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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와 작가, 예순 넘어 시작하다 - 한국판 모지스 할머니의 도전 스토리
주미덕 지음 / 바이북스 / 2020년 2월
평점 :

엄마가 작가가 되시겠다고 문예창작학과에 다시 들어 가셔서 매일 글을 쓰시는데 엄마한테 도움이 될 것 같다.
모지즈 할머니는 70이 넘어서 시골농장에서 바느질을 하시다가 손에 관절염이 와서 딸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여행객이 가게에 조그맣게 진열되어 있는 모지즈할머니그림을 보고 사서 알리기 시작하면서 국민화가가 되었는데 뉴욕미술관에 할머니 그림이 진열되어 있고 101살까지 돌아가시전까지 그림을 그리고 상도 많이 받고 유명해지셨다고 한다.
80살 넘어서말이다.
엄마는 시바다 도요시와 모지즈할머니를 보고 희망을 가지시고 묻어두었던 꿈을 꺼내셨다.
시바다도요시는 90살이 넘어서 아들이 시집을 내주고 유명해졌다.
인생도 그렇고 뭐든지 끝날때까지는 끝난게 아니다.
저자가 만약 나이 60이 넘었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요즘 60은 옛날하고 다르다 사람들은 60은 아직 젊은이다.
신중년이라고 한다.
엄마대학원모임에 따라 갔는데 회장님이 나이60은 과거의 30대 같다고 했다.
그러기에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자신이 평범하게 살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주부 또는 할머니에 불과할 것이다.
저자는 음식 박람회에서 상도 받았고, 요리해서 사람들과 나눠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엄마는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니 유튜브를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유튜브를 시작하면서 다방면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저자와 가족만의 삶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며 내재된 저자의 달란트를 찾아보고 블로그도 시작하고, 가슴 뛰는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평범했던 저자가 환갑이 넘어 꿈을 품고 도전했더니 이루어졌다.
꿈은 꾸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꿈을 갖기란 늦은 나이란 없다.
지금 시작해도 열매를 맺고 얼마든지 수확하며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을 향한 도전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눈다.
저자는 남은 삶을 멋지게 즐겨보자고 권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라고 전한다.
나이 든 사람은 심장이 두근거릴 테고, 젊은 사람은 주먹을 불끈 쥐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도전, 해냈다는 성취감, 배움에 대한 열정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끈기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전해지길 바란다.
“삶의 주인으로 내 꽃밭을 가꾸고 그 향기 나누며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는 저자는 아내, 엄마로 살았다.
또 쌍둥이 할머니다.
전형적인 한국사회 ‘여자’로서의 삶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인생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안주하지 않았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새로움의 시도였고, 배움을 향한 열정이었다.
‘60’ 이라는 숫자는 그녀의 삶에서 의미를 잃었다.
유튜버와, 작가로 즐기고 있다.
요리를 배우러 다니니까 삶에 활력소가 생겼고, 수업 시간이 기다려졌다.
내일은 요리를 어떻게 풀어갈까, 나날이 즐겁고 기대되었다.
그러다 보니 실습 시간도 어느새 지나갔다.
남은 것은 시험이었다.
필기는 한 번에 합격했다.
하지만 실기에서는 떨어졌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음식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시험이라 떨려서, 손도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았다.
두 번 불합격하고 세 번 만에 합격했다.
삼수 끝에 받은 조리사 자격증은 인생의 큰 상장이었다.
자격증을 받아 집에 오는 내내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완장차면 거만해진다더니, 자격증을 받으니 자신감이 상승했다.
집에서 아이들에게 피자와 탕수육 등을 신나게 만들어주었다.
요리를 하면서 신명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백화점 문화 세터에서 꽃꽂이도 배웠다.
내친김에 빵 만드는 법도 배웠다.

여성 문화 센터에서 커피 종류며 커피 내리는 법, 커피에 우유 넣는 법등을 배웠다.
아쉽게도 그때에는 바리스타 양성과정이 없었다.
일본어도 배웠다.
배울 때는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그중 하나는 일본어 가이드 실습을 한 것이다.
학교 공부가 끝이 아니다.
배움은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수지침도 배우고 뜸도 뜨고 저자 손에 침을 놓았던 적도 있는데, 지금은 거의 잊었다.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나니 일단 자신감도 생기고, 요리도 즐거워졌다.
요리를 배우고 나니 달라졌다.
우리 집에서 모임을 해도 혼자 거뜬히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 집에서 북적북적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이웃에서도 그랬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향기 가득한 시절이었다.
박람회때는 정말 열심히 뛰었다.
손님들에게 설명도 하고, 가족이 오면 구경도 시키고, 다른 사람의 출품작도 연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많은 보람을 선물해준 박람회였다.
저자는 감개무량하게도 새로운 개인사, 역사가 생긴 것이다.
힘들어도 도전해야 새로운 인생이 열리고 역사가 남는다.
언젠가 코엑스에서 열린 건축박람회에 간 적이 있었다.
15년 전, 음식박람회 추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름다운 추억 여행을 하면서 건축박람회를 구경했다.
폐백 음식수업이 끝나고 떡수업도 신청했다.
떡을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게 찜통을 장만했다.
떡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녔다.
수업에 쓸 쌀가루는 선생님이 준비했다.
쌀가루에 물을 넣고 비벼서 체에 두 번 내린 후 찜통에 올려 25분 찌면 뜨거운 떡이 나온다.
그 과정은 무척 신기했다.
