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계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
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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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지식에 대한 열정.

젊은이들의 비밀모임.

디오니소스의 절정에 대한 호기심.

아스라한 작가사진에 대한 호감.

언뜻 언젠가 초등학교 때 몰래 빌려보았던 호러영화의 스토리인데. 글로 표현하는 수준은 마치 카이스트 드라마의 인물들을 빌려와 헐리우드에서 세트장을 만들고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메가폰을 쥔 형상이다.

젊을 때는 그렇지. 다른 사람과는 아주 다르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지. 지식에 광폭하게 자신을 몰아가고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고 싶어하는 이들은 그렇지. 라고 뭔가에 계속 공감하게 된다. 나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들인데도 그들의 금지된 로망에 대해서는 뭔가 동화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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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매니지먼트
피터 드러커 지음, 남상진 옮김 / 청림출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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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목적만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사람을 나는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그게 이익으로 언제나 결부되는 판단이었기에 좀 안타깝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차가운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나는 자본주의사회에 맞지 않는 인간형같아서 그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드러커 할아버지는 이 책에서 그와는 약간 다른 정신적인 목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목적이 이윤에 있다고 대답한다. 우리가 배워온 사회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있지 않은가. 하지만 드러커는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윤이란 기업 활동의 목적이 아닌 '조건'이라며. 

"기업의 목적은 기업 외부에 있다. 기업은 사회에 속한 기관이며 그 목적 역시 사회에서 찾아야 한다.기업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고객이다. 고객이야말로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매기고, 경제적 자원을 부로, 자원을 제품으로 바꾸는 유일한 객체다. 고객이 구입하는 것은 제품과 서비스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제공하는 효용이다.

...

이렇듯 기업의 목적은 단 한가지, 고객을 창조하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란 것이 대단한 게 아 다르고 어 다르지 않은가. 인적자원에 대해 '효용'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관계'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다른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

한가지 더 마음에 들었던 점은.

기업을 총괄하는 매니저는 '명령하는 자'가 아닌 '책임을 지는 자'라며 무엇보다 '공헌하는 책임'에 그 의의가 있다고 정의하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이 있기에 나는 그다지 매니저가 될만한 재목이 될 사람이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매니저들은 헌신하는 마인드의 가치에 대해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하지만 나는 항상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은 그게 두렵기도 하다. 어떤 조직에 헌신을 다했는데 배반 당하거나 나의 열정만 빼앗길까봐. 웃긴 배반의 노파심을 갖고 있다. 나는.

결코 열정은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 어디에서도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다.

또 다른 이야기.

조직의 목적은 평범한 사람으로 하여금 비범한 일을 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한다.

천재는 드물기 때문에 이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고, 결국 보통사람이 자신의 강점을 살려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좋은 조직인지 나쁜 조직인지가 가려진다.

그런 의미의 조직을 만드는 일이 매니저에게는 가장 힘든 일일 것이다.

그 동기부여의 힘. 매니저의 정신에 있다고 말하는 근본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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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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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했었다.

개고기에 대한 정치적인 소신을 더욱 굳히기 위해 다른 어떤 두 눈을 가진 동물의 고기는 먹지 않겠다는 의미에서였다. 허나 한국이라는 땅에서 채식주의자는 유난떠는 싸이코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았고 채식주의자를 위한 어떤 배려도, 사유도, 메뉴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고집은 지금보다 덜했기 때문일까. 결국은 채식을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육식에 대한 만들어진 본능 때문이었다. 나는 육식을 누구보다 즐긴다. 그것은 마치 내 살을 씹고 있는 듯한 만족감 때문이다. 자학적인 육식습관은 몸에서 독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나로서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육식이 좋은 것이고 맛있는 체험이라는 것은 세뇌된 것이다.

채식을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나를 식민화시키는 모든 것들로 부터 도망쳐야 가능하다. 그들은 아직도 나에게 침투해 들어와 자신들이 문명인임을 자처하며 자신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지녀온 나를 멋대로 야만이라거나 비합리적이라고 낙인찍는 오만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 오만때문에 이렇게 식민화되었고 결국 채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정신세계를 그들의 상업주의와 패권주의로 황폐화시켰다.

채식은 식민화된 나에게 이미 이상이다.

그리고 이 책도 나에게는 이상일 뿐이었던 것 같다. 우연히 어디에선가 읽었던 단편을 모아놓았네. 왜 신간인줄 알았던걸가. 에이 내가 바보다. 흣. 소설집이 다 그런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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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채식주의자> 중에서....

왜 나는 놀라지 않았을까. 오히려 더욱 침착해졌어. 마치 서늘한 손이 내 이마를 짚어준 것 같았어.

