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 그와 함께한 50년
마틴 켐프 지음, 이상미 옮김 / 지에이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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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상 가장 천재인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한다.

저자는 50년이 넘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연구했다.

대단하다.

존경스럽구말이다.

정말 꾸준하고 지속성을 가진 저자이다.

다빈치가 죽은지 벌써 500년이 됐다.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내가 아는 얘기는 얕을 것 같다.

정말 알고 싶은 건 왜 그렇게 다빈치가 대단하고 그림이 그렇게 비싼가이다.

유럽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산업도 발전되어 있는 것 같다.

나라에 그런 사람 한 명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겠다.

다빈치의 명작을 두고 많은 논란과 각종 사건이 있나보다.

스토리가 많은 것 같다.

내가 볼 때는 그냥 그림인데 왜 그렇게 그런 논란과 가격이 그렇게 비싼지 정말 의문스럽다.

아빠의 동료 교수님이 그림을 그려줬는데 500만원짜리라고 했다.

거실에 놓기는 너무 커서 미술을 전공한 친구랑 같이 안국동에 그림을 팔러 갔는데 하얀 바탕에 네모 1개 2개가 있는데 2억, 3억이라고 했다.

 난  너무 의문스러웠다.

왜?왜?왜? 그냥 곽티슈같은 그림이 왜라는 질문만 사람들한테 계속하다가 왔다.

작가의 역량이 담겨서 그렇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 역량이 또 뭘까,,,,

그것까지는 모른다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교수님의 그림은 60만원에 팔았다.

내가 연습장에 네모 하나 그려도 될 것 같은 그 그림이 비싼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

그런데 뉴스를 보다가 우병우가 그 그림을 갖고 있다는 걸 봤다.

정말 사는 사람이 있었다.

세금을 덜 내려고 그림을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에 이 책에 관심을 가지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동성연애자라는 걸 처음 알았다.

소크라테스도 동성애자였다는 것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난 동성애는 반대한다.

기독교윤리에 안 맞으니까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서 50년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50년이 말이 쉽지 저자가 가히 존경스럽다.

이 책은 저자의 자서전도 아니고  특정한 주제만 다루고 있는  고도로 집중한 회고록이라고 한다.

예술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쟁자는 없다고 한다.

정말 그 말 자체가 대단한 것 같다.

너무나 대단해서 경쟁자가 없다는 건 인류역사상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독보적인 존재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지만 그건 쉽지 않다.

무지 어렵고 그렇게 안 되고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더 많다.

그는 20세기 이전 인물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다.

2013년 조사한 걸 보면 20세기 이전 예술가들 중  1위를 했다.

2위는 미켈란젤로가  했다.

세계사를 통들어 가장 유명한 30명 중에는 29위였는데 예수와 나폴레옹의 다음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7위였다.

우리나라는 고흐가 인기가 많은데 유럽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가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레오나르도라는 주제는 저자가 끓임없이 학문적인 몰두를 할 수 있는 영감을 준다고 한다.

몰두라는 것과 영감을 준다는게 보통일은 아니다.

그리고 동시에 상상력까지 불러 일으켜 준다고 한다.

저자의   관심은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나같으면 여러 명에게 관심을 갖고  여러 장점들을 불러 왔을 텐데 한 사람에게만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지면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같이 알게 될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독보적인 깊이, 다양성, 예술과 과학 그리고 기술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의 상상력의 범위때문에 그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고 한다.

난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빠져 들어서 기독교사상에 대한 책들을 엄청 읽었다.

그다음은 고흐, 아인쉬타인에 빠져 들었다.

지금은 아인쉬타인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었고 고흐만 나의 관심을 간헐적으로 받고 있을 뿐이다.

저저같은  위대한 한 인간에 빠져드니까 이런 책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삶과 작품은 다른 어떤 인물과도 견줄 수 없는 정도로 과격한 이론들의 수원지가 됐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다른 예술가들을 탐구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다층적이라고 한다.

저자는 그를 연구하면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여기서는 레오라고 줄여서 말하겠다.

래오는 카레리나 디 메오 리피라는 가난한 고아와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마르 빈치의 공증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난 외국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전부 잘 외울까라는 의문이 항상 든다.

너무 길기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1452년 4월의 그의 아버지는 동쪽으로 20마일 떨어진 피렌체에서 잘 나가는 경력을 쌓고 있었다.

