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산의 사람 그릇 - 18년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만나다
진규동 지음 / 레몬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정약용에 대한 책을 2권 읽고 완전히 반해서 다음주에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 유적지와 실학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난 천재나 엘리트가 정말 좋다.
세계를 보는 눈이나 현상을 보는 마인드가 틀리기는 틀리다.
그대신 착해야 더 매력적인 천재다.
정약용은 조선 몇 대 천재라고 한다.
정약용이 불공정에 대한 책을 썼다고 했던 걸 들은 것 같다.
흠흠신서,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고문으로 읽어 본적이 있는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 내용이 있어서 반가웠다.
인간은 고도의 지능을 가지고 독특한 삶의 영위하는 고등동물이다.
조직사회를 이루고 언어와 도구를 사용한다.
자유의지와 선택을 하면서 존중을 받으면서 사는게 아닌지라는 생각도 든다.
세기의 천재들은 고대나 과거시대에는 책이나 자료도 없는데 어떻게 공부하고 지식이 뛰어난지 항상 궁금하다.
종이가 없어서 아내의 치마폭에 글을 썼다고 했다.
다산은 18년의 우울한 유배지에서 침식되지 않은 이유가 저술과 자연, 시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아플 때 책을 읽으니까 우울증에 안 걸렸다.
다산은 500권 가까이 책을 섰다.
나도 글을 쓰니까 기분 나쁘거나 우울한게 해소가 됐다.
다산을 통해서 분노, 우울함을 책으로 승화를 시킬 수 있다는 걸 또 배웠다.
난 화가중에는 고흐, 모네가 좋아서 나중에 아를과 지베르니에 가고 싶다.
정약용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건 한국에 있어서 다행이다.
난 정약용이 참 좋고 우리나라에 이런 인물이 있다는 사실도 정말 좋다.
이 책을 읽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상기하면 정약용은 어떻게 천재가 되었고 오랜 유배생활에도 왜 우울증이 안 걸렸는지 궁금해서이다.
다산은 10세가 되어 학과에 힘썼다.
5년간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 않고 한가로이 지냈고 다산은 이때 부친으로부터 자율학습을 통해서 경사와 고문을 부지런히 읽을 수 있었고 사율로 칭찬을 받았다.
존 스튜어트 밀도 아버지가 가르치고 조기교육을 했다고 들었다.
15세에 장가를 들었는데 그때 부친이 다시 벼슬하여 호조 좌랑이 되어 서울에 거주했다.
이때 이가환이 문학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며느리의 아버지 이승훈이 뜻을 세워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근본으로 그 뜻을 받들고 계승하였다.
다산은 이승훈의 뜻에 함께 동참하여 성호 이익의 저서를 보고 학문하기로 마음억었다.
그런 가운데 부친이 화순 현감으로 나게 되어 그 이듬해에 동림사에서 독서하였다.
1780년 봄 부친이 예천 군수로 옮겨져 그로 인해 진주를 유람하고 예천으로 와서 황폐한 향교에서 독서하였다.
1782년 가을에 봉은사에서 경의의 과문을 익히고 학습을 했다.
다산이 천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학문적이고 주변 자체가 학문적이었던 거다.
그리고 독서를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정조 9년 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이때 정조가 중용강의 80여 조에 대한 숙제를 내리면서 답을 작성하게 했다.
다산은 학식이 넓고 성품이 우아한 친구 이벽을 찾아가 함께 왕이 낸 숙제를 했다.
정조 임금이 답을 보고 칭찬하여 제일로 삼았다.
이때부터 왕에게 발탁이 된거다.
도승지인 김상집이 사람들에게 정약용이 이와같은 칭찬을 얻었으니 반드시 크게 떨칠 거라고 했다.
정조11년이래 다산에 대한 왕의 총애는 더욱 성대했다.
정조13년 문과에 합격하여 규장각에 마련된 교육 및 연구과정인 초계문신이 되었다.
그해 겨울 한강에 주교를 설치하는 공사에 참여하여 규제를 저술하여 올렸다.
다산은 이처럼 정조 즉위 동안 정조의 측근으로 치열한 당파싸움 속에서도 정조의 보살핌 속에서 다양한 업무는 물론 다산의 학문 세계를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정도의 다산에 대한 기대와 미래 핵심인재로서 육성코자 했다.
다산은 젊었을 때 천주교를 믿었다는 구실로 반대 세력으로부터 수많은 비난과 비방 그리고 상소를 받아 현직으로 쫓겨나기도 하고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정조 임금은 정약용을 감싸며 미래 자신의 확실한 인재임을 믿고 신뢰했다.
다산처럼 천재가 되려면 정조같은 임금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
난 하나님이 있으니까,,,,,,

다산은 18년 유배생활을 했다.
그 오랜 유배생활중에 우울증에 안 걸린 이유를 알아 봐야 한다.
그 이유를 알면 내가 어떤 생활, 힘든 삶, 고난중에도 잘 버틸 수 있게 된다.
다산은 무엇보다 자신의 주변에서 자연을 보살피며 벗을 삼아 울분과 분노를 다 쏟아내며 시로 승화시켰다.
엄마한테도 계속 시를 쓰라고 해야 겠다.
주변을 손수 가꾸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서 수려한 언어로 시를 지었다.
