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이 민주주의 안에서 산다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주 다른 어떤것이다. 우리 자신의 국가가 그리고 우리 삶을 조직화하는 아주 강한 힘을 가진 통치가 그 정당성을 우리에게서 끌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 각각이 계속 그렇게 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적당한 기회를 우리가 갖고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국가나 우리 삶을 조직화하는 강한 통치는 그 정당성을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로부터 끌어낸다. 모든 성인 시민이 자유롭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투표할 수 있고, 그들의 투표는 최소한 상당히 동등한 무게를 가지며, 어떤 정치적 견해는 불법화되지 않은 것이라면 자유롭게 득표 경쟁을 할수 있는 그런 선거로부터 말이다. 근대 대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라는 관념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동안 그것은 역사의 가망 없는 패자들 가운데 하나에서 역사의 보다 끈질긴 승자들 가운데 하나로 바뀌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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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티 Rome City - The Illustrated Story of Rome
이상록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저자가 15년간 홀로 공부하고 로마를 구경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좋은 대중교양서. 고대 로마에서 동로마제국, 르네상스 로마, 근대 로마의 역사와 건축, 문화, 예술을 볼 수 있다. 15년간 다져진 내공이 빛나고 저자가 손으로 그린 일러스트들 덕분에 눈도 즐거워지는 책이다. 쉽고 탄탄하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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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06-11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훌륭한 책은 15년 간 쓴 책이라고 한 말이 기억됩니다. 왜 10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닌지 여전히 궁금하지만, 15년 간 쓴 책에 실망한 적 없는 걸 보면 그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

Redman 2023-06-12 00:16   좋아요 0 | URL
정말 왜 15년일까요 ㅋㅋ 이 책도 읽고 후회하지 않았으니 15년법칙에 들아맞네요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이자 영화에 대한 영화인 <파벨만스>를 보고 '감독은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마틴 스코세이지의 <휴고>, 데이미언 셔젤의 <바빌론> 등등. 비간의 <지구 최후의 밤>도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감독인데, 이 영화를 보고 받은 감동은 위 거장들의 작품을 봤을 때와 유사했다. <지구 최후의 밤>은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꿈을 꾸는 듯한 감동을 준다.

이 2시간 짜리 영화는 1시간 10분까지는 완치원이라는 여인을 찾아나서는 뤄홍우의 이야기고, 후반 1시간은 뤄홍우이 영화관에 들어간 뒤 펼쳐지는 꿈 혹은 영화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편의상 이를 1부와 2부로 부르겠다. 1부에서는 뤄홍우의 현재 이야기와 과거 완치원과의 파편적인 기억이 교차되어 나온다. 2부가 '영화'를 상징한다면, 1부의 이야기는 '기억'으로 집약할 수 있다. 영화와 기억을 중요 키워드로 삼는다면, 1부에서 매우 중요한 대사가 두 개 있다. 플래쉬백 장면에서 이런 뤄홍우의 독백이 나온다. "영화는 거짓말이야.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가짜 세계. 하지만 기억은 진실과 거짓인 섞인 채 수시로 눈 앞에 떠오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독백에 묘사된 영화와 기억의 성격이 완치원과 카이젠(둘 다 탕웨이가 연기함)의 특징, 그리고 1부와 2부의 분위기와 형식과 정확히 상응한다는 것이다.

먼저 두 여성 캐릭터에 대해서 살펴보자. 완치원은 1부, 카이젠은 2부에서 뤄홍우가 만나는 여인들이다. 완치원은 오로지 뤄홍우의 단편적인 회상에서만 등장한다. 그렇다면 완치원은 기억 속의 여인, 기억의 여인이다. 완치원의 전남편이 그에 대해 하는 말은 정확히 기억의 성격과 조응한다. "그녀는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므로 뤄홍우와의 사이에서도 완치원은 진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아름다웠던 기억은 뤄홍우만의 거짓이 교묘하게 혼합된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카이젠은 영화의 여인이다. 우선 뤄홍우가 카이젠을 만난 것은 영화관에서 꿈 혹은 영화 속이다.그러니 카이젠은 실제 속 여인이 아니다. 완치원과 똑같이 생겼으나, 완치원은 아니다.

