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짓가랑이에 붙은 먼지 한톨조차 인간의 시원이라 중히 여겨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그 시원으로 돌아갔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참으로 아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물론 본인은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젠장. - P16

자줏빛 들국화 몇송이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때도 있었다. 먹지도 못할 맹감이나 들국화를 꺾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도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처럼 굳건한 마음 한가닥이 말랑말랑 녹아들어 오래전의 풋사랑 같은 것이 흘러넘쳤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 숨이 끊기고 처음으로 핑 눈물이 돌았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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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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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된 마음의 공감을 통한 치유의 시간속에서 뒤두었던 초라한 그 시절의 나를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해 홑으로 시간을 흘려버린 우매한 내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한 내 삶의 본질은 역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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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간절한 마음이 전부였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건만 이제는 서로를 비추는 두 개의 거울처럼, 서로의, 서로에 대한 기억들만이 원망의 목소리도 흐느낌도 한숨 소리도, 웃음소리도 없이 순수한 묵음으로 남아있을 뿐이니. - P173

거기에는 그저 어둠뿐이었어. 세상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그저 캄캄한 밤바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노라니까 그 어둠 속에도 수평선이 있어서 어둠과 어둠이 그 수평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뒤섞이는 거였어.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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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 P121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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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과 함께 온 책 그리고 끄적거림 -

김연수 작가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있다.
아직 진도가 많이 나간 건 아니지만 삶의 본질을 알려주는 내용이 철학적으로 다가왔다. 부담스럽지 않고 딱딱하지 않으며 다정하다.

(P. 58) 섣불리 희망을 가질 수도,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절망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일희일비하는 동안 검게 물든 삶은 느리고 더디게 흘러갔다.


원치않는 이별로 황망함에서 빠져 나오지 못 한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죽어버린 것 처럼 삶의 비관과 낙담으로 일말의 기대없이 어쩔 수 없이 매일 아침 눈이 떠져서 사는 사람들 분명 있을 것이다. 행복을 꿈꾸기에 불행을 느낀다.

진부한 말이지만 내 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책을 만났다.
이럴 때 나는 ‘안심’을 하게 된다. 내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겪고 사는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구나 하는 안심.
여러 감정 중 내 안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상실감의 귀퉁이 하나라도 닮은 모양만 발견해도 그게 그렇게 반갑다. 그리고 내 맘에 꽂히는 단어 하나에도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나는 그렇다.

필요한 건 하나였다.
남아있는 의심이나 삶의 대한 회의감을 아직 말끔히 치우지 못 했어도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의 자리는 남겨둘 수 있도록, 스스로 마음 청소를 해야 한다는 것.

비관적이고 낙담했던 내가 그리고 당신이, 이 책까지 마음에 품을 수 있다는 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삶의 본질을 알아가는 중이라는 ’신호‘ 아닐까? 후훗.


(P.70) 그 막막한 자유속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변화’가 절실했던 시기가 있었다. 내 삶의 우선순위에 일, 연애, 여행 말고 ‘가족’이 빠져있던 그때. 매일같이 휘몰아치는 업무에 눈이 빠져라 규정은 들여다봐도 ‘책’은 적당히 몇 권 책꽂이에 꽂아두고 장식처럼 방치 하면서, 놓치고 있는게 뭔지도 모르고 꽤 괜찮은 삶인 줄 착각하며 해망쩍은 생각을 하며 살았던 그때.
망아지 날뛰듯 했던 그때를 떠올리니 겪어보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인생에 딱 한번 선물로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난 숫제 후회의 길을 들어서지도 않았을텐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또 잠시 젖어본다.

(P. 23) 시간의 끝에,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기다리던 소식과 함께 반가운 책들이 도착했다.
괴나리봇짐 둘러메고 어디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서 먹을 것 잔뜩 옆에 두고 책만 읽으면 딱 좋겠다......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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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5-04-0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다정한 김연수 작가님입니다 ㅋ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를 잘 쓰셨네요~!! 책탑에 반가운 책들이 많이 보입니다~!!

곰돌이 2025-04-03 09:20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덕분에 <빈 자리> 잘 모셔왔습니다 :) 김연수 작가님 책 너무 잘 읽고 있어요. <일곱 해의 마지막> 도 제가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웃기웃..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