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 - 상상의 힘으로 근대 유럽을 건설한 19세기의 공학 천재
데이비드 하비 지음, 이현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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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유럽으로 휴가를 갔다. 그때 처음으로 파리에 가보았다. 트로카데로 광장에 위치한 에펠탑이 처음 먹어본 달팽이요리 만큼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 광장엔 사람들이 분수에 들어가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겨울에는 줄어들고 여름에는 늘어나 그 길이를 평균적으로만 알 수 있는  에펠탑이 보였다 .

주로 석탑을  보았기에  그 철골 구조물은 몹시도 낯설었다 . 하지만 나중에 텔레비전이나 여느 자료에서 에펠탑을 보면 아! 나, 저거 프랑스에서 보았는데, 하는 반가움이 일어났다 .

이렇게 에펠탑에 대한 미미한 지식만 가진 채 이 책을 읽었지만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다. 그때 탑 위에 올라갔을 때가 기억난다 .난생 처음 보는 유럽, 그냥   멋있다고 밖에 표현 못했던 파리의 광경, 세느강이 보였다 . 약 119년 전에 그토록이나 웅장하고 높은 탑을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에펠탑을 만든 에펠은 사실 프랑스계의 사람이 아니고 독일계 사람이다. 18세기 초 그의 고조할아버지 장 르네 베리카우젠이 독일 마르만 지방에서 출생했고 그는 파리에 정착한 이후 자신의 고향 이름인 에펠을 본 따 자신의 성을 에펠로 쓰기 시작했다.

1832년 12월15일 구스타프 에펠이 태어났다. 그가 자라서 학교에 다닐 무렵 어린 에펠은 상상하기는 좋아했지만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그 대신 수학의 실용적 가치에 눈을 뜨고 과학과 문학에서 대학입학 자격을 얻었다. 에펠은 콜라주셍테 파르주에서 2년 동안 공부했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중앙 공예 학교에 진학했다. 거기서 그는 야금술 기계학 토목공학을 배우며 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나중에 나트륨화합물, 아연, 린넨처리과정등 다양한 과목을 추가로 배우고 주철사업 기술을 배웠다. 1855년 대학을 졸업하고 만국박람회를 본 다음 철에 대해 눈을 떴다.

철은 지구상에서 4번째로 흔한 원소다. 철은 기원전 6세기 무렵 중국에서 처음 생산되었으며 1500년경 유럽에 전해졌다. 주철은 목탄으로 땐 제련 고로에서 광석과 석회암을 감소시킴으로서 만들어진다. 에펠은 철을 이용해서 예술과 산업이 결합된 건조물을 설계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에펠을 위대한 에펠탑의 건설자로 기억하지만 그가 처음 만든 것은 철교교량으로 ‘철의 마법사’ 로 첫발을 내딛었다.

구스타브 에펠은 철을 이용해 '에펠탑'을 지어 이제는 특이한  파리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 그는 유럽 각지의 수많은 철교를 건설하는 걸로 예술과 기술을 결합시킨 건축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  그는 철교를 건설한 경험을 토대로 '자유의 여신상' 내부설계와 파나마 운하 건설에도 참여했다.

천재 공학자 에펠은 험난한 인생역정을 걸었다 . 아내는 다섯 아이를 남기고 병으로 일찍 죽었고 그는 끝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웬일일까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는데 따르는 여자가 없었던 걸까 ?어쟀든 그랬기에  아이들은 여동생이 키워주다시피 했다 . 그는 가족애가 강한 인물이었다 .




그는 늘  인간관계에서  고뇌를 느꼈고  작업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 .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갖가지 투쟁도 벌였다 .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하비는 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근대 유럽의 역사를 배경으로 천재공학자의 일대기를 철저하고도 많은 자료를 통해 기술했다 .

근대 유럽의 정치와 문화적 상황뿐만 아니라  경제, 외교까지도 나온다 .  근대 건축을 바라보는 문화계 여러 명사들의 여러 가지 반응과 사람됨도  잘 표현했다 . 프랑스의 미술, 문학, 음악계의 유명 인사들로 구성된 3백인 위원회는 '예술 대 산업'논쟁에 거센 불을 붙였다. '건축가 대 공학자' 또는 '돌 대 철'이라는 이 논쟁은 곧 네오파로크풍의 파리 오페라극장의 설계자 샤를 가르니에와 구스타브 에펠 간의 공격으로 축소되었다.




-샤를 가르니에는 니스 천문대 공사에서 에펠과 사이좋게 작업했던 건축가였지만 에펠탑 반대 운동의 주동자가 된 것이다. 가르니에의 관점에서 철은 쓸모가 있긴 하지만 결코 그 어떤 '예술적'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철은 건방지고 무미건조하고 저속하여 수단은 될지언정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석조 외관이 갖는 고전적인 아름다움과는 본질적으로 조화된 수 없는 공격적인 재료였던 것이다. - 본문 139쪽에서




이렇게 에펠은 건축과 예술을 결합시켜 근대에 보기 드문 역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 우리나라 탑을 생각하면  에펠탑은 에펠뿐만 아니라 프랑스사람들의 창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 만일 우리나라에 ‘아무개탑’ 이라는 걸 만들어서 세운다면 사람들이  좀 말이 많을 것인가 ? 말하자면 발상의 전환이다 . 우리나라는 전통은 소중하게 여기지만 근대 건축물은 아파트 말고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보인다 . 지금 세워지는 건물 가운데 100년 지나서  재건축을 안 하고 문화유산으로 남길만한 건물은 무엇이 있을까 ? 그런 걸 생각해보면 석조탑도 아닌  철골탑을 허용하고 그걸 수도에 설치한 사람들이 대단한 것 같다 .




나는  건축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른다 .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교량건축이건 철골탑 건축이건 가장 중요한 건 창의성이라고 본다 .  창의성이 선행한다면 우리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 . 우리가 선입견과 편견에 가득 차서 생활하는 한 새로운 것은  탄생할 수가 없다 .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건 창의성이 빛난 에펠과 그걸 인정해준 프랑스인들의 지혜로운 안목이다 .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에펠탑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는  미지수이지만 에펠의 창의성만은 영원히 가치 있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




서머셋 모옴은 에텔탑이 보기가 싫어 그 안에서 식사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파리 시내  어딜 가도 보일만큼 높이 세워져 있는 에펠탑.

구스타프 에펠은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프랑스 사람들의 상징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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