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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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두 가지의 기쁨을 선사한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을 쉽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다. 정말 쉽게 얘기한다. 이 이상 쉽게 얘기하기도 힘들만큼(물론 그래도 숙고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 정도로 쉽게. 바로 전에 읽었던 서동욱의 <<철학 연습>>보다 더 친근하게. 쉽다는 것은 가깝게 얘기한다는 뜻이다. 나와 멀리 떨어진 얘기라면 더 어렵게 느껴질 것이 틀림없다. 확실히 그는 이들 구조주의 사인방(이라고는 하지만 좀 흐릿한 관계)의 철학을 소가 여물을 씹듯 그렇게 넉넉하고 여유롭게 제대로 소화한 후 독자에게 내놓은 것 같다.

두 번째 즐거움은 시간상으로는 첫 번째로 맞이하는 기쁨이다. 서문(들어가는 말)에 정말 감탄하게 된다. 읽는 맛이 난다. 입문자용 철학 해설서를 주로 읽는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 서문은 그 자체로 너무 멋지다. 본문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서점 책꽂이에 기대어 서서 서문만이라도 읽어봤음 좋겠다. 책을 펴낸 목적을 이렇게 심플하면서도 힘있게 쓴 글은 거의 못 본거 같다. 그 목적에 내가 너무 공감하기 때문에 그런 걸까? 그래 그런지도 모르지만.

몇 번 다시 읽어보고 싶다. 대부분의 철학 관련 책들은 다시 ‘읽어야겠다’ 라고만 생각이 들지 다시 ‘읽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까닭에 이 책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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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
에이미 벤더 지음, 황근하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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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소설이 있다. 주인공 때문도 아니고 화자의 말투 때문도 아니고 작가 때문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이야기의 엔딩 때문도 아닌, 소설 전체. 작품 하나 전체로서, 실존으로서 사랑스럽다 라고 느껴지는 소설들이 내게는 있다. 꽤 오래 전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을 읽었을 때, 처음엔 잘 몰랐었지만 그건 확실히 사랑스러운 작품이란 것을 나중에 느끼게 된 이후, 그 이후로 나는 종종 사랑스러운 소설들을 만나게 되었다. <<책도둑>>과 <<건지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길버트 그레이프>> 같은 작품들이 그런 소설들이다. 여기에 한 권을 더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이 작품.

로즈(주인공)가 엄마와 아빠와 오빠와 대화할 때, 진심과 겉모습, 알지 못하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서, 마치 짝사랑하는 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바로 그러한 때, 로즈의 ‘시선’이 닿은 것들을 주의 깊게 본다면 아마도 호흡이 조금은 길어짐을 깊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빠지게 될 것이다.


‘The particular sadness of lemon cake’
원제목의 ‘particular’라는 단어가 정말 마음에 든다. 이 형용사가 실은 이 작품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special’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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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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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갖고 되겠니? 이야기로 보여줘야만 해.
소설이 다른 목적에 복무하는 것에 대해 꺼려하는 풍조가 있다. 나도 역시 그런 쪽에 가깝다. 따라서 철학소설이니 과학소설이니 하는 말들은 꺼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안 꺼낼 수 없어. 그 동안 읽은 것들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따로 분리하기가 몹시 곤란하거든. 칼비노의 이 작품은 이야기가 어떻게 철학을 직조해 내는지, 철학과 이야기가 어떻게 한바탕 어울리는지 환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떤 철학?
존재론이지. 물론 그렇기 때문에 관계론이고.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읽고 들뢰즈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우리의 주인공 코지모는 들뢰즈 계열 철학의 구현체인 거 같아.

이야기가 곧 캐릭터야.
코지모라는 캐릭터. 어찌할 수 없이 존경하고 사랑하고 싶은 캐릭터. 1인칭 시점이거나 전지적 시점이 아니기 때문에 독자가 그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자세히 봐야 하는 것은 그의 행위뿐. 그 행위가 곧 이야기고 그 행위가 곧 그이기 때문에. 그 행위들이 너무나 새롭고 갑작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 놀라움.

나무 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세상을 등진 사람의 이야기라고 착각하면 곤란해.
딱 제목만 보면 자연으로 돌아가자. 라거나 숲 속의 은자 얘기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런 측면도 많이 있다. 하지만 코지모는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땅에 사는 사람들과 더 멋진 관계를 형성하지. 세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나무줄기를 만들어 내거든. 이 줄기가 뻗어 나오는 지점과 방향이 기가 막혀. 눈을 휘둥그래 하게 한다니까.