다산 4경은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손수 조성한 초당에 대한 풍경을 시로 지었다.
순조 8년 다산으로 옮겨 단을 쌓고 못을 파서 꽃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들여 비류폭포를 만들었다.
동암과 서암 두 암자를 수리해 1천여 권이나 장서하고 글을 지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칠언시로 지은 다산4경의 맨 첫 번째는 초당 왼편 위쪽에 있는 바위에 새긴 정석이다.
정석의 의미는 다산 정약용이기도 하지만 다산이 존경하는 인물 4사람의 뜻을 새긴 것이다.
그 4명은 송나라 학자 미불이고 둘째는 도연명이고 셋째는 은나라 부열이고 마지막은 우임금이다.
전부 중국사람이네,,,,
다산은 조경전문가이다.
초당의 이곳저곳을 규모 있게 꾸미고 단을 만들어 미나리며 상추며 식자재를 자급자족했다.
연못 속의 잉어들의 놀이를 보면서 날씨까지 예상했다고 하니 기상예보관이 따로 없다.
다산은 직접 실행하고 즐기며 시를 쓰면서 유배라는 우울한 생활을 즐겼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우울하게 그냥 그 환경을 받아들이고 있으면 안되고 다산처럼 이것저것 해야 하는 것 같다.
다산은 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 주변 경관을 친구 삼아 자신이 아끼는 풍경 8가지를 골라 다산팔경사를 지었다.
다산은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뭔가를 계속 하는 것 같다.
다산은 부녀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정성스럽게 가꾸며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살림을 살리는 방법까지도 직접 실천하고 보여주면서 해배 시점에서는 재산까지 불려서 다산계를 조직하여 제자들이 함께 하면서 친목을 다지도록 했다.
다산은 유배라는 억압에 억눌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자연과 함께 동화시키면서 또 다른 유배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것이 18년이라는 유배의 우울한 먹구름을 걷어내는 다산의 지혜였다.
울분과 분노의 응어리를 풀어내면서 또 다른 열정으로 승화시켜 위대한 학문적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다.
난 언제나 얘기를 하지만 학문적이고 지적이면서 나에게까지 지적충격을 주는 사람이 너무 좋다.
다산의 지혜와 학문적 수준이 너무 좋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출세를 하려고 한다.
강진에서 10년의 유배 생활 중에 다산은 해배의 기회를 몇 번 맞이했지만 사용보의 반대에 부딪혀 해배가 되지 못한다.
다산이 해배되어 조정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을 때도 사용보는 반대를 끝까지 했다.
다산의 친구는 세도가에게 칭송하는 시나 글을 올리면 해배될 거라고 했다.
유배 생활의 불안과 초조 속에서 끝이 없고 가족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컸다.
다산은 지인의 얘기를 받아 들이고 해배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일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다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념으로 주인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다.
자신의 시련과 고통보다는 백성들의 어려움과 관료의 포학에 대한 현실을 걱정했다.
다산은 출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지만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통해서 출세하지 않았다.
다산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아무리 시련과 고통에 처할지라도 실행하지 않았다.
당파싸움에 휘말려 희생된 다산은 장기로 갔다가 강진까지 유배를 당하여 18년이란 세월을 그곳에서 썩어 지내면서도 어물전에 고기 썩는 냄새가 아니라 깊은 산사에 솔잎이 썩어 먼 훗날 나무들의 밑거름이 되듯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깊고 깊은 사고의 샘터가 되고 있다.
출세를 위해 의리도 저버리고 해배되어 세상에 나갔다면 오늘날 다산학이라는 위대한 학문적 결실은 물론 다산이라는 위대한 학자로서도 역사 속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18세기 미국의 개척사에 두명이 있다.
마르크 슐츠와 에드워즈 조나단이다.
난 에드워드 조나단같은 가문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신대륙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왔다.
에드워드 조나단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다.
마르크 슐츠는 돈을 벌어 부자가 돼야 겠다고 해서 술집을 차려 돈을 많이 벌었다.
150년이 지나 5대 자손들이 태어난 후에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는 컴퓨터로 이 두사람의 자손을 추적했다.
에드워드 조나단은 프린스턴 대학을 설립하고 1394명의 자손을 퍼뜨렸다.
산교사 목사 116명, 예일대학교 총장을 비롯해 교수, 교사만해도 86명, 군인이 76명, 고위관리가 80명, 문학가가 75명, 실업가가 73명, 발명가가 21명, 부통령이 한 사람, 상하의원 주지사, 장로와 집사가 286명이 나왔다.
마르크 슐츠는 1062명의 자손을 두었다.
자손의 현황을 보니 교도소에서 5년 이상 형을 산 자손이 96명, 창녀가 65명, 정신 이상, 알코올 중독자가 58명, 자신의 이름도 못 쓰는 문맹자가 460명, 극빈자가 286명이었다.
자손들이 정부의 재산을 축낸 돈이 1억 5천만 불이었다.
200여 년 전 다산이 일신의 출세를 위해서 일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학문은 물론 학자로서 역사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가치관의 혼란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다산과 서부개척시대의 두 청년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생각하게 한다.
나도 다산이 약삽한 사람이었다면 다산의 책을 절대로 읽지 않고 그를 동경하지 않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