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한 명상 - 살아있음을 느끼는 35가지 힐링아트
박다위.강영희 지음 / 아니무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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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뉴스에 자살이 빈번하게 오르는데 사회에선 이제 경악하기 보다는 무기력하게 반응하고있다.

결코 유쾌한 주제는 될 수 없지만 우연한 사회현상으로 덮어두고 지나가기엔 그 파급을 무시할 수 없는만큼 정면으로 마주보고 원인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자살에 대한 명상>에 더 눈길이 간다.

무엇이 그토록 삶을 끝내게하는 원인이 되는지 그 충동적인 상황은 어떤지 일일이 나열하기엔 원인도, 상황도 방대하다.

주요원인이 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복잡하고 바쁜 현실 속에 소통이 단절된데서오는 소외감이나 답답함이 아닐까?

 

유서를 쓰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개인적으론 자살충동이 오는데는 뭔가 풀리지 못하는데대한 답답함과 억울함에서 누군가 '알아주기를'바라는 마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상황의 어려움에서 오는 힘든 입장을 알아주는 마음, 교감에 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억울함을 호소하고싶은 마음말이다.

 

고등학교시절의 윤리선생님은 엄마들의 수다를 귀찮다말고 잘 들어주라고 하셨다. 

아줌마수다라고 무시할게 아니라고.

예전에 비해 정신병원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경제적,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기도했지만 그 필요가 강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이웃간의 소통이 활발했던 예전엔 아줌마들의 얼큰한 수다로 딱히 전문수준의 정신적치유가 필요없었지만 지금같이 소통이 단절 된 시절에는 '들어주는' 사람이없어 그 역할을 정신과의사가 한다고 말이다.

 

또 대학교1학년 때 대중매체관련의 교양교수는 요즘엔 자기주장이 강해서 '듣는이'가 부족하다며 친구와 대화할 때 많이 '들어주라'고 했었다. 당시 강의에서 들은대로 평소 대화하는 것 보다 절반으로 내 목소리를 줄였더니 친구가 뭘 얘기하려는지 뭐가 문제인지가 보였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대화라고하지만 서로 얘기하고싶은 것을 얘기하고 듣고싶은 것을 들었던 것이다.

대화내용은 기억하지만 그 대화 이면까지 볼 수 있는 깊이를 가지는 시선이 부족했다는 사실에 그 후엔 아끼는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어주자했으나 역시 시간이 흐르며 무뎌졌던 스스로가 참 부끄럽다. 

 

유서가 아니면 그림으로라도 호소할 방법을 찾은 작가를보며 역시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은 사회와의 단절을 결심했지만 그만큼 강하게 그 안에 자신을 남기려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유서대신은 아니지만 사회생활 초기에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힙들고 답답한 마음을 말로 표현못한 갑갑증을 그림을 그리는 시간으로 보내며 후련함을 느꼈기 때문에 다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살에 대한 명상>을 보며 당시의 시간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쩌면 그림일기?

나의 비명을 토해놓은 캔버스였기 때문에 한편으론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남에게는 전이되지말고...나에게서 떠난 쓰레기들을 모아놓은 그저 새롭게 태어난 쓰레기통정도로 여겼었다.

 

박다위씨의 제한없는 터치와 그에 영감을 얻은 강영희씨의 시를 따라가다보면 한번쯤은 타인에겐 평범한 상황에서도 괴로움에 힘들어하던 시기가 오버랩되어 가슴이 답답해져올 수도 있다.

숨이 막힐법도 하지만 피하듯이 덮지않고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박다위씨의 마음또한 공감하게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들이 삶에대한 강한 의지를 일으켰다고 감히 생각한다.

 

요즘의 우리들은 참 일도 많아 바쁘고 힘들다.

그보다 우리들을 괴롭게하는건 참 외롭다는 것이다.

답답하고 힘듦을 누군가와 공유하고싶은데 소통에대한 통로가 막혀있다고 생각지말고 박다위씨처럼 그림으로 풀어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동아리활동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자살에 대한 명상>은 자살에 대한 강한 충동으로 그린 그림들과 그에 관한 시이지만

살아나갈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한 한 방편을 보여주고있다.

독자만의 자살을 극복할 수 있는'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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