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오브 더 북
제럴딘 브룩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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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특히나 그 책이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고 보관되어 졌다면 말이다. 

서적보존 전문가 해나 히스 박사는 이스라엘의 고문서 학자 아미타이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1992년 보스니아 내전 중 유실된 줄 알았던 '사라예보 하가다'가 발견되었으니 그 책의 상태를 분석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해나는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책을 가지고 작업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흔쾌히 제안을 수락한다. 한걸음에 보스니아로 날아가 사라예보 하가다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사진으로 찍고 상태를 기록하던 해나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한다. 바인딩 사이에서 나비 날개 조각이 발견되고, 어느 페이지에는 소금물에 닿은 흔적이 있다. 또다른 페이지에는 붉은 와인 자국이 있고, 유월절 저녁 식사 장면에는 샛노란 옷을 입은 흑인 여인이 한 명 있는데, 그 페이지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하얀 털이 발견된 것이다. 해나는 오래된 하가다를 복원하면서 페이지마다 숨은 실마리를 찾아 책의 역사를 추적하게 된다.

책에 불을 지르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에게도 불을 지른다. -하인리히 하이네 

최근에 하가다를 지킨것은 사라예보 국립박물관의 무슬림 사서였다. 전쟁의 포탄 속에서도 진귀한 하가다를 지키려 폭탄속으로 뛰어든 용감한 사람이였다. 유대인의 책을 무슬림이 지켜내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유대인의 책 하가다를 무슬림이 처음 지켜낸 것은 아니였다. 해나가 책 속에서 발견한 여러가지 물질들로부터 추측된 하가다에 연관된 이야기는, 그 책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매개로 얽히고 섥혀 있는지 보여준다.

나치가 유대인을 억압하던 숨막히던 시절, 셰리프라는 무슬림은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세상속에 정의를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유대인 소녀를 온전히 구했을뿐 아니라, 하가다를 없애려는 나치의 계획에 온 몸으로 맞서 싸웠다.
하가다는 사실은 흑인 소녀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 창조물은 14세기 중반경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콘비벤시아 기간에 온전한 책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그 책은 강을 넘고 산을 건너 먼 땅으로 오게 되었고 책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끝에 전쟁통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제 People of the Book은 아랍어 알 알키탑(Ahl al- Kitab)을 번역한 말로, '신성한 책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현재 우리는 이슬람, 무슬림, 유대인, 기독교로 나뉜 종교 전쟁으로 인해 멍들어있다. 하지만 각 종교들의 말씀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우리는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닐까. 신의 신성한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유대인의 책 하가다가 아니라 신성한 신의 말씀이 적힌 하가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작가인 제럴딘 브룩스는 책에 대한 애정과 동시에 사람들의 애정을 이 책에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단 한권의 책 하가다는 진귀한 책을 지키고자 했던 믿음과 동시에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깃들어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 책이 팩션임에도 불구하고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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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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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추리소설에서 범인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어딘가에 잘 숨겨져있다. 작가는 범인을 숨기기 위해 철저하게 노력하고 연구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숨겨놓은 범인은 과연 누구일지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추리소설의 매력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베일 너머에 숨겨놓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려는 독자와, 진실에 다가가려는 독자를 막으려는 작가와의 숨막히는 머리싸움.

하지만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는 그런 공식을 뒤집는다. 책 머리에 범인과 범행방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과연 히든카드를 먼저 내민 작가가 이 책을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것이다.