형식적 측면을 보면, 1부는 '기억'처럼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그리고 어디가 현재이고 과거인지 주의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처음보면 자칫 지루할 수도 있고 몽롱하다. 반대로 2부는 약 1시간 가량이 하나의 쇼트(처럼 보이도록)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찍은 이유를 두 가지 추측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기억의 특징이다. 1부와는 달리 생생하고 또렷하다. 1부는 마치 인간의 기억 그 자체를 영화화했다는 인상을 준다. 대개 영화의 플래쉬백은 마치 과거에 찍어둔 영상마냥 연속적이며 선명하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개 사람의 기억은 단편적이고 불연속적이다. 심지어는 바로 몇 초 전 일도 왜곡해서 기억할 정도로 기억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떠올릴 때는 나도 왜인지 모르게 과거의 순간이 불현듯 떠오르는 경우도 있다. 영화의 1부는 그러한 기억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하여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불쑥 끼어드는 쇼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고려하면, 기억과 대비되는 꿈, 그리고 꿈을 표현한 2부가 선명한 이유가 이해가 된다. 꿈도 지나고나면 불확실해지기는 매한가지지만, 적어도 꿈을 꾸는 동안에는 선명하다. 감독은 파편적이고, 거짓이 진실과 섞어 있고, 불연속적인 기억과 대비되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오로지 거짓으로 구성된 꿈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두 번째는 꿈과 영화의 공통점이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여기서는 <영화당>에서 한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을 많이 참조했다) 꿈과 영화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억의 세계는 거짓에 진실이 섞여 있기에 과거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과거에 잃어버린 것,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것, 과거에 불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은 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 뤄홍우의 아버지가 그러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도망간 아내를 잊지 못하고, 아내의 사진을 고장난 시계에 넣어두고는 평생 슬픔에 잠긴 채 살다가 죽었다. '고장난 시계'라는 소품 자체가 그가 과거에 멈춘 시간에만 살아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사진을 단서로, 4살 때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어머니와 닮은 과거의 연인 완치원을 추적하면서 계속 그를 떠오리는 뤄홍우 역시 과거에 매달리는 인물임을 추측할 수 있다.

반면 꿈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2부에서 뤄홍우와 시간을 보내고 얘기를 나누는 인물들은 모두 1부 시점에선 뤄홍우가 만날 수 없었던, 혹은 만나지도 못했던 인물들이다. 카이젠은 현재 만날 수 없는 연인 완치원을, 처음에 등장해 같이 탁구를 치는 꼬마는 뤄홍우의 아들 혹은 죽은 친구 백묘를, 중간에 다른 남자와 도망치려는 늙은 여성은 뤄홍우의 어머니를 변주한 인물들이다. 그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니 기억에도 없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꿈이자 영화이다. 가짜로만 이루어져 있는 이 공간은, 가짜이기에 만난 적도 없는 이들을 만나게 해주어 과거의 응어리를 풀어준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의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운 환상들을 보여준다. 뤄홍우는 카이젠과 함께 하늘을 날며, 어느 주문을 외워서 방을 회전시킨다. 더욱이 아주 찰나의 순간만 타오르는 '폭죽'을 영원토록 터뜨리게도 한다.

