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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절판됐다는 소식을 들은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

사진이 재현하고 시키는 무수한 것들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즉 사진은 실존적으로 다시는 되풀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기계적으로 재생시킨다. 절대적인 '특수성', 불투명한 최고의 '우연성',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다.
도처에 사진은 있다. 바야흐로 이미지의 홍수 시대, 잘 다듬어진 육체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건강미가 시선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재빨리 폐기처분된다. 한 번 반짝하기 위해 별[스타]들은 존재한다. 스타는 가고 사진은 남는 다. 난 너의 사진을 꼭 한 장만 가지고 싶다. 추억은 말해지지 않은 여백 속에서 부글거리는 법이므로. 그러나 완벽한 한 여백은 공포다. 대체로 어떤 흔적이라도 남겨야 안심하는 이 좁상한 속내를 나는 모른다. 그 흔적 속에 영원히 과거의 시간들을 봉인하고 말겠다는 착각. 그러나 누가 시간속에 훌훌 손을 털고 모습도 없이 석양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이 황량한 사막에서 어떤 사진은 갑자기 나에게 찾아와 나를 흥분시키고, 또 나는 그 사진을 흥분시킨다. 그러므로 내가 사진을 존재케 하는 매력을 열거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방식에 의해서이다. 즉 그것은 흥분시키기다. 사진 그 자체는 조금도 흥분되지 않지만, 그러나 사진은 나를 흥분시킨다. 이것이 바로 모든 모험의 행위이다.
너는 나를 달뜨게 한다. 나는 너로 하여 조금 더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나를 벗어나려고 하는 모험의 순간이다. 너는 좋은 음악이고 사진이며 좋은 詩이며 젖가슴이다. 나는 너를 보고 너를 듣는다. 나는 나를 벗어났다가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담배 한 대를 문다. 좋은 것들은 나를 벗어나게 한다. 나는 확장된다. 아주 느슨하게.
어떤 하찮은 것들이 나를 '찌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사진가에 의해 그것들이 의도적으로 그곳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관심을 끄는 하찮은 세부는 적어도 엄격한 의미에서 의도적이지 않으며, 아마 의도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촬영된 대상의 영역에 필연적이고 무상적(無償的)인 덧붙임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하찮은 세부가 온통, 사진에 관한 나의 시선을 흥분시킨다. 그것은 나의 관심의 격렬한 변화, 하나의 섬광이다. 그 어떤 것의 표지에 의해, 사진은 이미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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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옛날 사진은 나를 감동시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전부터 살고 싶었던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알 수 없는 뿌리를 따라 나의 내부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풍토의 열기인가? 지중해의 신화인가?.나는 그곳에서 청아하게 살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풍경사진은 그곳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주어야 한다. 이 거주의 욕망을 잘 관찰해 보면, 몽환적인 것도 경험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환상적이며 나를 앞으로 데려가는 듯이 보이는 일종의 투시력에 속한다. 그러나 내 자신도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여행에의 초대>와 <전생>에서 노래한 이중의 움직임이다. 이 열애의 감정이 솟는 풍경 앞에서 마치 나는 그곳에 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혹은 가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어머니의 육체에 관해, "우리가 그곳에 있었음을 그토록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다른 장소는 없다"고 말한다. 남몰래 나의 마음 속에 다시 '어머니'를 되살아나게 하는 것, 바로 그러한 것이 (욕망이 선택한) 풍경의 본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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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사진을 얌전하게 만들려 하고,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끊임없이 폭발하려는 광기를 진정시키려고 애쓴다.
이를 위해 사회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번째 방법은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 인데, 왜냐하면 예술은 결코 광기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얌전하게 만드는 또다른 방법은 일반화시키고 군생(群生)시켜 진부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 앞에 다만 영상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광기 자체가 예술인 적은 없었다. 현실 자체가 예술인 적도 없었다. 현실을 변형하는 어떤 왜곡의 힘에 의해서 현실은 비로소 예술이란 이름을 얻지만 광기가 살균된 예술은 과연 떳떳한가. 광기를 거세하고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든지, 이미지를 버리고 현실의 광기를 보여주든지 그 어떤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선택은 오로지 셔터를 누르는 당신의 손가락 안에 있다. 그 손가락이 자주 떨리기를! 나는 그런 망설임만을 신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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