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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 명확히 설명 안 되는 불편함에 대하여
박은지 지음 / 생각정거장 / 2019년 8월
평점 :

난 요즘도 불합리한 얘기를 너무너무 많이 들었다.
어떤 여자는 정말 아들을 낳으니까 시어머니가 고맙다고 했다는둥, 친척언니는 딸만 낳으니까 시댁에서 뭐라고 한다는 둥, 어떤 예능에서도 딸을 낳으니까 시부모가 며느리가 나이가 많으니까 빨리 아들을 낳으라고 했다는 둥,,우리엄마집안도 딸은 공부하지 말고 아들은 서울대 법대에 판사, 건설부장관까지 되게 밀어줬으면서 말이다.
아는 언니도 자기집은 아들을 우선시 한다고 아들이 제사를 지내주니까요,,나중에 시부모랑 문제가 생기면 며느리가 참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난 강남의 교수아들에 스카이를 나오면 좀 발전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조선시대 얘기를 하는 것을 봤다.
나는 잘잘못이 어디있는지 따져 봐야 하는거지 왜 무조건 참냐고 했다.
과선배는 여자는 25살이나 30살이 넘으면 끝났다고 하길래 선배꼴을 보니까 선배는 지금도 남자로서 끝난 것 같다고 했다.
나보고 넌 강남스타일인데 왜 강남에 안 살아 하길래 오빠는 아프리카에 사는 사람처럼 생겼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했다.
내가 아프리카사람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그쪽 사람 비슷하게 생겼는데 항상 강남, 역삼동얘기를 수십 번 해서 그랬다.
엄마친구도 결혼을 하면 아들을 낳으라고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성염색체는 남자의 정자가 결정하는 것이고 자신들이 남자가 아니면서 아들을 우대하고 지금도 어디가 여성상위시대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나도 남동생이 공부를 못하고 아빠엄마한테 잘 못하니까 아빠엄마가 나를 우대하지 내가 공부도 못하고 못생기고 했으면 어떻게 대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는 힘이 세고 체력이 좋은 것 말고 여자보다 뛰어난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왜 사회나 주변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는 식으로 받아 들이고 얘기를 하는지 난 받아들일 수 없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페미니즘은 사회혁명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 가는데 완전히 필요하다.
여자는 어때야 하고 여자는 어떻다는 둥하는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걸 깨고 싶다.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이 심해지니까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했던 배려를 회수하겠다는 협박을 한다.
사람들이 여성은 의무는 나누지 않고 혜택만 챙기고 있다고 한다.
전구를 갈아 주고 자리를 양보해주고 무거운 것을 들어주고 집에 데려다 주었던 것은 다 누렸으니까 그것도 불평등이라고 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막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된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역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허락한 범위 안에서 여성들이 안락함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지만 조금 더 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부분에서는 여기서부터는 남자들의 세계라며 가로막았다.
조직생활이나 직장생활에서는 여성은 이래서 안 뽑는다고 하는 텃세가 있다.
여직원이라는 말자체가 남성의 세계에 여자가 들어 왔다는 뜻이다.
여성이 누릴 것만 누리고 의무는 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론을 펴면 동등한 경쟁을 위해 여성이 받는 제약을 없애는데 관심을 가져 준적이 있는지 저자는 묻고 싶다고 한다.
아직도 텔레비전이나 주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여성을 절대로 동등한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항상 역할을 나누고 남자니까 돈을 더 많이 쓰고 여성을 보호하고 책임지길 바라지 않으니 저자는 같이 일하는 남성들과 똑같이 일하고 동등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기회를 갖고 싶다고 한다.
정말 맞는 얘기이다.
여성 인권이 향상되어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받는 세상이었다면 데이트 비용의 불균형이 나타날 이유가 없다.
여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굳이 집까지 데려다줄 필요가 없다.
남자들도 힘들다고 하면서 그들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여성들은 지금까지 억압되어 온 자유와 불평등에 대해서 말하고 계속 말하고 있는데 말이다.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남성들은 자신들이 누려온 혜택에 대해서는 논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살림하고 며느리노릇하기 싫으면 여자도 집 사라라는 댓글은 봤지만 남자들도 집안일과 육아에 참여하고 처가에 안부 전화도 하고 명절 때 차례 음식 준비하러 갈 테니 여자들도 당직 서고 돈 벌고 집 사라는 취지의 발언은 못 봤다고 한다.
남성들은 양보한 것에 집중하고 어느 쪽으로든 치우친 구조를 바로 세우는데는 관심이 없다.
여성이 동등하게 함께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가 누군가의 것을 하나씩 뺐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개념과 기반부터 다시 세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저자나 저자친구들이 명절 때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전을 부치니까 친척들이 자상한 남편이라고 세상에 저런 남편이 어디있냐고 하면서 시집 잘 온 여자가 된다고 한다.
남자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좋고 자상한 남편이 된다고 한다.
집안 일을 나눠 하는 것은 복덩이 남편을 만난 덕분에 얻은 혜택이 아니라 공정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저자가 그런 얘기를 하면 그래도 변화가 되고 있는데 고맙게 여겨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돌아온다.
저자는 그런 변화가 더디고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한 불편함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예민한 여자로 취급받는다.