대학 경음악부 '알코올중독분과회'의 멤버로 술을 좋아해서 친하게 된 동창들이 오랜만에 동창회를 갖는다. 그들은 한 동창의 형님이 운영하는 고급 펜션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들 모두가 묵을 수 있는 많은 방, 고풍스러운 방문 등 중세의 성을 연상시키는 고급 펜션에서 후시미 료스케는 치밀한 계획 끝에 후배 니이야마를 죽이고 완벽한 밀실 살인을 재현한다. 그리고 그 밀실이 열리지 않게 하기 위해 치밀한 작전을 펼친다. 닫힌 문 저 너머에는 과연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이 책의 매력은 '닫힌 문'에 있다. 후시미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 니이야마를 죽였다. 애써서 밀실살인을 만든 그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 다음날까지 문이 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선 그는 니이야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알레르기 비염약을 먹이며 잠들도록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잠들어서 못일어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몇 시간뿐.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일어나지 않는 니이야마를 두고 사람들은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된다. 도대체 그는 왜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도대체 왜 문을 꽁꽁 걸어 잠근 것일까.

오래 전부터 밀실살인과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연구해 온 후시미는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길 바란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유카가 후시미의 계획에 계속 딴지를 건다. 후시미는 분과회 멤버들의 평범한 반응에 대해서만 조사하고 계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카는 상황을 냉철히 분석하고 다른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한 것까지 알아내어 후시미의 목을 서서히 좁혀온다.

계속 문을 닫아두려는 후시미와, 문을 열려고 노력하는 유카. 그 숨막히는 심리대결은 마지막 '대화'부분에서 절정에 이른다. 후시미가 노력하여 만든 트릭은 결국 유카에 의해 밝혀질 것인가? 그토록 후시미가 문을 닫아두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숨막히는 그들의 대화 내용이 끝날때까지 독자들은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닫힌 문을 바라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후시미가 니이야마를 죽인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동기는 십분 이해가 되지만, 과연 그것이 살인에까지 이어져야 했을까....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 닫힌 문 너머에는 좀 더 감상적인 이유가 존재할 것이라 기대한 나에게도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폐쇄된 공간 속, 제한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숨막히는 대결은 책을 손에 쥐자마자 책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만드는 흡입력을 만들어 냈다. 범인이라는 히든카드를 먼저 내민 작가는, 더 치밀한 구조를 책 속에 숨겨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더욱 더 책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닫힌 문 저 너머속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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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나무 식기장 - 제15회 한무숙문학상 수상작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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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의 첫장을 넘길 때의 마음은 설렘 반, 우려 반이다.
나와 맞지 않는 글과 문장을 만나면 조각조각 떨어진 이야기들을 읽어내기가 고역이다. 반면에 첫 문장부터 마음에 들면 설레는 마음에, 기분이 한없이 둥둥 떠오른다. 다음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까, 어떤 사람들이 등장할까, 어떤 전개가 펼쳐질까.....

이현수님의 '장미나무 식기장'은 오랫만에 설레면서 읽은 단편집이였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실려있는 생명력이 어찌나 가슴깊이 와닿던지. 손에 잡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쭉 읽어내려갔다. 

'장미나무 식기장'에는 여러 여성들이 존재한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인들이지만 그들의 삶은 흔하지 않다. 과부들만 존재하는 가문에서 오로지 홀로 '호주'라는 짐을 짊어져야 했던 그녀. 그녀는 집에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자신의 어머니나, 엄하기만 한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집안이, 그리고 호주제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추풍령)  남편 잡아먹었다는 오해 속에서도 여장부처럼 집안을 일으킨 어머니는, 오래된 책상을 떠나보낼때는 끝내 눈물을 보인다.(장미나무 식기장) 오랫동안 자신의 후처 신세를 상담했던 옆집 여인이 돌연 죽음을 맞이한 어느날, 그녀의 삶이 그리 녹록치 않았음을 후에 집에 들어온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듣게 된다.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었던 '병신' 어머니의 그늘이였건만 자신의 딸이 귀 두개 달린 병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딸과 남편을 버린 그녀는 후처에게 머리 숙이며 그렇게 자신의 모정을 나타낸다.(남의 정원에 함부로 발 들이지 마라)