다음날 새벽이었어. 헛간 속의 피웅덩이, 거기에 비친 얼굴을 처음 본건.

꿈에 누군가의 목을 자를 때, 끝까지 잘리지 않아 덜렁거리는 머리채를 잡고 마저 칼질을 할 때, 미끌미끌한 안구를 손바닥에 올려 놓을 때, 그러다 꺠어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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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패지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데.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동네를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나는 꼼짝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희번득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목에 걸린 줄에서 피가 흘러. 목이 아파 낑낑대며, 개는 질질 끌리며 달려.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섞인 피. 번쩍이는 두 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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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루시다 - 열화당미술선서 56
롤랑 바르트 지음, 조광희 외 옮김 / 열화당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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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절판됐다는 소식을 들은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






 

 

사진이 재현하고 시키는 무수한 것들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즉 사진은 실존적으로 다시는 되풀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기계적으로 재생시킨다. 절대적인 '특수성', 불투명한 최고의 '우연성',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다. 

 

도처에 사진은 있다. 바야흐로 이미지의 홍수 시대, 잘 다듬어진 육체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건강미가 시선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재빨리 폐기처분된다. 한 번 반짝하기 위해 별[스타]들은 존재한다. 스타는 가고 사진은 남는 다. 난 너의 사진을 꼭 한 장만 가지고 싶다. 추억은 말해지지 않은 여백 속에서 부글거리는 법이므로. 그러나 완벽한 한 여백은 공포다. 대체로 어떤 흔적이라도 남겨야 안심하는 이 좁상한 속내를 나는 모른다. 그 흔적 속에 영원히 과거의 시간들을 봉인하고 말겠다는 착각. 그러나 누가 시간속에 훌훌 손을 털고 모습도 없이 석양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이 황량한 사막에서 어떤 사진은 갑자기 나에게 찾아와 나를 흥분시키고, 또 나는 그 사진을 흥분시킨다. 그러므로 내가 사진을 존재케 하는 매력을 열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방식에 의해서이다. 즉 그것은 흥분시키기다. 사진 그 자체는 조금도 흥분되지 않지만, 그러나 사진은 나를 흥분시킨다. 이것이 바로 모든 모험의 행위이다. 

 

너는 나를 달뜨게 한다. 나는 너로 하여 조금 더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나를 벗어나려고 하는 모험의 순간이다. 너는 좋은 음악이고 사진이며 좋은 詩이며 젖가슴이다. 나는 너를 보고 너를 듣는다. 나는 나를 벗어났다가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담배 한 대를 문다. 좋은 것들은 나를 벗어나게 한다. 나는 확장된다. 아주 느슨하게. 



 어떤 하찮은 것들이 나를 '찌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사진가에 의해 그것들이 의도적으로 그곳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관심을 끄는 하찮은 세부는 적어도 엄격한 의미에서 의도적이지 않으며, 아마 의도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촬영된 대상의 영역에 필연적이고 무상적(無償的)인 덧붙임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하찮은 세부가 온통, 사진에 관한 나의 시선을 흥분시킨다. 그것은 나의 관심의 격렬한 변화, 하나의 섬광이다. 그 어떤 것의 표지에 의해, 사진은 이미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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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옛날 사진은 나를 감동시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전부터 살고 싶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알 수 없는 뿌리를 따라 나의 내부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풍토의 열기인가? 지중해의 신화인가?.나는 그곳에서 청아하게 살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풍경사진은 그곳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주어야 한다. 이 거주의 욕망을 잘 관찰해 보면, 몽환적인 것도 경험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환상적이며 나를 앞으로 데려가는 듯이 보이는 일종의 투시력에 속한다. 그러나 내 자신도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여행에의 초대>와 <전생>에서 노래한 이중의 움직임이다. 이 열애의 감정이 솟는 풍경 앞에서 마치 나는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혹은 가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육체에 관해, "우리가 그곳에 있었음을 그토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장소는 없다"고 말한다. 남몰래 나의 마음 속에 다시 '어머니'를 되살아나게 하는 것, 바로 그러한 것이 (욕망이 선택한) 풍경의 본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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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사진을 얌전하게 만들려 하고,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하려는 광기를 진정시키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사회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번째 방법은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인데, 왜냐하면 예술은 결코 광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얌전하게 만드는 또다른 방법은 일반화시키고 군생(群生)시켜 진부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 앞에 다만 영상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광기 자체가 예술인 적은 없었다. 현실 자체가 예술인 적도 없었다. 현실을 변형하는 어떤 왜곡의 힘에 의해서 현실은 비로소 예술이란 이름을 얻지만 광기가 살균된 예술은 과연 떳떳한가. 광기를 거세하고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든지, 이미지를 버리고 현실의 광기를 보여주든지 그 어떤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선택은 오로지 셔터를 누르는 당신의 손가락 안에 있다. 그 손가락이 자주 떨리기를! 나는 그런 망설임만을 신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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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 백의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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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는 유혹이 여성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말한다. 혹자들은 여성들이 섹시함을 강조하면 그것이 여성이 성적행위를 주도적으로 끌고 나간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저 남자들의 성적요구에 놀아나는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드리야르는 여성이 지금까지 세상의 은근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유혹이라는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여성이라는 동물의 한 종류에 대해 참으로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우선 여성이기도 하며, 여성은 남성보다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며 내가 추구하는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나의 취향은 단연 여성성을 좋아한다. 성적으로 끌리지는 않지만 시각으로 즐기는 것은 남성보단 여성이 즐겁다. 그래도 내가 여성에게 접근하지 않는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되고 세뇌된 이성중심주의의 연애관과 내가 양성애자가 되었을 때 잃을 만한 그 많은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양성애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여자를 사랑하면 내가 가진 여성성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성성에 흠이라도 난다면 나는 손해를 볼 것이다. 난 여성성을 이중적으로 사랑한다.

