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책이 도착해 박스를 열어 볼 때마다 어찌나 후끈한 열기를 가득 품고 있던지, 거의 구해내듯 책을 꺼낸 것 같다. 한동안 책 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책장에 새 책들을 옮겨 보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어느새 아침으로는 습하지만 조금은 선선해졌고, 또 이때쯤이면 눈길이 가는 이야기가 생긴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라는 책을 만났다.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대한 경고를 담은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환경 서사시라는 소개가 눈에 들어왔다. 2019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적힌 띠지를 떼어내고 한 장 한 장 넘겨보는데, 예상한 것보다 더 좋았다. 단순히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영 마음에 안 차지만, 이 두툼한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무언가 닿는 순간이 많을 것 같다는 섣부른 확신 같은 게 들었다.

자연을 의식하며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나무는 늘 나무였고, 산은 늘 산이었다. 계절은 알아서 바뀌었고, 나는 그 곁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늘 거기에 있었다. 당연했다. 아니,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결락이라는 말이 내 삶에 들어왔고, 아무것에도 위안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지려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애쓸 일도 없고, 애태우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구름 위를 걷는 듯 살아왔던 걸까. 상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경계 너머의 것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기억에서도 지워졌지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만은 분명한 그날, 걷다가 저 멀리 보이는 울창한 산을 바라봤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거짓말이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보이는 그 산은, 보기만 해도 속이 답답했다.

그렇게 걸었고 또 걸었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제야 안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아 잊고 있었던 것들을. 냄새도 맡아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방향도 바꿔보라고. 자연은 내다볼 줄 안다. 그러니 나는 자연에 빚을 졌다. 자연만이 아니다. 책에도 빚을 졌다. 지금은 꼭 이유가 있어야 책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읽다 보면 읽고 싶어지고, 읽고 싶으면 또 펼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의리도 조금은 있는 것 같다. 이제 아주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지나간 순간의 숨을 다시 쉬는 날이 있긴 하지만, 예전처럼 오래 붙들고 있진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나에게, 그때의 나와 내가 해보았던 여러 시도를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이.


리처드 파워스 <오버스토리>

오버스토리. 숲의 지붕을 이루는 나무들의 층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뿌리, 몸통, 수관, 종자’로 이어지는 목차를 보니, 나무 한 그루를 들여다보듯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는 소설인 걸까. 전후 사정도 알지 못하면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있었다”라는 이 짧은 첫머리를 읽고, 어디라고 정확히 짚을 수 없는 곳에서부터 찌르르해지면서 나의 묵힌 감정들이 올라왔다. 자연에 기대어 본 적이 있기에 조금 더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왔는가 보다. 그때의 나는 분명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 안 했을 테지만, 지금은 읽고 있다.

어떤 여자가 바닥에 앉아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있다. 나무껍질이 여자의 등을 인생처럼 딱딱하게 누른다. 솔잎은 허공에 향기를 뿌리고 나무 한가운데에서 전해지는 힘이 나직한 노래를 부른다. 여자의 귀가 가장 낮은 주파수에 집중한다. 나무는 말이 존재하기 전의 말로 이야기를 한다. (p. 13)

뒤이어 “신호가 여자의 주위로 씨앗처럼 떨어진다”는 문장에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고, 당장에 눈에 띄는 것은 없었지만 천천히 비집고 나오고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며, 아주 조금은 가상히 여겨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책 속의 죽음을 읽으며 누군가를 잃었던 때를 떠올렸다. 글쎄,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만한 말은 잘 모르겠다. 그저 어쩌지 못하겠는 마음을 책을 통해 다시 마주하니 조금 힘들었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라는 책 때문이다.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갈리시아의 한 작은 도시, 유대교 여성과 기독교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달 된 아기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속하는 일 앞에서 아기 엄마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에 장례를 마치고 아직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던 그녀의 발치에는, 이제 한 친구가 가져다 놓은 음식 그릇이 놓여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할머니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할머니가 아니다. 다시 딸의 엄마일 뿐이다. 이야기는 어머니가 오래전 겪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딸이 이제 조만간 깨닫게 될 사실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p. 24)