폭죽은 카이젠이 축제 노점에서 산 물건으로, 싸구려에 1분밖에 타지 않는다. 카이젠은 이 폭죽을 뤄홍우에게 선물해준다. 뤄홍우는 꿈 속 어머니로부터 받은 '고장난 시계'를 카이젠에게 선물해준다. 폭죽과 시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두 인물의 대사에 따르면, 폭죽과 시계는 순간과 영원을 의미한다. 1분 동안만 터진다는 폭죽을 키고 카이젠은 뤄홍우를 데리고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이동한다. 뤄홍우는 방을 회전하고 그다지 밝지 않은 달빛 아래서 둘은 키스를 나눈다. 그동안 8분의 시간이 지났는데, 놀랍게도 그 폭죽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원쇼트 구성 때문에 8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더 실감나게 느껴져 이 '마법'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만날 수 없는 이들과의 만남, 비행, 회전하는 방, 꺼지지 않는 폭죽. 이런 것들은 영화가 '가짜들'로써 부리는 매력적인 마법들이다. 특히 꺼지지 않는 폭죽에서 드러나듯이, 영화는 순간을 영원으로, 또 영원을 순간으로 만든다. 아주 찰나의 프레임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다시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영화가 영원하다는 것이 아니다(<바빌론>에서는 이와 비슷한 의미의 대사가 나오기는 한다). 비간이 말하는 영화의 영원은 영화 속에서의 영원이다. 고장난 시계와 싸구려 폭죽처럼, 영화는 거짓이고 한계가 뚜렷하고 찰나의 예술이지만, 찰나의 시간 안에서 영원을, 놀라운 기적을 만든다.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에서 '종말'이 딱 두 번 언급된다. 첫 번째로 뤄홍우가 완취원을 위로하면서, 그리고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하기 직전 '지구 최후의 밤'이라는 타이틀 화면으로 두 번째 등장한다. 1부에서 뤄홍우는 말한다. "사람들은 1999년이 지나면 종말이 올 거라고 했지. 하지만 지금은 2000년이고 우린 여전히 엿같은 삶을 살고 있어."

이 말을 둘의 관계에 대입해보자. 뤄홍우와 완취원의 사랑은 위태롭다. 뤄홍우는 그 위기를 극복하고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완취원을 위로한다. 하지만 그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약속은 꿈 속에서, 영화 속에서 다른 형태로 이루어진다. 카이젠과의 사랑은 영화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사랑이고 한시적이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서만큼 진실한 이 사랑을, 영화는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마법이다.

<파벨만스>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영화는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마법의 공간이야."(정확한 대사가 아닐 수는 있다) 스필버그도 느꼈던, 그리고 비간 감독이 말하는, 그런 거짓으로 무엇이든 가능하게 해주는 영화의 마법은 너무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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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 민중반란> '저자 후기'에서 조경달은 자신이 어째서 동학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얘기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조선인의 피를 타고났음에도 일본에서 태어나야만 했던가. 생각해보면 이것은 나의 소년기부터의 의문이었으며, 나를 조선에 대한 연구로 이끈 원초적이고 소박한 문제의식이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주제가 바로 갑오농민전쟁이었다."

이것은 저자가 왜 동학농민운동을 연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이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저자가 살아간 생활공간인 일본은 저자의 문제의식과 관심사를 규정하였다. 이것에 대한 고민에서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단과 민중반란>이라는 책까지 쓰게 되었다.

강유원의 서평집 <주제>는,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의식과 주제에 따라 장을 나눠, 해당 주제의 책에 대한 서평을 실었다. 그 주제들이란 "책과 교양" "역사" "근대" "파시즘" "전쟁" "한국과 동아시아"이다. 왜 이 주제들을 선택했는가. <주제> 서문을 옮겨보겠다. "궁극적으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이는 손에 책을 쥐는 순간이면 항상 답해야 할 물음이다. '책과 교양'에 담긴 게 그것이다. '역사'와 '근대'는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원리를 책에서 깨우쳐 보려는 시도이다. 근대의 가장 두드러지고 절망적인 모습은 '파시즘'과 '전쟁'이다. 나는 독재자 박정희의 유사-파시스트 권위주의 시대에 유아기와 청소년 시절을, 살인자 전두환 정권 시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파시즘은 그침 없이 찾아야 하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한국과 동아시아'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관심의 소산이다. 그곳을 떠나면 나의 책읽기와 글쓰기는 무의미할 것이다."

