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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의 기도
오노 마사쓰구 지음, 양억관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5월
평점 :
아픈 사람들이 나 보다 더 아픈(혹은 아파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위로 받고 나아가는 이야기 <9년 전의 기도>. 인생은 곳곳에 시련이 도사리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익숙하고 안락한 자궁에서 생경한 빛과 공기의 마찰에 자지러지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삶을 대면한다. 본능을 표출할 자유를 부여 받은 신생아 때를 거치고 어른이 된 사람들은 비명 같은 울음을 삼키며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소설 첫 머리에 등장하는 사나에는 시작부터 가라앉은 심경으로 주변의 소리를 굴절시킨다. 정신이 건강한 상태라면 그 어떤 삐뚤어진 얘기들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삶에 치일 대로 치여 지쳐버린 사나에에게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가슴에 사무친다. 드러내지 않기에 혼자 감당해야 할 고통만 커져버려 현재가 고통스럽다. 그런 사나에에게 밋짱 아들의 문병 가는 길은 9년 전의 행로와 겹쳐 위로로 다가온다. 듣기로는 밋짱 역시 순탄치 않은 삶이건만 묵묵히 기도하며 차분히 할 일을 해 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사나에는 자신의 처지를 오버랩 시켜 치유 받는다.
이 소설은 연작이라 생각지 못한 인물들의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대단치도 않은 인생들이지만 원래의 우리 모습들이기에 편안하면서도 사실적이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울적하다. 그럼에도 그 상처받은 아픈 사람들이 서로에 기대 위로 하고 치유 받으며 나아가는 과정에 함께 동화된다. 나도 사연이 있고, 당신도 사연이 있다. 아픈 사람들이지만 각기 다른 이유로 그 상처들을 감추고 살아간다. 자존심이 상해서, 부담주기 싫어서. 모든 걸 오픈 하기엔 가벼워 보일 까봐.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일수록 더 말을 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런 때 내게 극약처방이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아픈 소설을 읽는 것. 아픈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고 아픈 걸 슬퍼할 필요도 없다. 아픈 건 그냥 짜증나는 일일 뿐.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다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성장하기 위해 다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초연해 지고 삶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어져있는 것 처럼 잔잔한 수면의 유화로 표지를 장식했다. 저 멀리 보이는 섬의 원래 몸체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게. 구름이 겹겹이 쌓여 사람들의 이야기가 겹친 것 처럼. 보이지 않은 수면 아래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수채화가 아니다 보니 안에 작가가 원래 뭘 그렸더라도 알 수가 없다. <9년 전의 기도>는 그렇게 사나에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소설 초반에 나오는 다이코에 이르기 까지 유화를 그렸던 과정을 역으로 보여주듯이 한 겹 한 겹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보면 볼수록 <9년 전의 기도>와 잘 어우러지는 표지 디자인이라 일러스트 작가도 궁금해진다. 작품을 읽고 그저 배경이 된 장소를 구현한 것일까? 아니면 내 생각 처럼 작품의 세계를 기법으로 드러낸 것일까?
오노 마사쓰구의 이력을 보면 파리8대학과 도쿄대학을 나와 현재 준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나다. 언어를 전공해서인지 <9년 전의 기도>에서 언어의 풍미가 깊이 우러난다. 이 부분은 작가의 역량도 역량이거니와 양억관 선생님이 번역을 했기 때문이겠지. <노르웨이의 숲>으로 처음 일본소설을 접했고 그 후로 일본소설에 심취하면서 양억관 선생님의 작품은 작가에 상관 없이 믿고 보게 된다. 이번에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보다, 양억관 선생님이 번역했다는 사실에 끌렸다. 그 어떤 훌륭한 작품도 번역가에 따라 감칠맛이 달라지는데 일본어를 모르는 나에게 이 정도의 번역서를 읽을 때면 글을 쓰려는 내가 한 없이 초라해진다. 하지만 곧 그럼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무소의뿔’은 처음 접하는 출판사지만 표지부터 내용까지 알차서 앞으로 주목 해볼 만 하다.(내가 식견이 부족해서 처음 접하는 것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