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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정치는 인간 개개인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정치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모두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고유의 개별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개인이다. 이러한 고유의 정체성이야말로 정치에서 인간이 중요한 존재라고 전제하는 이유이다. 이 개인은 서양 근대 철학에서 주장하는 추상 속의 무연고적 자아가 아니다. 그들은 피와 살을 지니고 이름을 가지며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 존재하는 개인이다. 정치란 개개인에게 그들의 정체성과 이름을 찾아주는 행위이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관심은 공적인 삶, 정치적 삶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정치적 삶과 문학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생긴다. "문학은 구체적 시공간 속에 살고 이름을 가진 캐릭터의 이야기를 펼친다. 과학은 이름을 무시하거나 추방하는 한편, 문학은 그 이름들을 사용하고 존중한다." (Harvey Mansfield, "How To Understand Politics") 마사 누스바움이 <시적 정의>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것도 문학, 특히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 좋게 만드는 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의 책은 정치에서 아주 중요한 함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저명한 정치철학자이기도 하면서 문예비평에서도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녀는 시카고 대학 로스쿨에서 법학과 학생들과 "소포클레스, 플라톤, 세네카, 디킨스를 읽었다. 문학 작품들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우리는 동정과 자비, 공적 판단에서 감정의 역할, 그리고 나와 다른 타인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는 데 필요한 것 등에 대해 토론했다."
누스바움이 이렇게 법학도와 정치학도들에게 문학을 옹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태도의 필수적인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학을 읽음으로써 타인의 삶에 대해 상상하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현실에서도 이러한 공감을 적용할 수 있다. 좋은 문학을 통해 마주하는 타인은 우리에게 격렬한 감정(Thymos)을 불러 일으키고, 불안을 야기하고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저자는 문학 장르 중에서도 소설을 강조한다. 소설의 서사와 묘사는 다른 문학과 비교할 때 매우 구체적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나와 같이 신체를 지니며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보다 보편적으로, 문학은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다. 또한 우리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 인물의 처지를 생생하게 상상 가능하다. 이러한 상상력과 공감 능력이야말로 현실의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고 그들과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저자는 문학읽기를 통해 우리가 적절한 감정을 함양할 수 있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감정은 공적인 영역에서 추방되어야 할 불안정한 인지 능력이 아니다. 감정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분명한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 감정은 특정한 믿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만약 내가 분노를 느꼈다면, 그것은 무언가 소중하고 가치있는 사람이 고의로 해를 입었다는 믿음에서 기인하며, 분노의 대상은 그 해를 입힌 대상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감정은 주체로 하여금 특정 종류의 의미나 가치를 지각할 수 있게 한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같이 분노하고 같이 슬퍼하는 능력)은 정치적 삶에서 우리의 판단을 더욱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맹목적으로 문학과 감정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누스바움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빌린 개념인 "분별 있는 관찰자"로 이를 설명한다. 분별 있는 관찰자는 우리의 감정을 보다 합리적으로 해줄 것이다. 이는 사건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아 편향적이지 않으면서도 특정 상황에 처한 사람들 각각의 처지와 느낌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역지사지의 감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적절한 감정의 함양은 시민적 삶에 매우 중요하다. 반대로 감정의 부재는 사회적 무관심과 둔감함으로 이어진다. 이런 장면은 숱하게 볼 수 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소설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문학과 소설보다는 비문학을 더 선호한다. 나 역시 디킨스나 박완서보다는 애덤 스미스나 앨버트 허쉬먼 같은 이들의 책이 훨씬 더 사회정의에 어울린다는 편견을 가진 독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나의 편견일 뿐이었다. 사회적 인간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공동체와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게 할 수 있을까? 마사 누스바움은 문학에서 그 답을 길어올리고 있다. 문학은 구체적 상황 속에 있는 개개인의 얼굴을 마주보게 한다. 사회적 삶 역시 얼굴과 이름을 가진 개개인을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