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
김민철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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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세기 서양에서 민주정이 어떻게 논의되었고, 왜 그렇게 두려워했으며,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 개념이 나오게 되었는지 알차게 이해할 수 있는 꽤 유용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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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서구에서는 비서구 전통의 낯선 신들, 다른 민족의 신들을 그리스도교의 악마, 괴물로 만들곤 했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여행하다가 기괴한 형체를 맞닥뜨린 서구인들의 이야기는 적어도 13세기 말에서 14세기, 마르코 폴로와 포르데노네의 오도리코와 존 맨더빌까지 거슬러 간다. 이들은 일종의 판타지를 저술했고, 15세기 초에 나온 <세계의 불가사의>Livre des merveilles를 비롯해 삽화가 있는 여러 책에 그들의 글이 실렸다. 이 책들은 시각적 어휘의 상당 부분을 계시록으로부터 가져왔다. 예를 들어 마르코 폴로가 중국 카라잔 지방에서 보았다는 거대하고 게걸스러운 용은 커다란 날개를 가졌고 꼬리 끝에는 뱀 머리가 달렸다고 하는데, 이는 계시록 12장의 커다란 날개를 가진 용과 계시록 9장의 뱀 꼬리 달린 사자 얼굴 말에서 착안해 꿰어맞춘 것으로 보인다.

(...)

자신에게 친숙한 종말론적 심상을 낯선 종교의 심상과 관행에 투사하는 행위는 식민지 담론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호미 K. 바바가 지적하듯 이러한 투사는 어떤 문화적 타자를 "'타자'인 동시에 전적으로 가시적이고 인식 가능한 사회적 현실"로 만든다. 동일성과 차이, 끌림과 혐오라는 양면의 유희가 수반되는 이 역학을 통해 우리는 친숙한 악마의 심상을 낯선 종교 문화에 투사하고 다른 사람들이 예배하는 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독특하고 단순화될 수 없는 차이를 단순화시켜 우리의 의미 체계 안에 집어넣는다. 유럽 그리스도교인들이 새로운 세계에서 마주한 다른 종교를 계시록의 괴물 신을 가지고 해석하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친숙한 타자성'을 지닌 심상을 만들어냈고, 동양 종교에 씌운 저 심상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했다.

<계시록과 만나다>, pp. 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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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이 야마무로 신이치의 <만주국, 키메라의 초상>인데

국내에는 소명출판에서 2009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어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소명출판은 절판도서라도 주문을 넣으면 소량제작으로 판매하여 저는 그렇게 구매했습니다.

2주쯤 전에 저 책을 중고로 내다팔았는데 이렇게 다시 복간되니 다시 사라는 시그널인가 싶네요.


표지갈이만 한 거 아니냐 싶지만 출판사 서평을 보니 일부 번역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그 책을 산 분한테는 약간 미안해지네요)


만주국을 단순히 일본의 꼭두각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동군,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만주인 등 여러 집단이 만주국 건설에 참여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족협화 등의 이념이 어떻게 작동했고 각 집단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등 만주국의 역사를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역작입니다.


구 번역본에서 일부 내용 발췌

"이시하라가 만주국에 부임한 1937년에는 이미 만주국은 건국에 가담한 사람들의 손에서 훨씬 멀어져 능리형 군인, 행정 테크노크라트, 특수회사 경영자라는 철의 삼각추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체제를 상징하는 것이 '2키 3스케'라 불린 호시노 나오키, 도조 히데키, 기시 노부스케, 아유카와 요시스케, 마쓰오카 요스케이다." (242~243)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한 반발과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만주국 건국 이념에도 불구하고 만주국 통치의 정당성 근거는 결국 서양 근대가 낳은 법에 의한 지배에서 구해졌고, 그것이 또한 만주국의 문명화이자 근대국가로서의 표징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즉 '문명을 보급시키는 사명(mission civilisatrice)'이 지배의 정당화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본도 또한 자신이 비판한 바로 그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244~245)


"일본과 만주국은 마치 마주보고 있는 거울상처럼 일본은 만주국의 상 속으로 만주국은 일본의 상 속으로 각각을 투영시켜 무한의 상을 겹쳐간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자기이고 그 모든 것이 타자인 것처럼 진위를 가리기 힘들게 되어 간다. 그렇게 하여 일본도 만주국에서 반사되는 빛에 의해 자신의 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만주국이라는 한쪽 거울 면이 파괴되어 사라짐으로써 일본도 또한 본래의 자기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기왕에 더 추천해보는 만주국 관련 도서


프라센지트 두아라, <주권과 순수성>


래너 미터, <The Manchurian Myth>


한석정, <만주 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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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번역본을 구매하면 기존에 산 책에 있는 필기를 옮겨놓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요한 부분의 번역을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최근 구입한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봐보자.


- 정치의 정의

오늘날에는 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 이 점, 즉 '영토'는 현대국가의 특성 중의 하나입니다 -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는 곧 국가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오늘날 국가는 강제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요약컨대, '정치'란 국가들 사이에서든, 한 국가 내 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에 참여하려는 노력 또는 권력배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노력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전성우 역, 나남, 29p


오늘날의 국가는 일정한 지역 내에서 - 이것, 즉 "지역"은 오늘날의 국가를 규정짓은 특징 중의 하나이빈다 -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을 요구하는 (그리고 이 요구를 성공적으로 관철하는 인간 공동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국가는 폭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됩니다.