그런데 작가가 이야기를 참 묘하게 끌고 간다. 한 장면을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아주 작은 틈을 통해 자연스럽게 다른 결로 옮겨간다. 풀어가는 방식 자체가 꽤 마음을 잡아끌고 매력 있다. 예측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음이 슬픈데, 아름답다. 너무 알겠는데, 어디서 읽어본 적은 없다. 이러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 <레 망다랭>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돌아가다>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들과 동성애자로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내가 파리에 정착하게 만든 두 가지 큰 이유였던 것 같다”는 부분을 읽고 밑줄까지 그어 가며 궁금해했다. 보부아르를. 누군가의 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과, 그 글이 실제로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 아닌가. 출신 계급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성적 지향은 평생 감춰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을 그가 보부아르를 읽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 자신의 삶을 전부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의 그 표정이, 짧은 문장 안에서도 다 들여다보이는 것만 같았다.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게 된 자의 해방감이. 나도 보부아르를 펼쳤다. 여러 책 중에서도 <레 망다랭>을.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앙리는 ‘희망’이라는 뜻의 신문사 <레스푸아>를 운영하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 앙리와 그의 동거녀이자 전직 가수인 폴이 사는 원룸에 작가 뒤브뢰유와 그의 아내 안, 딸 나딘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인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기, 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식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뒤브뢰유는 앙리에게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함께할 것을 권한다. 신문사를 계속 운영하는 한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앙리도 잘 알지만,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늘 똑같은 얼굴들, 똑같은 환경, 똑같은 대화, 똑같은 문제들, 변하면 변할수록 더욱 비슷해지다니. 결국 살아 있는 채로 죽어가는가 싶은 것이다. (p. 22)

“나는 생각하는 것을 반드시 있는 그대로 말하려고 해. 조직에 매이지 않은 채 말이야.” (p. 36)

서로 다른 생각으로 충돌하고, 사랑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자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초반부만 읽어서 다 짐작할 순 없지만, 정치와 이념을 둘러싼 이야기라 읽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릴 줄 알았는데, 결국은 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히고 가독성도 괜찮다.


디노 부차티 <타타르인의 사막>

처음 만나는 이탈리아 작가 디노 부차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작가라는데, 몇 쪽을 읽는 동안 가장 크게 느낀 건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담담한데, 어딘가 착잡한 기운이 감돈다는 것.

힘들었던 기숙사 생활을 끝내고 장교가 된 조반니 드로고는 첫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떠난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나 활기가 느껴진다기보다는 미래에 큰 기대도 없어 보이고, 심지어 헛헛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머니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길을 나선 그는 어디에 있는지도, 얼마나 먼지도 모르는 요새를 찾아 계속 산을 오른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마부에게 요새의 위치를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온다.

“이 부근에는 요새가 없어요.”

불안감이 밀려오지만, 그가 잘못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한참 더 올라 마침내 거대한 군사시설과 마주한다. 황량하고 냉랭한 건축물. 이번에는 정말 요새인가 싶었는데, 또 아니다. 걸인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곳은 이미 십 년도 넘게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이라고 한다. 거센 바람까지 불어닥친다. 잠잠해지고 난 뒤 다시 길을 나서고, 마침내 사람이 눈에 보인다. 오르티츠라는 이름의 대위였다. 인사를 나누던 중, 대위가 드로고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굽니까?”

드로고는 두려움을 느낀다. 아무 뜻 없이 던진 평범한 질문이었을 텐데, 왜 이 말이 드로고에게는 대답하기 두려운 질문이었을까.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라도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쉽게 입을 떼기 어려웠을 것 같다. 드로고에게도 그랬던 건 아닐까. 이어 대위에게서 또 한 번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드로고의 목적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는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