레오는 곧바로 빈치의 할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좋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피렌체로 가서 유명한 조각가이자 금속세공인 화가, 디자이너였던 안드레아 베로키오에게 수련을 받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암튼 이름이 너무 길다.

어린 레오는 예술적 잠재력을 보였을 것이고 사생아 신분 탓에 아버지처럼 법조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금지되었을 것이다.

그는 1472년 피렌체의 성 누가 화가 조합에 가입했지만 1476년에도 그는 여전히 분주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베로키오의 공방에 속해 있었다.

같은 해 그와 다른 몇몇 사람들은 익명의 고발인으로부터 동성애를 했다는 고발을 당했는데 기소되지는 않았다.

동,,,성,,,애,,,이 책을 안 읽었다면 알았을까,,,,

그래서 책을 읽는 것 같다.




레오는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 성당 돔에 올려진 빈 구리공 제조와 설치를 포함한 베로키오 공방의 폭넓은 작업을 통해  토스카나 거장들의 해박한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곧 화가의 원근법과 해부학 지식, 민간 및 군사공학, 의례용 디자인과 다양한 재료에 대한 광범위한 기술을 갖추게 됐다.

현존하는 몇몇 1470년 소묘를 보면 그가 군사 및 수리공학, 기계 장치, 무기 설계, 기어 장치, 기하, 시간 측정에서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참고할  사람들과 책들을 적어 놓은 초기 메모도 하나 있는데 그가 과학에 대해 넓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천재이다.

그런데 그 시대는 다양한 지식에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가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무식하고 아무 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거의 본능에 따라서  사는 것 같다.

한 사람에게 모든 재능을 하나님은 몰빵하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든다.

추기 기록 중 남아 있는 것은 거이 없지만 남아 있는 자료는 그의 광범위한 호기심과 선구적인 창의성이 적어도 그의 활동 초기부터 그 씨앗이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최초의 그림 주문 기록을 보면 그가 일찍부터 전도유망했음을 알 수 있다.

1478년 그는 피렌체 공화국 정부 청사로부터 성모와 성인들의  유명한 제단화를 의뢰받았다.

레오는 표준적인 피렌체 스타일 주제에 혁신을 일으켰다.

그리스도의 강림에서 느껴지는 헌신, 명상, 당혹, 경외의 급박한 혼돈은 원근법으로 그려진  배경의 싸우는 말들, 이국적인 동물들, 그리고  무너진 건물에서 여러 가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 신비롭게 강조된다.

피렌체의 서사 회화는 이 미완성 회화에서 레오가 사용한 극적인 연출 기법으로부터 근본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레오는 1483년에는 피렌체에 있지 않았다.

밀라노의 두 형제로부터 <암굴의 성모>중안 패널을 포함한  거대하고 복잡한 제단화의 제작, 채색, 도금 임무를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자에게 보낸 예술 사절로 밀라노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가 루도비코 스포르자에게 자기 발명의 무수한 비밀들이 담긴 기나긴 추천서를 작성했다.

자신이 군사 공학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증한다는 내용이었다.

구짓서류 말미에는 자신의 예술적 성취가 그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했다.

제단화 의뢰는 예기치 않게 두 점의 그림을 탄생시켰는데 하나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고 하나는 런던에 있다.

하지만 예술가 입장에서 보면 이건 효율적이지 않다.






레오가  스포르자 궁전에서의 18년 남짓 동안 생산한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 수가 적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혁신적이라는 점에서도 놀랍다.

그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초상을  남겼고 그 중하나는 미완성이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1490년경 그린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초상화다.

공작의 십대 연인이었던 그녀는 절제와  순결의 상징인 비상하게 크고 날씬한 담비를 안고 있는데 얼굴을 돌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겉보기에 정적인 주체에게 암시적인 서사가 또다시 부여된 것이다.

레오가 스포르자 가족구성원의 정식 프로필 그림을 그린 것은 공작의 아버지 프란체스코를 찬양하는 전기에 넣을 초상화가 유일했다.

잉크와 분필로 그린 비앙카 스포르자의 초상이다.

공작이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지에 수도원의 식당을 장식할 벽화를 의뢰하여 1497년 작업 중이던 <최후의 만찬>은 이 책 첫 두 장의 주제다.

레오는 실제 크기 모형을 만들고 말의 햅학과 비례에 대해 상세하게 공부해 그처럼 거대한 조각상을 청동으로 주조하는 엄청난 작업을 하는 데 굉장한 노동을 투입했다.