식기장을 열 때마다 텁텁하고 쌉싸래한 감나무숲의 냄새가 난다. 이 식기장이 있는 한, 불에 타 없어진 책상과 함께 우리가 거쳐온 여러 집들과 그 집에 얽힌 역사와 소소한 일들을 나는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번개가 치듯 찰나에 스러지고 마는 생의 한순간을 오롯이 기억하자면 그들도 대책없이 큰 책상이나 수퉁스런 장미나무 식기장 하나쯤은 가져야 하는 것이다. 떠나온 집이 나를 짓고, 장마재 출신의 책상이 아버지를 짓고,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지은 그 집들이 전부 불에 타기 전에.
(장미나무 식기장 中)

우리 마음속에 누구나 장미나무 식기장을 가지고 있으리라. 정성들여 예쁘게 지은 장은 세월이 흐르면 이리저리 뒤틀리며 결국 불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불타기 전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세월은 불타면서 사라지는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깊게 깊게 가라앉는 것이다. 아마, 책에서 이야기에서 전달하고자 한 이야기는 바로 그것 아니였을까.

곁에 두고 오래오래 읽을 좋은 책을 만나게 되서 너무 감사하다. 작가님의 말(?)대로 책 값이 전혀, 전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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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벽돌집 오늘의 청소년 문학 7
박경희 지음 / 다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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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늦게까지 술마시며 공원을 떠돌던 준. 그는 술취한 늙은 노숙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냥 지나치고 싶은 자신의 맘과 달리 준의 친구 웅은 노숙자를 구타하기 시작한다. 잔인한 구타가 이어지고 준은 처음 맘과 달리 노숙자를 구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폭력은 경찰에 의해 멈추게 되고 준은 결국 수갑을 찬 채 경찰서로 끌려가게 된다.

구질구질한 집이 너무나 싫어서 탈출을 꿈꾸는 수경.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몸만이 찬란한 미래를 보장할 것이라 믿는다. 모델이 되고 싶어 모델학원에 다니고 싶어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그녀를 비웃을 뿐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꿈을 위해 위험한 원조교제를 시작하고, 그런 원조교제는 그녀를 경찰서로 몰아넣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준과 수경은 소위 말하는 문제아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자란 준은 허전한 마음에 늘 방황하고, 학교에서도 자리잡지 못하고 책만 보는 생활을 이어간다. 그런 준을 제대로 잡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 선생님은 그런 준을 삐딱한 시선으로만 바라보며 결국 자퇴시키고 만다. 수경 역시 부모님에게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존재다. 언젠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미래를 개척하리라 다짐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원조교제로 돈을 버는 것뿐이다.

이 책은 너무나 사실적이다. 문제 청소년들이 누군가로 인해 감화되고, 새로운 삶을 찾았다...는 판에 박힌 이야기가 아니라, 그네들의 문제로 인한 탈선행위와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여과지 없이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어리고,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사회의 어른들이 그들은 감싸 안아주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평범하고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까 두려워하며 선을 긋는건, 어른들이다. 사회의 바깥에 내쳐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그 아이들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분홍벽돌집'이라 칭하는 안양소년예술학교에 수감된 준과 수경은 비로소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다. 그곳은 회색 벽돌집처럼 답답한 학교가 아닌 자유로운 곳이였다. 자신을 표현할 닉네임을 정하고, 영화에 대해 공부하면서 준과 수경은 점차 자신을 찾아간다. 

수경의 안타까운 죽음 뒤, 준은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준은 영화를 만들며 한 뼘 더 성장할 것이다. 그 성장은 삐뚤어져 자라던 그의 모든 것을 쳐낸 뒤, 올곧이 자란 곧은 한줄기가 되어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 역시도 문제아들을 얼마나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봤는지 반성하게 됐다. 무언가를 섣불리 판단하기 보다는, 그 안의 본질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 역시 가벼이 넘어가기 보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바라봐줘야 비로소 그들의 '분홍 벽돌집'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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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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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커피를 마셨을때가 생각난다.
부모님이 커피를 마실때 곁에서 녀석의 향만 맡으며 커피에 대한 짝사랑을 키워갈 즈음, 커피를 마실 기회가 생겼다. 설탕도 프림도 넣지 않은 순수한 커피 그 자체였는데 마시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 아, 써!!

