 아고스티노를 강간 혐의로 고소한다.








법정에 선 아르테미시아와 아고스티노는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둘의 관계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의 처녀성 검사후 그녀가 육체관계를 가진 여자임이 밝혀지고 이후 치열한 법정 싸움이 시작된다.

아르테미시아가 최초의 화가인 건 좋은 현상이지만 윤리도덕적인 기준은 낮은 여성이라서 별로 끌리지는 않는다.

별로다.

난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하는 것처럼 남자는 내인생에 딱 한 명만 하나님이 주셨으면 한다.

둘도 싫다.

남자는 내 인생에서 멀리멀리하고 싶다.

이번에 뉴스에서 로스쿨 출신 변호사남편에 대한 얘기를 와이프가 쓴 걸 보고 엄마랑 나랑 끝까지 못 읽어서 그만 두었다.

사람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 저리 가라였다.

엄마는 남자를 더 멀리하고 엄마랑 더 같이 다니자고 했고 나도 모솔인게 차라리 행복하다는 생각이 또 강해졌다.

변론을 맡은 양측 변호사는 자시의 의뢰인을 위해 상대방이 나쁜 사람임을 그리고 부도덕한 사람임을 증명할 자료를 찾아냈다.

그 중에는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남성의  인체 탐구 연구작품과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도 있었다.

인체 연구작품은 그녀와 성관계 맺은 남자들로 또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작품은 아고스티노를 죽이는 본인을 그린 것으로 해석되면서 법정에서는 아르테미시아를 그렇고 그런 여자로 몰아붙였다.

아고스티노에게는 사생활이 복잡하고 어린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했다는 죄목이 붙는다.

처음에 아르테미시아는 강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을 줄로 엮어 잡아당기는 고문이 시작되자 그 광경을 두고 볼 수 없던 아고스티노는 자신이 그녀를 강간했다고 자백해 형벌을 받는다.

엥?  뭔 고문?

아르테미시아는 집과 아버지를 떠나게 된다.

메를레 감독은 아르테미시아를 희생양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현대적인 여인으로 묘사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를 보면 유디트의 드레스의 색이 서로 다른 두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법정 공방전이 벌어질 당시에는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유디트 작품만 존재했고 나중에 아르테미시아가 피렌체에 머물면서 금색 드레스의 유디트 작품을 다시 제작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과부 유디트는 아시리아 적장을 유혹하고 목을 잘라 이스라엘을 구한 용감한 여인으로 서양미술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림 소재이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을 보면서 빵 써는 것 같다고 말한 아르테미아답게 자신의 그림에서는 적장의 목을 있는 힘껏 베어 죽이는 잔혹함이 생생하다.

처음 그릴 때부터 쭉 강한 느낌을 전달하던 뛰어난 이 작품을 그린 그녀의 이름이 미술사에 올라올 수 있게 된 것은 여성화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긴 1970년 이후다.

그녀가 살던 시대를 350여 년이나 지나서이다.

천재라고 하는 작가의 작품이 새삼스럽게 발견된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이태리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역사를 지켜왔건만 이제서야 그녀를 알아 본 것이다.

오랜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서양 근대미술의 미술가 중 5%미만이 여성인 반면 누드화에 그려진 대상은 85%가 여성이다.

아르테미시아뿐만 아니라 로댕이 사랑한 천재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의 이름이 서양미술사 책에 등장한 것도 197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그 전까지 있던 많은 여성 천재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은 박물관과 역사책에서조차 찾기 힘들다.

남자들 중심으로 역사와 박물관은 채워졌다.

남자들 탓도 아니고 역사가 그렇게 흘러 왔다.

물리적 힘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서양은 백인의 나라였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현대 서양미술사에서 여성미술가의 재발굴이 있던 1970년대는 그 전까지 역사의 관심밖이던 여성뿐 아니라  소수집단 및 약자 등에 관심을 보이는 의미 있는 시대의 시작이다.

미국 예술계에서 페미니스트의 활동은 1970년대 가장 의미있는 발전 중 하나였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그렇지만 페미니스트 소요는 남성과 동등한 위상을 요구하는 힘을 여성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970년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절반에 불과했고  불법 임신중절 수술로 해마다 수천 명의 여성이 사망했으며 이혼법은 남성의 특권위주로 씌어 있었고 아이비리그 대학 대부분은 여학생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여성해방운동은 1969년 남성 지배적인 학생운동에 대한 반박용이 행동으로 바뀌면서 갑작스레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미술가인 인다 노클린은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었나]라는 영향력 있는 글에서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들이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는 것을 억압해왔고 여성들의 기여를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했다.










여성화가를 찾아보기 힘든 가운데 서양이지만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멕시코에 세계적인 여성화가가 있다.

그녀도 1970년대에 재발견되었다.

