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경계
조정현 지음 / 도모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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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인수대비 라인으로는 이미 무수한 드라마, 영화, 소설이 나와있지만 그 앞서 그들의 배경에 대해서는 따로 접한 작품이 없다.

인수대비가 궁에 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 한확의 외교능력이 뛰어나서라는 것도 알고 그 집안에서 보낸 공녀가 둘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공녀 모두가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배경까지는 몰랐다.

총애를 받으면 그저 좋은가 보다 했는데 이래서 범인과 비범인은 그 생각의 깊이가 다른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가면 한낭랑이 폐비 윤씨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보여지는데 앞날을 살핀 그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조언은 가슴 깊은 아픔과 함께 영민함이 느껴져 감탄 스럽고 가슴이 짠하다.

 

성정이 불 같고 냉정하다 하지만 한낭랑만큼 여린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평생 가족에게 정을 바라지 못한 때문인지 유모와 목단이 에게 의지하고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오라비의 손으로 공녀로 바쳐졌을 때 어떤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을지 나는 감히 그 참담한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마음은 그러할지언정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어찌하면 살겠냐 하니 거무는 또 얼마나 벙찌고 무서움을 느꼈을까.

나 역시 직접 보고 들었다면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래 난 남들이 무섭다 하는 사람들을 외롭게 보는 성격인지라 아마 실제로 봤다고 해도 그 말을 들었다면 안쓰러웠을 거다. 사랑을 바라야 하는 여인의 본성을 버린다면 살아있어도 그게 산 것인가?

봄이 왔으나 봄이 아니로구나.

온갖 아름다운 금은보화에 보기에도 먹음직한 산해진미를 눈 앞에 두고도 당장 일신의 안녕을 바래야 한다니....

보통 회사에도 역린에 대한 얘기를 종종 하지만 궁중의 여인들만큼 그 단어가 사무치진 않을 것 같다.

황제의 총애를 받기에 순간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여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을 당시에는 알 길이 없으니 말이다.

 

이 시대 사람이 아닌지 70~80년대의 낭만을 그리워하는 나로서는 과거의 은근한 내적 표현이 더없이 와 닿는다.

마음이 그대로 보여지는 지금도 매력 있지만 내게는 확실히 과거의 조심스러운 은은한 표현이 맞다.

한낭랑에 대한 묘사와 그녀의 말씨 행동 모두 가시 돋침부터 보이지만 그 안의 약한 모습이 더 부각되어 그녀의 아슬아슬한 삶과 그 삶을 살아가는 심정이 어땠을지 공감을 크게 한다.

 

아름다운 이를 그린 때문인가 문장 또한 수려하다.

진작 문학수첩 작가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작가라는 것은 알았지만 전작을 읽어본 적이 없기에 어떤 스타일의 글을 쓰는지 감이 없었는데 <화려한 소설>을 읽고 얼마나 고운 사람일지 짐작이 간다.

아마 감수성이 깊고 섬세한 사람일 테지.

단지 한규란, 계란 자매의 소재 만으로도 재미를 구사할 수 있을 것인데 공녀들의 다양한 입장을 녹여내며 우리 역사의 가슴 아픈 부분을 자연스레 환기시켰다.

 

단지 학술적으로 접했다면 그저 연도 순으로 인물의 구도를 접하고 금세 잊어버리겠지만 <화려한 경계>를 통해 이제 연산군, 인수대비, 폐비 윤씨 스토리에 한규란, 한계란 자매와 명과의 관계를 연결 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워낙 자국의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갖지는 못한 터라 중국의 계보에는 더욱 더 어리둥절 하였는데 <화려한 경계>는 주입식으로 빠른 암기를 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 하나하나 색을 입혀 우리에게 자연스레 보내주었다.

단지 황실의 화려함과 궁중의 암투만을 상상했었는데 조선 초 명나라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돕고 더불어 우리가 관심을 가졌어야 할 역사의 아픈 한 부분을 몰랐던 반성까지 이끌어내는 생각 이상의 책이었다.

치욕스런 역사야 부끄러우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신경 쓰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에 대해서는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싶다.

오늘을 살고 있지만 어제를 딛고 나아왔기에 어제를 무시할 수 없다.

잊고 싶지 않다.

지난 그들에게 신경을 쓰면서 현재의 상황에 맞게 혹 우리가 그와 같은 실수를 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분명 살펴 볼 일이다.

 

<화려한 경계>가 시리즈물이 아니라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얇은 책이 아님에도 금방 읽고 아쉬워했다.

조정현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가 커 당장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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