저자의 얘기가 맞는 것 같은데말이다.

집안일이 특별한 역할인 것처럼 화젯거리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님 세대의 전통적인 성차별이 개선되고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는 하다.
저자의 남편도 자기 정도면 오픈 마인드라고 하는데 보통 이상이라는 데에 동의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건 보통의 기준이 지나치게 낮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속담이 있고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것도 있다.
산에 가야 범을 잡는다고 했다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한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 적용되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믿고 싶은 지의 문제다.
알아서 이득이 되는 상황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모르는 게 차라리 나으면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것을 떠올린다.
여자끼리 갈등이 생기면 사람들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떠올린다.
남자들의 싸움에는 남자의 적은 남자라고 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남자들이 싸우면 건강한 토론으로 보는데 여자들이 싸우는 건 질투나 시기의 문제로 치부한다.
남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여성을 분류하거나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여성이 겪는 문제를 여성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한정한다.
그 다툼은 건강하지 않고 남성들은 그냥 방관하거나 판단을 한다.
직장에서 어린 여성을 나이 든 여성이 질투하고 싸우는 것이라는 여적여 프레임을 씌운다.
직장 내에서 남성들은 능력이 좋은 여성이 아니라 순종적이고 예쁜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기 위해서 능력을 키우고 성과를 내면 기가 세다거나 독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여성들에게 사회적으로 허용된 범위는 부족하고 싸움의 무기 역시 한정적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서 거쳐 온 많은 여성조력자들도 있었고 자신을 공격했거나 위협했던 남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못되게 말하는 남자들도 많고 못되게 말하는 여자들도 있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것 같지만 때로 우리는 말하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유난인 것 같아도 예민해 보이더라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한 말들이 어떤 세상을 믿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저자는 남자가 칭찬한다고 해서 그 칭찬에 감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쁘게 생겨가지고 성격은이라는 불평에는 예쁜 얼굴을 한 여성은 남성의 감상 대상이기 때문에 마당히 순종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일터에서 여성의 외모나 몸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저자는 당신의 꽃이 되려고 직장에 있는게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런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칭찬을 받는 것뿐 아니라 칭찬을 하는 것도 너무 어렵다.
난 칭찬을 잘하는 편인데 그것도 조심해야 겠다.
꾸미는 자유나 안 꾸미는 자유는 페미니즘에 신경 쓰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
꾸밈 노동을 거부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꾸밈 정도를 의식하여 상대방을 평가하지 않는 사회여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꾸미지 않은 것에 대한 창피함, 죄책감 같은 것을 굳이 감당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자신이 입고 싶은 것을 입고 하고 싶은 만큼 화장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반사적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거나 검열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 살쪘어라든지 자기관리부족이라고 지적하는 사회에서 탈코르셋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자신감을 갖는 것이 개인의 멘탈문제로 한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이상 너 살쪘어라든지 오늘 화장 안 했어라는 질문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대한 것은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나이가 어떻게 되냐,,결혼했다니 아쉽다 등등의 얘기를 들으면서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나도 새벽 2시에 택시를 타본적이 일생없다.
8시만 넘어도 안 나간다.
세상이 너무 무섭기때문이다.
뉴스만 보는데 무서운 상황은 전부 피한다.
술도 안 마시지만 밤에는 아예 안 나간다.
우리가 살아 가는 사회가 문명사회라는 게 맞는지 힘의 논리는 강하고 혼자 사는 젊은 여자는 최약체이다.
혼자 사는 집에서 배달을 시킬 때, 잠결에 문이 덜컹하는 소리를 들을 때 밤중에 택시를 타거나 어쩌다 남성과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서 서 있게 될 때 저자의 의지는 힘을 잃었다고 한다.
나도 그렇겠다.
일상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상황에서 틈틈이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웃어줘서, 만만해 보여서 호감을 거절하지 않아서처럼 피해자 쪽에 가해지는 화살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약자가 주장하는 평등이나 여성이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한 단계마다 벽에 부딪치고 있다.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쉽게 위해를 가했을 때 같이 분노해야 한다.
약자에 대한 이해, 공감대를 조금만 넓혀 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차지 않아야 한다.
그에 대해 논할 때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을 한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면 될 뿐이다.
정치에 대한 논쟁은 항상 예민하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친한 사람들과도 논쟁이 붙는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멀어지는 수밖에 없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고 그 불편함에 사랑하는 사람과 논의하며 개선하고 싶어 할 수 있다.
저자는 결혼할 때 폐백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폐백은 결혼 순서에 들어 있어서 별 생각없이 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의상 해야 것이라고 어른들이 권유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도 많다.
저자가 의문을 갖은 건 왜 친정 부모님은 제외하고 시댁 부모님만 받느냐는 것이다.
요즘은 양가 부모님을 모두 모시고 폐백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아버지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 가는 것도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보호받거나 소유되는 대상이라는 오래된 상징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의 남동생은 결혼식장에 아버지와 손을 잡고 들어 가고 신부도 아버지의 손을 잡고 4명이서 같이 들어 갔다고 한다.
저자의 얘기들은 실생활의 페미니트스적인 고민들을 많이 해결해주고 미묘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도 잘 알려준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책글자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