검은 액체는 내게 쓰디쓴 고통을 안겨줬다. 달콤한 향에 취해있던 나는 녀석의 쓴 실체를 알지 못했고, 맛을 본 이후에는 검은 얼굴을 한 녀석이 두려워졌다. 어쩜 저렇게 군침도는 향기를 지녔으면서도, 실제로는 쓰고도 쓴지. 그래서 그 뒤부터는 시럽을 잔뜩 넣거나, 아니면 설탕을 잔뜩 집어넣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검은 얼굴을 가진 녀석과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따냐 역시, 커피향에 먼저 취한다. 하지만 그녀 역시 녀석의 쓰디쓴 면을 확인하고 만다. 하지만 내가 놀란것만큼 놀라지는 않는다. 왜냐면, 인생에서 제일 쓰디쓴 지점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관의 외동딸로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그녀는 아버지가 나라 물건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죽게 되면서 나라를 떠나게 된다. 아직 이 나라는 가장의 죄로 인해, 가족이 모두 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씩씩하게 삶을 이어간다. 비록 러시아의 넓은 숲을 팔며 사기치는 삶이지만, 그 어떤 남자에게 뒤지지 않을만큼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다가 그녀는 조선에서 러시아 황제를 방문한 사신을 만나게 되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다.

그녀가 다시 돌아간 고향은 일본에, 러시아에, 서구열강에 의해 압박당하며 숨도 못쉬는 상태였다. 때마침 왕비가 일본 자객들에게 목숨을 잃는 어이없고 분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나라는 일본의 손에 넘어가있고 왕은 딴 나라의 지붕아래 숨어있는 비참하고 답답한 상황. 그 상황속에 따냐가 걸어들어간 것이다.

왕은 노서아 가비, 즉 러시안 커피를 즐겨마셨다. 식전이고 식후고 원하면 언제든지 수 잔씩 마시는 지독한 커피애호가였다. 따냐의 임무는 간단했다. 왕께 맛있는 커피를 타드리는 것, 동시에 왕의 주위를 호시탐탐 감시하는 그들에게 왕의 한마디 한마디 전하는 첩자 역할까지 해야하는 것이였다.

그녀는 점차 왕에게 빠져든다. 왕비를 잃고, 나라마저 잃은 비운의 왕. 그의 고뇌와 울분에 그녀 역시 한 발 한 발 빠져든 것이다. 그리고 왕에게 빠져들면서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이반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자신을 흔든 첫번째 남자였지만 결국 그 남자에겐 사랑도, 동정도, 눈물도 없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따냐는 자신의 커피를 믿어준 왕을 구한다. 동시에 바닥이 보이지 않는 사랑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따냐는 왕의 권유대로 황실에 남아 계속 커피를 타는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따냐는 자유로운 여인이였다. 그녀는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커피와 그녀의 삶을 이방인들에게 알렸다. 

'나라도 인종도 사건도 제각각이었지만 이 공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두 검은 액체와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곧 끝을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이야기였다.'

커피만큼 우리 인생과 잘 맞닿아 있는게 있을까. 난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커피는, 우리네 인생일거다. 인생은, 향긋한 향을 풍기기도 하지만 막상 그 길을 걸어가면 쓰디쓴 장애물들이 더 많은 법이니 말이다. 그래도 열심히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따냐처럼 커피 한 잔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사랑을 발견하기도 하고 기쁨을 얻을수도 있기 때문일거다. 그래서 난 오늘도, 커피 한 잔을 들이킨다. 이번에는 설탕이나 프림을 넣지 않은 쓴 맛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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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09-07-1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이즌님...이거 읽고 나니 커피가 땡기잖아요....ㅋㅋ

poison 2009-07-15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런이런, 제가 뜻하지 않게 커피를 권하게 되었네요.
그래도, 비오는 이런 날은 커피가 너무 땡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