1980년 이후 각종 전시는 물론 책, 영화, 오페라 등을 통해 프리다 칼로의 삶과 작품세계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가 재조명 받는 이유는 그녀의 그림이 표현하는 솔직 담백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후세의 페미니스트들이 높이 평가하면서 세계가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평범하지 않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그녀의 힘든 삶을 예술로 잘 승화했다고 평가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뛰어난 상상력으로 그려진 초현실주적인 그림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 그 전까지는 어림도 없을 여자의 삶을 담은 예술작품이 이제는 중요하게 평가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는 지금의 해석으로는 한 인간이 한계를 극복하며 일구어 낸 예술이 되는 것이다.

난 프리다 칼로하면 그녀의 눈썹밖에 생각이 안 난다.

1907년 독일 아버지와 스페인과 인디언 혈통의 열렬한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프리다 칼로는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으며 성장했다.

몸은 불편하지만 총명한 그녀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이던 에스쿠엘라 국립 예비학교에 전교생 2000명 중 35명의 져자 중 한 명으로 의사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18살의 어느날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면서 그녀의 인생은 바뀌었다.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그녀는 척추, 갈비뼈, 쇄골이 부러지고 소아마비로 불편한 오른쪽 다리는 11군데나 금이 갔다.

오른쪽 발은 탈골에 뼈가 부스러지기까지 하고 어깨뼈도 탈골되었다.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강철봉이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빠져나왔다.

그로인해 그녀는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있었으며 회복기간 중에도 수없는 고통과 재발이 찾아왔고 35번의 수술을 이겨내야 했다.

이 사고 때문에 그녀는 의대를 포기하고 움직일 수 없이 침대침대에 누운 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를 들어도 정말 마음이 아프다.

부모는 그녀를 위해 침대의 지붕 밑면에 전신 거울을 설치한 캐노피 침대와 누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젤을 마련해 주었다.

그녀의 수술 후 첫 3개월간의 그림은 거의 자화상이다.

프리다 칼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자주이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이 나이기에 자화상을 그린다고 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초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오랜 치료와 많은 건강사의 문제를 극복하면서 화가가 된 후 22세 되던 해에 그녀는 자신이 존경한 당시 멕시코 최고의 화가 디에코 리베라와 21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여성작가들도 그렇고 여성화가들의 결혼생활은 왜 다 이러냐,,

디에고는 이미 결혼을 두 번이나 한 이혼남이었는데 그의 여성편력은 한 남자의 아내로 조용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그녀를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다 칼로는 아이를 가지려 노력했는데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나약해진 그녀의 자궁 때문에 3번이나 유산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계속되는 디에고의 외도,  그녀의 여동생과의 외도로 그녀는 성실한 아내의 역할을 포기했다.

프리다는 그 후 별거를 하고 자유롭게 여행하며 양성의 애인을 두기도 했다.

미국 여배우와 결혼을 원하는 디에고를 놓아주면서 둘은 이혼하게 되고 그녀를 괴롭혔던 척추의 고통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대수술을 했지만 육체적 고통은 심해만 갔다.

이혼 1년만에 재결합을 원하는 디에고와 합친 후에도 디에고의 외도는 여전했다.

계속되는 그녀의 건강 악화로 결국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만 했고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은 실패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 문장에서 눈물이 핑 돌려고 하지만 난 이성적이라서 눈물까지는 안 나온다.

정치적 성향이 있다는 이유로 전시회를 할 수 없었던 그녀는 1953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공산당이었다고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리베라와 그녀의 친구들이 열어준 전시회였다.

일어나 앉지도 못하게 된 그녀는 누운 채로 전시회를 보러 온 군중들 앞에서 노래하고 마시며 함께 기뻐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54년 7월 프리다 칼로는 한 달 남은 결혼 25주년 은혼식 선물을 리베라에게 먼저 주고는 그날 새벽 폐렴 증세의 악화로 고통과 고독 속에서 보낸 47년의 슬픈 생을 마쳤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재발견된 프리다 칼로의 멕시코를 벗어난 첫 해외 전시는 1982년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회고전이었다.

그후 스웨던, 독일, 미국에서 전시회가 이어지고 1991년에는 <내 마음의 디에고>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대표 작품이 될 정도였다.

이후에도 오페라, 뮤지컬, 음악, 영화, 책 등에 그녀가 소개되었고 2001년에는 최초의 히스페닉 여성으로 미국 우표에 등장하기도 했다.

멕시코혁명이 시작된 1910년을 본인의 탄생년도로 선언한 프리다 칼로를 위해 탄생 100주년 회고전이 멕시코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성대히 개최되는 등 프리다 칼로는 20세기 멕시코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성화가이자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인간의 고통을 승화한 예술 그자체가 되어 우리의 삶과 소통하고 잇다.

불행해, 불행해, 고흐때문에 항상 슬프고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프리다 칼로는 고흐 저리 가라이다.

이젠 프리다 칼로를 고흐보다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화가가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천재성이 내안에서 뛰어 나올 것인가,,

뛰어난 많은 여성들은 나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을 준다.

그냥 이 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내면의 무언가를 나에게 가져다 준다.

이탈리아의 최초의 여성 화가,,,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아르테미시아, 아르테미시아, 아르테미시아, 아르테미시아,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그녀들은 어떤 한계와 고통속에서도 예술작업을 쉬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볼때는 그게 바로 천재성이다.

난 그녀들에게서 천재성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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