정작 그처럼 막대한 비용이 드는 시도는 1499년 프랑스의 침략에 루도비코가 무너지면서 결정적인 제약을 받았다.

레오는 밀라노 시민으로서만이 아니라 군대 기술자로서 궁정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다.

그의 선구자적 발명에 대해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다.

그 증거들은 기술자들이 자기 논문을 위해 마련해 놓는 시각적 자랑의 일종이라고 보면 된다.

그가 실제로 구현한 구조물 중 가장 거대한  것은 중요한 축하 행사들을 위한 무대장치  기계다.

레오는 돔으로 된 하늘과 양 옆으로 갈라지는 산으로 된 놀랄 만한 연극적 환상을 창조해냈다.

이것들은 스케일이 크고 매우 값비싼 것들로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해야 했다.

궁정에서의 그의 창조적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사례중 하나는 스포르자 성의 커다란 구석 홀에 있던 것이다.

이 방은 사방 벽과 천장이 서로 꼬인 나무들의 복잡한 그늘과  황금 로프 마디로 장식돼 있다.

그의 급증하는 과학 지식은 궁정 환경에서 번성할 기회를 찾았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독서를 통해 스스로 공부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물 해부에서 얻은 자료를 전통적인 지식 및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인체 시신으로부터 얻은 지식과 결합한 해부학이다.
















초창기 해부학에서 그가 거둔 가장  큰 성취는 1489년 한 인간 두개골에 대한 연구로서 그는 뼈의 구조 못지않게 뇌의 기능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광학이었는데 그는 다양한 광원에서 나오는 빛과 그림자가 다양한 형태의 물체에 만들어내는 일련의 복잡한 현상들 쪽으로 관점을 확장했다.

자연 현상의 수학에 대한 그의 점증하는 관심은 정역학과 역학에 대한 공부하는 데 갈수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 노력은 나중에 그가 밀라노에서 작성한 노트에서 삽화를 그려 가며 광범위하게 연구한 수학의 이론적 부분의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관심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기하학 그 자체였다.

1500년 5월 피렌체에서 레오가 <성모자와 성 안나와 성 요셉>및 작은 크기의 그림인 <성모와 실패>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불안정했다.

새로운 기회를 찾던 그 무렵, 그는 잔인한 체사레 보르자 밑에서 9개월 동안 일하게 된다.

당시 체사레 보르자는 중북부 이탈리아를 교황 알렉산더 6세의 교황령으로 만들기 위해 광폭하게 날뛰고 있었다.

1503년 2월, 다시 피렌체로 돌아간 레오는 피렌체에서 정부에 고용되어 피사 포위 문제를 빨리 종결짓는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1503년에는 회화 작품이 우선시되기 시작했다.

레오는 성누가회의 장부에 이름이 올랐는데 피렌체 정부가 새 정부 청사에 쓸 전투 장면을 의뢰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제는 피렌체가 앙기아리에서 밀라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그는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거대한 홀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과  혁신적으로 설계한 비례에 필요한 재료와 구성요소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받았다.

1516년 그는 프랑수아 1세의 후한 후원 제안을 받고 프랑스로 옮겼다.

다빈치는 앙브와즈의 인상적인 왕궁 아래에 있는 클로 뤼세 저택에 안락하게 자리잡았고  식솔들의 수에 비례하는 엄청난 급료를 받았다.

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사들이고 있었는데 레오의 존재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었다.

1519년 봄 레오는 유언을 남겨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4월 23일 알브루아즈에서 공증된 그의 유언에는 롬바르드 출신으로 훌륭하게 교육받은 자신의 제자인 밀라노의 귀족이라고 불린 프란체스코 멜치에게 부속물인 그의 작품과 원고를 남긴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여기서는 그의 유산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하인으로 불린 교활한 살라이는 레오의 밀라노 정원의 절반을 받았다.

레오는 장례식을 신중하게 준비했다.

그는 전능하신 주님과 성자들에 대해 전통작이고 헌신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연구는 자연의 놀라운 설계에 대한 간증이다.

1519년 5월 2일 67세로 타계한 레오는  앙브와즈 생 플로랑탱에 묻혔다.

레오의 그림은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여러 학문에 빠졌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림은 고흐를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몰빵을 받은 레로나르도 다빈치의 삶에 대해서 너무 궁금했다.

그의 겉모습은  저자의 기록들로 알 수 있지만 그가 진정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그 자신과 몰빵한 대상만 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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