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나는? 스물다섯 해를 살도록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던 나는 무엇인가.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나,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보내고 있는 나. - P17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 P18

열 살이 넘으면서부터 내 손으로 곧잘 밥을 지어먹곤 했다. 착한 마음이 불 일듯 일어나는 날에는 된장찌개도 끓이고 나물도 무쳐서 밥상을 차려놓고 시장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넘은 후로는 그렇게 착한 마음이 생기는 날이 참 드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철이 들면 더욱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 P60

"형이랑 같이 살 때, 난 밤마다 기다렸다가 형이 벗어둔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은 뒤에야 잠을 잤지. 냄새나는 형의 양말,
나 때문에 더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 양말을 주물러 빨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지금도 형 집에 가면 형수 몰래 가끔 형 양말을 빨아주고 돌아와."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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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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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소녀 에디트에게 연민의 마음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과 노력을 다하는 현역 장교인 호프밀러. 이성보다 앞서 나가는 이놈에 ‘연민’ 때문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여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안심시켜 주었지만 점점 두려워지고 초조하게 만드는 상황들로 혼란스럽다. 그래 맞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런 상황은 아니였는데 벅차다. 아니 예상은 했지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너무 얕잡아본 것 같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고, 점점 내 자신마저 잃어간다.

악의는 없지만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여(연민이 만들어낸) 나에게 호프밀러처럼 모든 것을 아니, 꽤 많은 부분을 맞춰주고 도와줬던 사람이 있었다. 그 당시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을 반드시 해내주길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대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알았다. 나의 어려운 부탁이자 무리가 되는 그 일들을 들어주는게 쉽지 않다 라는 것을. 하지만 반드시 그의 입으로 ’해결이 잘 될거야(반드시).’ 라는 확답을 들었어야만 했다. 결과는 나중일이다. 무조건 일단 나를 안심 시켜주어야만 하는 의무를 그의 목에 내멋대로 걸어놓고는 쥐어짜고, 또 쥐어짜며 내가 듣고자 하는 모범정답을 얻어냈었다.
에디트라고 몰랐을까? 불편한 다리로 인해 대신 얻게 된 감각신경들로 그녀는 굉장히 예민하고 민감함을 가진 소녀이다. 호프밀러에게 쥐어짜내 얻어내려 했던 것은 그녀를 안심시켜줄 만한 믿음의 말이였을 것이다. (물론 연민과 현실을 아주아주 잘 숨기되 진심과 애정은 가득 담긴 말이어야 한다)

책을 읽다보면 호프밀러가 너무 성급하고 신중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고, 에디트와 그의 가족들이 그리 잘 알지 못 하는 단 한번의 만남에서 얻게 된 인상으로 호프밀러에게 너무 큰 기대감을 갖고 그에게 호소하는 책임감이 부담스럽다는 인상도 받을 수 있다. 나는 에디트와 그녀의 가족을 너무 이해한다. 나에게도 아픈 가족이 있었으니까.(과거형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이 아직도 와닿지가 않는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돌봤었던)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에디트의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날카롭고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모습(어린아이 같기도 한)들을 그저 바라보면서 마음에서는 미안하기만 하고 애처롭기만 하고 익숙해질만 한데도 여전히 ‘ 이 시련이 차라리 나에게 온 것이였다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시 과거의 건강한 상태로 절대 되돌려줄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며 다가가야 할 때의 죄스러움과 가슴을 훑는듯한 고통을.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그 고통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읽으면서 누가 내 가슴을 긁어내는 것 같은 불쑥하고 찾아오는 찌를듯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에디트를 향한 모든 사람들의 간절함에서 오는 아픔과 함께 조금은 숨이 막힐듯함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라고 표현한 것은 아픈 가족이 있는 집에서는 늘 함께 공존해야하는 어둠이 깔린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희망이라는 빛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 무거운 커튼을 새로운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살포시 들춰서 달큰하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주면, 가족들이 365일 공을 들인 노력보다도 더 큰 긍정의 효과로 그간 없던 생기와 간절했던 희망이 다시금 만들어질 때가 있다. 그 때의 경외감을 어찌 호프밀러와 그녀의 가족들이 밀어낼 수 있겠는가... 단 하루라도 더 웃음지을 수 있고, 행복감을 줄 수만 있다면 거짓말도 괜찮을 때가 있다. 무엇이든 다 간절하니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들의 감정들 하나하나가 허투루 지나칠 수가 없다. 모든 것들을 다 섬세하게 담아냈기에 제목처럼 읽는내내 불안감과 초조함 그리고 좌절과 잠시 스쳐지나간 희열 등 이들의 감정들을 가슴에 다 담아내기가 너무 벅찰정도다.

아픔이 꼭 아픔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통증과 고통이 꼭 통증과 고통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불행이 꼭 불행으로 보상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를 향한 혐오를 가지고 벼랑끝으로 올라가 내 몸뚱아리와 함께 내던지는 것으로 나의 짐을 덜어버리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나니 불규칙하게 내 귀를 괴롭혔던 현악기의 심란한 연주가 끝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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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이라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리고 그 이상까지도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희생은 당연한 것이고 거짓말이라도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 이라면 오히려 그 어떤 진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다. - P397

불안해할 필요 없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어요.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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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 P235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우연히 찾아온 치통 때문에 본래의 고통을 잊는 것처럼 나는 실제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비겁하게 도망치게 하는 게 무엇인지를 잊었던 것(혹은 잊으려 했던 것)이다. - P327

운명에 의해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언제라도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거든요.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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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자신의 걱정을 이해하는, 아니, 적어도 이해해주려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당신이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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