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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평점 :
개념 갖고 되겠니? 이야기로 보여줘야만 해.
소설이 다른 목적에 복무하는 것에 대해 꺼려하는 풍조가 있다. 나도 역시 그런 쪽에 가깝다. 따라서 철학소설이니 과학소설이니 하는 말들은 꺼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안 꺼낼 수 없어. 그 동안 읽은 것들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따로 분리하기가 몹시 곤란하거든. 칼비노의 이 작품은 이야기가 어떻게 철학을 직조해 내는지, 철학과 이야기가 어떻게 한바탕 어울리는지 환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떤 철학?
존재론이지. 물론 그렇기 때문에 관계론이고.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읽고 들뢰즈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우리의 주인공 코지모는 들뢰즈 계열 철학의 구현체인 거 같아.
이야기가 곧 캐릭터야.
코지모라는 캐릭터. 어찌할 수 없이 존경하고 사랑하고 싶은 캐릭터. 1인칭 시점이거나 전지적 시점이 아니기 때문에 독자가 그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자세히 봐야 하는 것은 그의 행위뿐. 그 행위가 곧 이야기고 그 행위가 곧 그이기 때문에. 그 행위들이 너무나 새롭고 갑작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 놀라움.
나무 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세상을 등진 사람의 이야기라고 착각하면 곤란해.
딱 제목만 보면 자연으로 돌아가자. 라거나 숲 속의 은자 얘기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런 측면도 많이 있다. 하지만 코지모는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땅에 사는 사람들과 더 멋진 관계를 형성하지. 세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나무줄기를 만들어 내거든. 이 줄기가 뻗어 나오는 지점과 방향이 기가 막혀. 눈을 휘둥그래 하게 한다니까.
비올라(여주인공)와의 사랑을 좀 봐.
그 아이를 어떻게 만났는지. 처음에 코지모가 달팽이요리를 거부하고 나무로 올라간 것은 그저 반항이었지. 바로 그때 비올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바로 끝나버리고 말. 귀족의 딸이지만 좀도둑들과 알고 지내고 좀도둑들로부터 신포로사 라고 불리는 그녀. 그런 그녀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호감을 느낀 뒤에 어떻게 됐니. 나무 위에 사는 것이 신념이 됐지! 이런 남자 이런 여자, 독자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노첸티의 그림책 <<마지막 휴양지>>에 나무 위의 남작 코지모도 나와. 아주 오래 전 이 소설을 사놓고 읽지 않다가 그 그림책으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마지막 휴양지>>를 본지도 한참이 지난 지금에야 읽었는데, 이 책을 샀던 십여 년 전에 읽었다면 어쩌면 그저 재미있는 환상소설쯤으로 치부했을지도 몰라. 그래도 좀 늦게 찾게 된 거 미안할 만큼. 그만큼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