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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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정들이 담긴 발자취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철저하게 ‘단속’을 하며 지내왔던 내가 작년부터 소심하게 조금씩 적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키보드와 핸드폰 타자기에 익숙하던 손가락이 펜을 움켜쥐는 낯선 느낌은 둘째치고,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진솔하게 적어 내려가는 행위가 어찌나 부끄럽던지 얼른 포기하고 와닿는 구절을 필사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그런데 눈으로 읽고 머리로 사유하며 또 가슴으로 담는 일상이 횟수를 더해 갈수록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담아내는 일이 서서히 자연스러워지고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느꼈다. 읽는 것 만큼 쓰는 것도 참 좋구나.


이번에 읽은 <모순> 이라는 책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검색만 해도 줄줄이 쏟아지는 후기들을 멀리하고 시대적 배경에서 그려지는 예상되는 사건들과 그 속에서 나오는 감정들도 최대한 편견없이 접근하며 읽어 내려갔다.

이 책의 주인공 ’안진진‘은 부모님의 딸로써, 남동생의 누나로써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여자 ’안진진‘으로써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서로 다른 빛깔과 방식 속에서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자 나영규와 김장우의 존재 때문이다. 그녀에게 머지않은 시간에 청혼할지도 모를 두명의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로 다가왔다. (냉소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가 사랑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었나보다.) 속을 알 수 없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는 너무 다른, 서툴지만 마음속에 모든 것이 다 있는 사람이자 끝까지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몽상 속 아련한 유혹을 느끼게 하는 김장우. 그리고 엄마의 일란성 쌍둥이 동생인 이모의 심심한 사람이자 자신이 원하는 삶에 가족들을 맞출 수 있도록 꼼꼼하고 다정하게 자로 잰 듯이 설계하는 겉보기에는 꽤 그럴싸한 이모부처럼 모든 것을 알아서 준비하는 손댈 것 하나없이 필요한 건 ‘안진진’의 마음뿐인 나영규.(안진진의 시선으로 들어가 삶의 갑갑함을 주는 포인트로 이 둘을 묶어 봤지만 사실 내 시선으로 이모부와 나영규는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두 남자 간의 저울질이 부정적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녀에게 ‘결혼’이란 어쩌면 정말 전력투구 해야 하는 인생 최대의 중요한 기로, 행복과 불행의 그 길을 극명하게 갈라놓게 만드는 행위라 여겨졌을테니까. 자신의 부모님을 통해,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와 대비되는 삶을 사는 쌍둥이 동생 이모의 윤택한 환경 속 결혼생활을 들여다보며 일찍이 쓰리도록 체감하며 살아왔던 안진진이기 때문이다.(사실 이모와 그의 식구들에게는 당연히 고통은 없으리라 판단해 버린 안진진이다. 그들에게 불행한 삶은 어울리지 않아!!)


마음자리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겨서 거기로 가을 찬바람이 쉭쉭 드나들고 있었다 (P. 195)
그녀는 이 허한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거라고 생각했을까? 사랑으로 충만한 순간에서도 오롯이 그 사랑으로 감격하고, 안정감을 갖을 수 없게 만드는 그 이유 말이다. 김장우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던 그를 향한 사랑을 받아들인 그 순간 동시에 허무함을 느끼는 안진진. 이 모순됨이 혹시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가족애의 결여 때문은 아니였을까? 넉넉치 않은 살림과 결코 평범하지 않은 불행집단의 구성원인양 투박한 방식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사는 삶에서 저절로 녹아져내린 끈끈함 같은 거 말고...사실 책을 읽어 내려 갈수록 김장우에게서는 그의 형과 형수님을 향한 자기와 같은 애정을 안진진에게 요구하는 듯한 갑갑함이 느껴졌다. 그와 결혼하면 왠지 그녀의 어머니와 같은 삶을 그대로 물려받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선택은 그녀의 몫이다.