비올라(여주인공)와의 사랑을 좀 봐.
그 아이를 어떻게 만났는지. 처음에 코지모가 달팽이요리를 거부하고 나무로 올라간 것은 그저 반항이었지. 바로 그때 비올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바로 끝나버리고 말. 귀족의 딸이지만 좀도둑들과 알고 지내고 좀도둑들로부터 신포로사 라고 불리는 그녀. 그런 그녀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호감을 느낀 뒤에 어떻게 됐니. 나무 위에 사는 것이 신념이 됐지! 이런 남자 이런 여자, 독자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노첸티의 그림책 <<마지막 휴양지>>에 나무 위의 남작 코지모도 나와. 아주 오래 전 이 소설을 사놓고 읽지 않다가 그 그림책으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마지막 휴양지>>를 본지도 한참이 지난 지금에야 읽었는데, 이 책을 샀던 십여 년 전에 읽었다면 어쩌면 그저 재미있는 환상소설쯤으로 치부했을지도 몰라. 그래도 좀 늦게 찾게 된 거 미안할 만큼. 그만큼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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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다는 것 - 채운 선생님의 예술 이야기 너머학교 열린교실 5
채운 지음, 정지혜 그림 / 너머학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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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은 연구공간 수유 + 너머의 관계자들(?)이 저자들인데 이 시리즈를 아주 좋아라 한다. 다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을 읽기도 했고. 이 저자도 거기서 벗들과 함께 하고 있단다. 느낌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10대들에도 통할까?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을까? 충실하게 담아내는 거야 그쪽 관계자들의 특기니 우려하지 않았지만, 10대에게도 통할 만큼 재미있고 쉽게 다가설지는 좀 의문이었다.  

아니, 이건 글을 쓰다가 지금 막 생각나 쓴 거다. 실은 내가 이 책을 산 이유는 느낀다는 것에 대해 짧지만 효과적인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내가 딱 10대 수준인가 보다. 저자 채운은 아주 쉽고 흥미롭게 느낀다는 것의 철학적 함의를 잘 전달하고 있었다. 역시 그쪽 관계자들은 상당수가 전달의 달인들인 게다.  

특히 <느낌의 달인들> 챕터가 좋다. 공감, 치유, 변신, 전달, 비움, 우정의 달인들을 소개함으로써 어떻게 해야 잘 느끼면서 살 수 있는지 그 기술의 핵심을 전달하고 있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소설 장르를 일부러 가장 우선 순위에 두고 읽으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내겐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자주 잊고 자주 다른데로 시선을 빼앗기지만소설 읽기는 모든 감성과 사유의 뉘앙스의 차이를 보다 섬세하게 느끼게 해 준다고 생각한다.  

산다는 것. 결국 느낀다는 것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기쁨의 느낌을 기쁠 때 제대로 느끼기 위하여 내겐 이런 종류의 책도 필요했던 것일 테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느낀다는것을 새롭게 조명해 봄으로써 내 마음도 좀 새롭게 정비를 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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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엄마 찬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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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소설이다. 읽기에도 리뷰를 쓰기에도. 새엄마와 섹스를 나누는 어린 의붓아들 이라는 설정 자체가 그렇고, 침실에 들어가기 전 세심하게 자기 몸(, ..)을 세정하는 아빠 리고베르토 씨의 리추얼과 의붓아들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루크레시아 부인의 속마음을 엿볼 수 밖에 없는 나(독자)의 위치가 그렇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흥분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모든 고급(?) 소설들이 그렇듯 이 소설 또한 그 얘기만이 소설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 스스로 찔린다. 라는 기분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행위 자체의 포르노성을 배제한 섹스의 전과 후에 집중한 묘사와 상상/환상의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면서 흥분감을 지연시키기도 하는 중간중간 배치된 그림(서양명화)과 그림의 이야기, 그리고 인칭 변화의 교묘함(조명 받는 인물의 계속적인 교체) 때문이다.  

한편으론 터부시되는 행위(의붓아들과의 성행위)를 순수함(에로티시즘 그 자체)으로 승화시킨 듯한 작품의 뛰어남에 반하긴 했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드러나는 의붓아들의 악마성이라는 설정 자체가 주는 뻔함은 아~ 그럴 줄 알았어 라는 탄식을 뱉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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