강유원의 문제의식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조경달처럼 그가 살아왔던 시대와 공간에서이다. 근대 이후 한국, 더 넓게는 동아시아에서 태어나 박정희와 전두환 시기를 살아왔다는 겪음이 그의 관심사를 일차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조경달은 근현대 한국사를 공부하였고, 강유원은 서양철학과 사상사를 공부하였다. 둘의 공부 영역은 다르지만, 왜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은 비슷하다. 그들에게 공부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바탕으로 나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보면, 둘의 전공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 둘의 공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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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17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마지막에 나온 공부의 정의를 아침에 보니까 책 읽고 글 쓰는 의욕이 생겨요. 이제 출근해야 해서 당장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ㅋㅋㅋㅋ 공부의 정의를 간직하면서 책 읽고 글 쓸 수 있는 저녁을 기다려야겠어요.

Redman 2023-05-17 09: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열심히 공부하게 되는 하루 되십쇼 cyrus님!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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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인터넷에 연재한 서평문을 엮은 서평집이다. 이 책의 다소 난삽한 서문을 통해 책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책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보자. 정희진에게 책이란 "정치적으로 치열"하고 "자기 내부의 모순까지 껴안는 명확한 당파성의 소유자"이다. 한마디로, 책이란 명확한 정치적 입장연관성을 갖는다. 이러한 책에 대한 정의는 저자가 책을 고르는 기준과 저자의 독서 방법을 짐작하게 한다. 저자는 책을 고를 때 "관점"을 중요시하고, 그중에서도 "'주류'의 관점 밖에서 쓰인,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는다. 그런 책은 "지적 자극"을 안겨다주어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주류'란, "서울 출신, 남성, 서양, 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건강한 사람, '학벌 좋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대체 어느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가 하면, 정확하게 규정한 부분이 없어 알기 어렵다.(일단 이대 출신이므로 '학벌 좋은 사람'에 포함되기는 한다) 한국 사회의 주류를 벗어난 관점이라고 보면 좋을까? 이런 규정이 없다는 사실은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상은 '어떤 책을 읽은 것인가'라는 교양 쌓기의 수단으로서의 공부의 기본적인 주제이다. 저자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서문에 이어지는 "좁은 편력"에 따르면, "책을 읽은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습득이고, 하나는 지도 그리기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책의 내용을 익히고 내용을 이해해서 필자의 주장을 취하는 것이다. 별로 효율적이지 않다. 후자는 책 내용을 익히는 데 초점이 있기보다는 읽고 있는 내용을 기존의 자기 지식에 배치하는 것이다." 저자는 "객관적, 일방적, 수동적"인 습득보다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인 지도 그리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입장연관성을 가지는 책을 읽을 때 독자도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책의 위상과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여 나의 입장과 저자의 입장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독서할 때 중요하다. 이때 주의할 것은 책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느 책이든 한계가 있음을 인지할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독서론을 이렇게 길게 정리한 내 서평은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습득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자는, '지도 그리기'가 가능하려면 먼저 '습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독서는 먼저 최대한 객관적으로, 저자의 언어를 통해 저자의 입장에서 책 내용을 요약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저자가 "자기만의 프레임"을 갖게 된 것도 그 이전에 쌓였던 공부와 독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쌓고 유기적으로 지식 체계를 형성해 나가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도만 그려서는 안 된다. 저자는 독서가 한 권의 책이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습득이 없으면 책은 통과만 하고 나갈 수 있다. 저자는 책 내용 요약을 불필요하다고 보지만, 그런 요약에 사유를 발달시키는 힘이 있다.

