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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스님, 삶을 말하다
도법.김용택 지음, 이창수 사진, 정용선 정리 / 메디치미디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욕심을 내려 놓고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두 분의 웃음이 진정 아름답다.
40 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한 말과 얼굴에 삶의 흔적이 드러난다는 말이 맞나 보다.
김용택 시인은 평생을 진메마을에서 살고 있다.
아~ 그 사실이 무척 부럽다.
어렸을 때 몇 년 살았던 바닷가 어촌 마을은 아직까지도 내 꿈 속의 고향이다.
들로, 산으로 뛰다녔고 여름 한 철 내내 모래밭에 옷을 묻어놓고 수영을 했다.
스님들이 지나가면 내 옷을 파 가지고 가는 줄 알고 벌벌 떨었던 기억,
할아버지 무덤 앞에 흙과 개미를 털어내고 베어 물던 그 유가 사탕의 맛을 아직 잊지 못한다.
고모들이 짧은 바지 입고 잡아 준 고동을 할머니가 쪄 주면 싸리문의 잔가지를 뽑아다 살살
돌려 고동속을 파 먹던 그 황홀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새벽녘의 어스름하고 깨끗한 동터오름 속에서 쌀벼를 키질하던 낯익은 어른들의 모습도,
김을 만드는 사람들의 분주한 손길도, 그시절 가끔씩 찾아오던 아버지를 기다리느라
마을 이정표를 알리는 큰 돌에 기대어 해질 무렵까지, 해지고 달이 떠 오를 때 까지
한참이고 기다리던 그 마음도 아직 잊지 않았다.
비가 오면 산 위에서 부터 내려오는 빗물을 따라 철벅거리며 뛰어 다녔다.
섬진강 시인으로 한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고향을 지킨 김용택 시인...
18세에 입산, 부처와 화엄의 진리를 깨닫고 생명평화 운동을 하는 도법스님...
한 권의 책에 두 분의 삶과 철학, 자연과 생명에 대한 사랑, 공동체에 대한 생각들, 두 분의
따로 또 같이 하는 사진 속의 해맑은 모습들이 들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두 분의 나지막한 음성이 조근조근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 다른 듯 하지만 하나로 통하는 것을 볼 때, 삶의 길은 저마다의 선택으로 다르겠지만
자신이 충만해서 넘치는 에너지의 방향은 결국 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에너지와 열정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쪽으로 흘러 넘친다.

시인은 가난했고 업어서 키운 동생들 넷을 뒷바라지했다.
인생의 성공을 돈 걱정 안하고 담배 사 피우기, 마음껏 책 사는 것에 두었고 2003년 이후에야
그 목표가 이뤄졌으니 그때까지의 가난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된다.
그러나 가난한 시절, 시인의 정신은 훨훨 날았고 버릴 수 없는 순간들, 늘 현재의 주어진 시간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했다.
월급 타서 동생들 학비랑 책값 주고 전주에서 책 몇 권 사 들고 시골집으로 차 타고 오는 길이
가장 보람차고 행복했다고 한다.

시인에게 가장 큰 복은 어머니랑 평생을 산 것이라고 한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농사를 지으며살아 온 어머니의 존재는 시인에게 진메마을과
함께 문학적인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가을무를 잘라서 구덩이를 파고 땅 속에 묻는데 그 깊은 땅 속의 캄캄한 곳에서도
무순이 자란다고 한다.
시인에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문학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희망의
씨앗이었을 것이다.
진메마을, 어머니, 가난, 낙천적이고 섬세한 성품, 엄청난 양의 독서, 샘솟는 지적욕구와 호기심,
아이들과 함께 한 교직생활 등등. 그의 문학적 영감과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필연적인 것 같다.
그는 산중의 작은 방에서 많은 책을 읽으며 사람들의 살아 가는 모습과 자연, 그리고 자신에
대해 알게 되고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얻는다.
대화하듯 쉽게 써 내려간 시인의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생각이, 표현이,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시인보다 더 시인같은 그의 어머니...
베어낸 나무 밑동과 그 옆의 살아 있는 나무에 새끼줄을 매어 '목숨을 건네 주고' 마당에 뜨거운
물을 뿌릴 때에 뜨거운 물이 땅속 벌레들의 눈에 닿아 눈이 멀까 봐 "눈 감아라, 눈 감아라."
시인은 부자이고 복이 많은 사람이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사랑, 농사짓는 사람들의 삶, 세상을 늘 새롭게 보는 아이같은 마음을 가졌으니.
새롭게 안 사실이다.
돼지 오줌보로 공을 만들 수 있다.
지렁이는 풀잎 이슬이 반짝이는 초가을 어스름한 달밤에 '애두르르르, 애 두르르르' 하고 운다.
지금이 초가을이니 진메마을에서는 지렁이가 울고 있겠다.

스님은 부처의 삶에서 시작하고 부처의 삶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부처의 깨달음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작게는 티끌 하나에서 우리 자신, 나무, 돌, 천체에
이르는 모든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연기의 진리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와
화엄의 정신(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다 똑같아서 어떤 차별도 없다)에 몰입하면서 영원의 의미,
삶의 가치, 적극적인 현실인식을 가지게 된다.
최고급 승용차를 타는 원로스님을 보며 한국 불교의 신음소리를 들었던 스님은 조계종을 개혁하고
이 과정에서 소림활극이 되어 버린 종단의 폭력사태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는다.
간디의 비폭력 평화 정신을 기반으로 해인사의 청동대불 사건 (해인사에서 세계 최대 43미터의
좌불을 자운스님과 성철스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짓는다고 한 일)을 반대하기 위한 단식투쟁으로
공사 중지를 이끌어낸다.

지리산 위령제와 천일기도를 끝낸 스님은 5년 간의 생명평화 순례를 떠난다.
길에서 8 만 명의 사람을 만나고, 길에서 그들에게 묻고, 길에서 배웠다.
내면의 소리와 세상 생명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짐을 벗어 버리기 위해.길을 걷고 난 후
단순소박한 삶, 아름다운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있어야 한다는
해답을 얻는다.

시인과 스님은 오늘날의 세상이 문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온갖 편리를 누리지만 여전히 인간에게
양극화문제, 자연생태 문제, 인간소외 문제가 남으며 이의 해결을 위해 대안을 내놓는다.
마을 공동체, 신뢰와 애정이 바탕이 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을 공동체가 그것이다.
외국의 공동체의 사례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작은 마을들의 아름다운 삶의 형식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찾아 살리고 연구하자는 결론에 이른다.
진메마을에 가고 싶다.
물안개 자욱한 강변을 보며 "그것 참, 좋다!"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