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어 보이는 저 건물과 흉벽, 포대와 탄약고 뒤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아무도 지나쳐간 적 없다는 돌투성이 사막의 북쪽 왕국은 어떠할까? 어렴풋이 기억하건대, 지도에서 국경선 너머 광활한 지역에는 몇 안 되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새의 높이 정도라면 몇몇 마을이나 초원, 하다못해 집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오직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의 황량함뿐일까? (...) 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요새 입구에 발조차 내딛지 않고 다시 그가 떠나온 평야로, 그의 도시로, 익숙한 옛 생활로 내려갈 수만 있다면! (p. 21)


버나딘 에바리스토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흑인 여성 최초로 부커상을 받은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작품이다. 열아홉 살 딸을 둔 오십 대 여성, 자칭 전투력 넘치는 중년의 베테랑 ‘앰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앰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구 도미니크에게로 시선이 옮겨가고, 또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의 가족과 친구, 과거의 시간까지 닿는다. 한 사람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둘러싼 다른 삶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열두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삶의 모양들을 하나씩 만나게 될 것 같다.

한 사람을 내가 본 모습 하나, 그 단면으로만 기억하는 건 어쩐지 아쉽다. 지나고 나서야 후회로 남는 순간들이 있어서일거다. 누구나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시간이 있고,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니까. 그런데 참 웃긴 것이, 소설 속 인물을 바라볼 때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깊이 들여다보려고 하면서, 현실에서는 영 그러질 못한다.


아무튼, 오늘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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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8-23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버스토리>가 맘에 꽂히네요.
자, 이제 색깔별로 꽂아볼 시간입니다. ㅎㅎ

곰돌이 2026-08-23 12:00   좋아요 0 | URL
이대로 색깔 찾아 쏙쏙 채우기만 하면 될 것 같죠? ㅎㅎ 고스란히 들어가 줄 만큼만 책장이 넉넉하면 좋을 텐데요... 흑흑

자목련 2026-08-23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버스토리>아름다운 문장과 자연의 신비로움으로 기억하는 소설이에요.
나란히 발맞추는 책들, 경쾌하고 즐거워 보입니다!

곰돌이 2026-08-23 12:01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자목련님이 남겨주신 글과 산뜻한 책 사진, 이미 다 보았지요. ㅎㅎ 처서매직은 없지만, 가을로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어서인지 어딘가 차분하면서도 잔잔한 이야기에 손길이 가요!

Falstaff 2026-08-23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님 글도 참 잘 쓰셔요. 세상에 이런 일이! 전부 재미나게 읽은 책이라 내 마음까지 므흣하네요.

곰돌이 2026-08-23 12:02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의 첫 칭찬에는 (혼자 가슴에 새겨둠 ㅋㅋ) 앞으로 더 열심히 읽어보라는 응원의 뜻이라 생각하며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혔는데요. 이번엔 못 참습니다!!! 폴스타프님의 글을 읽고, 고른 책으로 책장을 채우는 경우가 많으니 (이미 아시죠? ㅋㅋ)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기도 이제 머쓱할 지경이네요.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계속.

다락방 2026-08-23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님 글도 참 잘 쓰셔요.2 저보다 먼저 폴스타프 님이 말씀해주셨네요. 저도 딱 그 댓글 달려고 했거든요. 곰돌이 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좋고, 이게 알라딘이다 싶어요. 크- 계속 써주세요!

다락방 2026-08-23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오버스토리 저도 사둔지 한참 된 책입니다! (안읽었지만..)

곰돌이 2026-08-23 18:0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댓글 첫줄에서 폴스타프님 목소리(제가 상상한 그의 음성이...ㅋㅋ)가 들리네요. 큰 의미고 뭐고 없이 재미만으로 읽을 때도 많지만, 속에 들어찬 무언가를 좀 덜어내고 싶을 때, 내 이야기를 써 보고 감정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는 그 시간만으로도 얻는 게 넘 많아서 겁없이 이어가고 있네요. 제가 잘한 일 중 하나이기도 해요. 큭. 그런데 이렇게 곰 한 마리의 마음을 후끈하게 해주시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이 순간을 잔뜩 누리리! ㅎㅎ <오버스토리>는 제가 먼저 읽어볼게요. 다락방님은 잃시찾도 읽으셔야 하고, 넘 바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