여기서 하나만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에 수록된 저자의 서평을 다 읽지는 않았고, 내가 읽어보았거나 관심 가는 책의 서평만 읽었다.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홉스의 <리바이어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니체 <선악을 넘어서>, <신약성서>, <극단의 시대>, <님의 침묵>, <이상 문학 전집>, <거짓의 사람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등등. 저자의 주 분야인 여성학과 문학 서평에서는 군데군데 인상적인 통찰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분야, 특히 고전 서평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개념과 용어를 엄밀하게 규정하고 최신의 논의를 수용하여 자신의 공부를 진척시키는 독서가가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최신의 논의가 무조건 낫다는 속물적 연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구가 계속되면서 이전의 논의와 이해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고전 번역과 관련해서도 더 나은 번역본이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읽어야 한다. 홉스 <리바이어던>을 읽고 무엇인가 진지하게 말하려면 최소한 진석용 역을 읽어야 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무엇인가를 논의하려면 박상섭 역이나 곽차섭 역, 강정인/김경희 역이 기본이다. 저자는 1990년에 나온 중역본을 인용하며, 니체의 <선악의 저편>도 박찬국 역이나 김정현 역이 아니라 1983년에 출간된 중역본을 읽는다. 저자의 공부가 어디서 멈추었는지, 저자가 사상가들, 나아가 지식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치졸하게 번역본으로만 뭐라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논의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문장이 많았다. 가령, 홉스 <리바이어던> 사족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대영제국의 지식인 홉스에게 '식민지는 국가의 번식으로서 국가가 출산한 자녀'였다." '식민지'와의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 '제국'을 거론한 듯한데, 홉스 당시의 잉글랜드는 '대영제국'이라 하기도 어렵거니와 홉스의 정치철학이 '제국'이라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깊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의문이다. 홉스를 읽었지만, 홉스를 역사적으로 맥락화하여 이해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서평에서는 "마키아벨리는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유토피아를 꿈꾸던 청렴한 지식인이었다"라고 쓴다. 마키아벨리가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다는 서술은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마키아벨리가 청렴한지는 그 자신과 신만이 아실테고, 진짜 문제는 그가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는 서술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유토피아론이 있던가? 그가 <군주론>, <로마사논고>, <피렌체사> 어디에서든 이상적인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한 적이 있던가? 회페의 <정치철학사>나 셸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 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를 읽어도 처음 듣는 이야기이고, 그의 저술을 훑어라도 본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유토피아적인 논의는 발견하기 어려움을 알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평가에 어떠한 문헌적 근거를 댈 수 있을까?

그리고 저자는 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요약하여 한국에 적용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다룬 글에서 정희진은 이렇게 쓴다. "벤야민은 탈식민을 외치고 있다." 이는 벤야민이 한 말이 아니라, 슈미트의 독재정론을 숭모하여 모조한 '비상사태 테제'를 저자가 확장하여 얘기한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의 '비상사태론'으로 한국 정당들의 '비상'대책위원회를 비판하는 것은 벤야민 논의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여 적용했다기보다는 벤야민을 외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습득을 등한시한 지도 그리기의 폐해다. 이 글들을 읽으면서 이미 심드렁해진 나는 목차를 펴보고 관심 가는 책 제목을 따라 아무 글이나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님의 침묵> 서평에서 "모든 예술은 남겨진 자의 고통에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그마저도 대충 읽게 되었다. 이런 책임 없는 문장은 저자에 대한 신뢰도만 깎을 뿐이다.

인터넷에 연재된 짧은 글에 너무 많은 것을 지적하는 듯 싶지만, 잡글과 논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람의 글에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정리해보자. 정희진은 신뢰할 만한 지식을 주는 사람인가? 아니다. 여성학이라면 몰라도 다른 분야에서 정희진은 체계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교양 독자다. 정희진의 독서방법은 지식에서 지식으로,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유기적 공부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다. 정희진의 방법을 따를시 문헌적 근거 없는 자의적 해석과 적용의 덩어리만 남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독서 방법은 학문적 공부는 물론이요 교양 쌓기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내가책을 더이상 읽거나 참조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책의 제목은 '정희진처럼 읽기'이나 이 책은 정희진처럼 읽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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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15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험상 한 번이 아닌 ‘두 번 이상 책이 내 몸과 머리를 통과할 때’ 전보다 책이 새롭게 보였어요. 그리고 이전에 책을 읽으면서 생긴 오독과 편견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

Redman 2023-05-15 09:39   좋아요 3 | URL
저는 어떤 책에 대한 서평을 보고 평가가 바뀌기도 합니다. 중요한 줄 몰랐던 책이 매우 중요하단 것, 반대로 좋았던 책이 별 거 없는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2023-05-15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15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mandante 2023-05-2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있는 이 책에 대한 글 중 유일하게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Redman 2023-05-27 20:02   좋아요 0 | URL
어우 과찬이십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