요컨대, 우리에게 '정치'란 국가들 사이에서든, 한 국가 내의 인간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의 일정한 지분을 차지하려는 노력이나 또는 권력배분에 영향을 끼치려는 노력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과학/직업으로서의 정치>, 김덕영 역, 길, 93p

 

- 근대국가

근대국가는 공적 법인체의 성격을 띤 지배조직입니다. 이 지배조직은, 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독점하는 데 성공한 지배조직입니다. 근대국가는 이러한 독점을 위해 모든 물적 운영수단을 국가 운영자의 수중에 통합시켰고, 과거에 이 물적 운영수단에 대해 독자적 처분권을 가졌던 모든 자립적 지배층의 권한을 박탈하고 그들의 자리에 국가 자신을 그 정점으로 정립하였습니다.

전성우 역, 42p


근대국가는 기관적 지배단체로서 일정한 지역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독점하려고 노력했으며 또한 독점하는 데 성공했고, 이러한 독점을 위해 한편으로 모든 물적 경영수단을 그 지도자의 수중에 집중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과거에 독자적인 권한을 갖고 이 물적 경영수단을 통제했던 모든 자주적인 신분적 기능 담지자로부터 그 경영수단을 몰수하고 그들의 자리를 장악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국가의 정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김덕영 역, 104p

 

 

전성우 역과 김덕영 모두 전체적으로 크게 차이나는 부분은 없다.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성서나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같은 작품들과 달리, 막스 베버의 책은 번역자에 따라서 용어 선택 등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어도 느낌 자체가 달라질 일은 거의 없다. 전성우 역이 상대적으로 원문의 긴 문장을 보다 짧게 끊거나 원문에 없는 문장도 넣는 등 가독성을 염두에 둔 번역을 하였고, 김덕영 역은 원문에 더 충실하다. 두 번째 인용구만 봐도, 전성우 역이 3문장으로 번역되었는데, 김덕영 역은 한 문장으로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 이런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 결정적인 차이는 없고 둘 다 좋은 번역이다. 단, 주해나 해제는 압도적으로 김덕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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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좀비물일까? 좀비물을 촬영하다가 진짜 좀비가 나와서 현장은 엉망이 되고 생존자들끼리마저 서로 죽고 죽이는 데스게임이 펼쳐진다는 플롯 자체는 이상할 게 없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허접한 연기와 연출이다. 분명 익숙한 좀비물을 보는데도 이후 전개를 예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37분만에 엔딩크레딧과 '컷!' 소리 때문에 당혹감은 배가 된다. 도대체 이 정체불명의 영화는 무엇일까?


의문은 약 40분의 당혹스러운 무언가가 끝나면서 풀린다. 무려 영화의 1/3 이상을 지나서야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삼류 감독 히구라시에게 방송국에서 좀비물 제작 요청이 들어오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그는 타이트한 스케쥴, 배우의 갑질 등 온갖 난관을 뚫고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 초반 시퀀스는 바로 그 좀비물 영상의 제작기였던 것이다. 이 듣도보도 못한 영화가 선사하는 신기한 영화적 체험을 최대한 온전히 향유하려면 이 정도 줄거리 정보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초반 시퀀스에서 의아했던 요소들이 후반부에서 모두 풀리면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때부터는 감독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면서 이미 본 똑같은 상황인데도 처음본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감상하게 된다. 영화는커녕 예능을 보고도 크게 웃은 적이 거의 없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거미집>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거미집>이 김열이라는 한 예술가의 창작욕에 집중하는 영화라면,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한 편의 극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흘려야 하는 땀과 눈물, 애환(그리고 웃음)이 담겨 있다. 참 멀고도 긴 촬영을 끝내고 극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감독과 배우들, 스태프의 짓는 홀가분한 얼굴에서 웬만한 감성영화 못지않은 감동이 벅차올랐다. 이 영화에는 대스타도 없고 유명 감독도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은 집에서는 아내와 딸에게 무시당하는 소시민적 인물에, 감독으로서도 변변찮다. 배우들도 재연배우거나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 뿐이다.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30분짜리 단편이지만, 대부분의 인물이 처음 해보는 장르에 처음 해보는 모험이었다. 당연히 뜻대로 안 되고 돌발상황이 속출한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위기상황을 히구라시를 비롯한 소시민, 아마추어가 하나하나 해결하여 결국 한 편의 작품을 만드는 그 과정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세계평화를 지키는 특수요원이나 슈퍼히어로보다 30분짜리 단편을 완성하려는 그 노력에 더 손에 땀을 쥐며 보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카메라를 멈추지마'라는 영화 제목에서는 아마추어의 열정과 꿈이 느껴진다. 열악한 환경에서 카메라를 멈추지 않겠다는 일념만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모습이 영화 막바지의 정서적 파장을 깊게 해준다. 한마디로, 긴장감과 웃음과 감동이 억지스럽지 않게 한 작품 안에 모두 담겨 있으며, 좀비물이라는 단물 다 빠진 소재를 차용하면서도 이리도 참신하게 극을 이끌어간 능력에 혀를 내두른다. 저예산 B급 영화 특유의 감성 말고는 난 이 영화에서 별로였던 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어설픔은 이 영화의 단점이 될 수 없다. 그 어설픔이야말로 영화의 매력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어설프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영화. 그게 이 영화의 최대 매력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면 모든 게, 특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아마추어들의 '어설픔'마저도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웃으면서 끝나는 좀비물이라는 것이 가장 좋았다.(개인적으로 좀비물은 그닥 즐기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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