 

그렇다면 보드리야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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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은 본능의 차원에 속하지 않고 기교의 차원에 속한다.

즉, 유혹은 에너지의 차원에 소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와 의례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유혹은 늘 신의 질서를 파괴하려 한다.- 설사 그것이 생산의 질서나 욕망의 질서가 되었다 할 지라도 말이다.

 

모든 정통성의 입장에서 보면, 유혹은 언제나 마법이고 기교이다.

 

성해방의 단계는 성을 확정할 수 없는 단계이다. 이제는 더 이상 결핍도, 금기도, 한계도 없다. 이는 모든 준거원칙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경제 논리는 결핍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다. 만약 결핍이라는 망령을 없애버린다는 자신의 목표가 달성되면, 이 논리는 사라지게 된다. 욕망 역시 결핍에 의해서만 지속된다. 욕망이 완전히 요구로 바뀌면, 다시 말해 욕망이 전면적으로 작동하면, 상상계를 상실한 욕망은 실재성이 없게된다. 욕망은 어디에나 있지만 일반화되고 있는 모사 속에 있다. 성 역시 어디에나 있지만, 성욕 속에는 없다.

 

성과 권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는 정신분석으로서는 알 수 없는 방법인데(정신분석의 이론체계는 성적인 것이므로) 이 방법은 남성/여성의 대립을 넘어서 이해되는 여성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대립은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것이고 성적인 궁극목적을 지니기 때문이며 또한 대립의 구조가 계속 존속하면 무너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혹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은 표지가 있는 항도 표지가 없는 항도 아니다. 예전에 자신이 상실했을지도 모르는 욕망이나 쾌락의 '자율성', 육체의 자율성, 말이나 글쓰기의 자율성을 역시 회복하지 못한다. 어쩌면 여성은 자신의 진실을 찾지 못한 채 유혹한다.

 

오직 유혹만이 운명으로서의 해부학에 철저하게 대립된다. 오직 유혹만이 육체에 독특한 성적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 성적의미로 부터 기인하는 불가피한 남근적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

 

유혹은 매우 지적인 것이다. 유혹은 섬광같은 확실성을 지니고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까닭에 더욱 그러하다.

 

여성은 결코 지배되지 않았으며, 언제나 지배자였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성과 모든 권력을 가로지르는 형태로서의 여성이자, 무성의 은밀하고 신랄한 형태로서의 여성이었다. 요컨대 그 피해가 오늘날 성의 모든 범위에서 느껴질 수 있는 도전으로서의 여성이었다.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바로 이 도전, 유혹의 도전이 아니었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남성은 잔류적인 존재, 부차적이고 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따라서 남성은 방어수단과 제도와 책략의 도움으로 자신을 지켜나가야 했다.

 

그리하여 여성이 유일한 성이며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초인간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요컨대 남자들이 그들의 권력과 제도를 확립하는 것은 여자의 타고난 우월적 권력을 거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주된 원인은 남근에 대한 선망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여자의 수태능력에 대한 남자의 질투이다.

 

배제된 형태가 지배적인 형태를 물리치고 은밀히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요컨대 유혹적인 형태가 생산적인 형태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여성성은 광기와 같은 쪽에 있다. 광기가 정상화되어야 하는(그 중에서도 무엇보다도 무의식이라는 가정에 힘입어) 이유는 광기가 은밀히 승리를 거두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성이 시대에 맞게 바뀌고 정상화되어야 하는 (특히 성 해방 속에서) 이유도 여성성이 은밀히 승리를 거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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