떡의 재료는 매주 달랐다.
단 호박을 쪄서 쌀과 섞거나, 호두와 해바라기 씨 같은 각종 견과류를 넣기도 했다.
도토리가루를 넣은 적도 있다.
찹쌀가루를 내어서 떡을 찐 후에 견과류와 밤을 넣어서 먹었는데,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만큼 맛이 있었다.
저자는 제빵도 배웠다.
한 동안 빵도 많이 만들었다.
맛있었겠다.
몇 년 전에는 앙금플라워 떡케이크도 배웠다.
떡 위에 틀로 짜서 장미꽃이며 작약, 국화꽃 등을 만들어 장식하면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떡케이크가 완성된다.
손수 만든 떡 케이크를 손주들 백일과 돌상에 올리는 성과를 냈다.
정성 가득한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어서 할머니로서 참 뿌듯했다고 한다.
배운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배운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배울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한때는 정말 사진 찍기 싫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꽃의 아름다움에, 풍경의 아름다움에 순간 저자 자신을 잊고 폼을 잡았다.
이 시점이 지나면 다시는 아름다움을 못 볼 것만 같은 조바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제일 젊지 않은가!’ 사진 찍으며 이렇게 스스로를 북돋는다.
남편은 경상도 사람이다.
“밥도”, “자자”, “아는”, 이 세 마디만 하는 사람 중 한명이다.
남편의 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웠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인지 남편은 아이들에게 사랑 전하는 법을 잘 몰랐다.
아이들을 속으로는 예뻐했다.
지금처럼 지식과 정보도 부족한 시대라 사랑을 전하는 방법을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 어렵던 시절에도 친구처럼 소통하고 따뜻하게 사랑을 전하며 살았던 부모도 많았을 것이다. 시대가 편안했다면 더 많았을 텐데말이다.
저자는 친정엄마가 생각난다고 했다.
저자의 우리 엄마는 잔소리가 심했다.
어릴 적에는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가 어려서 세상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결혼을 한 뒤에도 엄마의 잔소리는 끓이지 않았다.
“시부모님에게 잘해야 너희가 복 받는다고” “엄마가 죽어도 신앙생활 열심히 해라” “착하게 살아, 착해야 복 받아.”이 밖에 잔소리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엄마는 여전히 자식은 ‘어려서’잘 모를 거라 생각했고, 자신이 자식 교육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은 참 바쁘다.
집도 마련해야 하고, 육아도 해야 하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아들이 결혼해서 부모의 품을 떠나면 ‘장모의 아들’이 된다고 말한다.
언젠가 친구들끼리 모여 이런 우스갯소리를 나눈 적이 있다.
“해외여행을 장모와 다녀왔다는 소리를 들어도 며느리와 다녀왔다는 소리는 듣기 힘들어.”
지인들과 모임을 가지면 밥집이나 커피숍을 간다.
밥집에도, 커피숍에도 칠십대 이상으로 보이는 분들이 꽤 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노년들도 많다.
어느 날 친구들과 커피숍을 갔을 때도 그랬다.
한 친구가 어르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들이 우리 미래 모습이야.”멀지 않을 미래다.
60대나 70대나 별로 차이가 안 날 것 같은데,,
홍콩에는 100세 할아버지가 박사학위를 받고 우리나라는 80대 할머니가 석사학위를 받는 것도 봤는데,,
요즘은 100세인 분도 정말 젊어 보였다.
시대에 따라 본인이 적응하며, 즐기며 살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오늘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누리지 않으면 그저 늙어갈 따름이다.
세월에 따라 늙어만 간다면 미래는 어두울 뿐이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누리면서 화사한 내일을 맞이하기 바란다.
책과 영상을 통해 모지스 할머니를 알게 되었다.
감동에 감동이었다.
모지스 할머니는 7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딸의 병간호를 하다 손주들이 쓰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림 마음을 먹은 것이다.
“사람들은 늘 내게 늦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사실 지금이야말로 가장 고마워야 할 시간이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이다.
무언가를 딱 시작하기 좋은 때다.
할머니는 101세까지 1600점의 그림을 그렸다.
모지스 할머니는 그림을 특별히 배우지도 않았다.
그중에 경매가 14억달러에 팔린 그림도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린 것은 아니다.
그저 느끼는 대로 그렸다.
그랬더니 오히려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따뜻한 그림이 탄생했다.
감상하는 사람들은 그림 앞에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이 그림에 담겼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는 진정한 능력자이다.
화폭의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할머니의 배려가 그런 능력을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 많은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했을까,,
더구나 관절염으로 바늘에 실을 꿰기조차 어려웠다고 하는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할머니는 자신을 괴롭히는 관절염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반전을 일구어냈다.
생각의 전환이 있었기에 반전이 가능했을 것이다.
성공을 붙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제 2의 인생을 충만하게 누리다 세상을 떴을 것이다.
모지스 할머니 뿐아니라 요즈음은 우리 주위에도 그런 분이 많다.
나이를 세고 있지 말아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이의 숫자는 지울 수 없지만 젊게 살 수는 얼마든지 있다.
나이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지면 얼마든지 모지스 할머니 보다도 더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본다.
나도 뉴스나 엄마주변에 90대에 책을 내고 새로운 인생을 사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봤다.
우리엄마도 50대가 넘어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박사과정을 공부했다.
문예창작학과도 다시 들어가셨다.
엄마는 아마 계속 공부를 하실 것이다.
그게 영원히 젊게 사는 비결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