사랑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다 거짓이었다. 사랑은 바다만큼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P. 199)
˝ 낯설어 죽겠단 말야. 왜 그렇지? 장우씨는 알아? 갑자기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무서워. 사는법을 잊어버렸다구요. 사랑하면 이렇게 세상이 낯선거냐고.“ (P. 202)
여기에서 잠시 더 읽어나가기를 멈추고 안진진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려 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청춘의 나이답게 보통의 여자들처럼 애틋한 마음이 담긴 그 사랑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 그러자 그녀의 지나온 삶과 그녀의 가족들이 떠올려졌다. 안진진에게 사랑이란 낯선 것이었다.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어 그 사랑이 내 몫이 아닌 것만 같은 조바심이 있진 않았을까? 나는 저자가 담아내고 싶은 이야기, 들려주고픈 이야기들 속에서도 안진진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자꾸만 그녀의 애달픈 현실에서 오는 감정에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그 이유는 뭘까 생각해봤다. 이 책 속에서 ‘안진진’이 가족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알려줄만한 대화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어떤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것일까? (남동생과 얕게 나누는 대화가 있었지만 누나의 이야기가 핵심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현재 연애 상황의 그렇고 그런 얘기를 들려 줄 목적을 띈, 그 정도 쯤이였다) 그렇기에 난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주고 싶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다.


거리를 뒤덮은 휘황한 네온사인과 들떠있는 인파들의 무리 속에서 이모와 나는 서로를 읽어버리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팔짱을 풀지 않았다. 이모에게서 풍겨오는 아련한 향수냄새, 이모의 모직코트가 주는 푹신한 감촉, 따뜻한 이모의 체온과 함께하는 겨울밤은 참 좋았다. (P. 225)
안진진이 이모를 만날때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엄마’로 인해 원치 않은 서글픔과 초라한 기억들이 그녀를 쓴웃음 짓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난 그녀가 이모와 함께 있는 순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이보다 성숙해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준 처연함을 걸친 그녀가 그 나이 또래의 발랄함이 아주 조금은 묻어나오는 듯 심적으로 평온해지고 안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모는 안진진의 엄마가 아니다. 그녀는 가족에게 받는 따뜻한 품이 그리운 채로 살아갔을 것.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가며 간절한 인생의 길잡이가 필요했을 어머니에게는 곤경에 처할때마다 그 목마른 갈증을 조금이나 해소 시켜줄 수 있었던 것이 ‘책’이었을까? 하루하루의 일상이 팍팍하고 고단하여 나름의 대피처로 ‘책’을 삼고 이 현실이 보다 더 나아지길 바라는 간절함이었던 것일까.
불행을 과장하며 그 속에서도 새 건전지를 갈아 끼워놓은 인형처럼 활력을 얻는 어머니,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고통없는 삶을 살며 대신에 지루함을 얻은 이모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선택 등 이 책은 계속해서 모순을 담아내고 있다.


자신이 택한 삶이라기보다는 삶으로부터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을 살아왔던 안진진. 모순되지만 고단하고 모진 삶을 받아들이는 어머니로부터 ‘긍정’을 물려받은 듯이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야했을 그녀가(거듭된 혼란이 있었을지언정)내린 최종 결정에 난 솔직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삶이 조용할 날 없이 혼란스러운 이들에게 행복이자 바라는 것이라면 그저 평화로운 보통의 삶(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일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움과 맞바꾼 화려함 속에 사는 이들에게는 내 의지대로 결정하는 삶과 지루한 삶을 없애주는 자극을 원할 수도 있다. 우리들은 삶과 공존하는 모순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직면하는 그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감내하고 긍정을 끌어내서 다시 행복을 찾아 분투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말 그대로 모순되지만 아픔을 겪으며 얻게 되는 뜻하지 않은 인생의 기쁨도 있지 않은가.


등장하는 인물들의 결정들이 다소 이해가 안 될 때가 분명 있긴 했지만 그들의 현실과 입장에서 바라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삶의 모순 그 자체를 부정적인 시선보다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긍정’을 많이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가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과 택할 수 밖에 없는 것들 안에서의 양가감정을 느껴보며 모순 덩어리인 나 자신의 삶도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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