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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어르신과 햇살에 데워져 따뜻한 숨을 품고 있는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본다. 눈앞에 산과 들은 초록초록 신록의 물결로 넘실거린다. 살랑이는 바람에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를 얹어보고 눈부신 풍경 속에서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위로하듯 서로의 침묵에 기대어본다. 어르신은 말씀이 없으시고, 나 또한 굳이 말을 보태지 않는다. 말 대신 나누는 침묵 속에서 숨을 고요히 맞춰본다.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펼치자,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그녀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위로가 어떠하였는가를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가장 깊은 위로를 건네는 것은 결국 바람과 나무와 흙이라는 듯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며 나의 오래 묵은 마음도 겨울을 벗어본다.
믿음과 기회를 잃은 채 얼어붙은 희망 속에서 성장이 멎어 버린 듯했던 한 소녀가 세월이 흘러 삶의 소소한 즐거움의 놀이터가 되어주는 작은 마당을 가꾸며 맨손으로 흙을 주무른다. 손톱 밑이 까맣게 물든 자기 손을 들여다보며, 며칠만 이 흙을 간직하면 열 손가락 끝에서 푸릇한 싹이 돋아나지 않겠느냐고 엉뚱한 상상을 하는 나이 든 여인에 이르기까지의 긴 세월. 저 멀리 산등성이에 겹겹이 쌓인 초록의 결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나는 따뜻한 빛을 가만히 받아들이듯 그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우리 할머니였다면 옆구리 쿡 찔러서 눈치 한번 쓱 주고 싶을 만큼 솔직하면서도 통통 튀는 매력을 지닌 분께서 이곳저곳 뚫고 올라오는 잡초를 매일 뽑아내며 몸을 쓰는 동안, 평생 이고 지고 살아온 수만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얼마나 세차게 소용돌이쳤을까. 우리 외할머니도 꽃과 식물을 유난히 사랑하셔서 정원을 곱게 가꾸는 분이신데, 안부 전화를 드릴 때마다 늘 무언가를 뽑고 계신다. 애당초 쇠심줄 같은 고집을 꺾을 생각조차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니, 허리 아픈데 그만 쉬시라고 하면 “뽑는 동안에는 안 아프다”라고만 하신다. 아마도 잡초를 뽑는다는 것은 단지 풀을 솎아 내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 응어리를 하나씩 드러내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잡초라도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손길을 쉽게 말릴 수 없다.
그동안 내가 읽어온 박완서 작가의 작품들은 대체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건네받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경청하는 이의 마음에 가까웠다면, 이 책은 조금 달랐다. 나 역시 이야기 속에 슬며시 발을 들여, 한 마디쯤 보태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이 책에 담긴 몇 편의 영화에 대한 짤막한 감상과 그녀에게 영향을 준 여러 권의 책 이야기 덕분에 거리감이 좁혀져서인 것 아닐까 싶다. 생각지도 않게 평소 관심을 두고 있던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 불쑥 등장하여 반가운 마음이 앞서 장바구니에 슬며시 담고, 언젠가 그 책을 펼쳐 들었을 때 그때의 나는 또 어떤 감상을 얻게 될지 궁금해지면서 잠시 생각은 삼천포로 빠지기도 했다. 실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책 구경만 또 실컷 했지만, 그마저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지금의 젊음을 당연하게 여기며 건방을 떠는 나 역시, 시간이 흐르면 번화가의 화려한 불빛이 그저 어지럽게만 느껴질 날이 올 것이고, 목적지를 잃은 사람처럼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는 순간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이 두렵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시간은 무언가를 빼앗아 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믿는 방향 감각은 어쩌면 상처를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얻는 또 하나의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걸 일러주는 박완서 작가의 단단함과, 사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살맛 나는 순간들이 조용히 곁을 내주고, 쉬엄쉬엄, 편안한 호흡으로 읽히도록 이끈다. 저자의 책을 하나 둘 야금야금 읽어왔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한다기보다는 어떤 문장에서 나의 마음이 붙들릴지, 어느 대목에서 오래 묵은 생각이 조용히 흔들릴지 그저 천천히 받아들이고만 싶을 뿐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어르신과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다 읽고 난 지금은 마치 만개한 꽃으로 가득한 마당에 나와 있는 것처럼 마음 한편이 포근하다.
외침으로써 위로받고 치유받고 싶었다. (p.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