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접한 소설들과는 형식이 많이 다른탓에 소설을 읽었다기 보다 연극을 관람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표지의 조각난 메탈재질과 뒤섞인 문장들은 <그대를 잃은 날부터>를 연극으로 막을 올렸을 때의 무대장치를 상상케 한다. 아닌게 아니라 한편의 연극을 본 느낌이라 책표지의 디자이너가 작가의 목소리를 잘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읽는 내내 특별한 무대장치 없는 연극을 객석에 홀로 앉아 보고있는 기분이었다. 작가는 나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앉아 관객으로 나와 함께 내 시선을 끌어주며 홀로 무대효과, 음향효과까지 여러 군데를 분신술로 소화해내고 있는 느낌... 매우 극적인 성격의 캐릭터를 설정하여 극적으로 상황을 연출해가고있지만 전반적으로 작가의 차분한 어조 때문인지 드라마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그래서 약간은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된 그들의 애정관계와 위기의 순간에서도 긴박함보다는 숨죽이고 그 다음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게 된다. 마치 정말로 연극을 관람중인 듯이. '화차'에서는 막 시작된 자본주의의 활성화로 깊이없는 이해로 발생하는 채무의 책임이 가족에게까지 번져 그 연결고리를 보여주었다면, <그대를 잃은 날부터>는 진이가 바로 그 채무의 주체가 된다. 채무관계에 대한 이해보다는 순간순간의 불안함과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도 그 부조리한 시스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점점 빠져들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괴물'의 세계에서 비주류 인생을 택한 준성에 의해 벗어나게 된다. 욕망의 세계에서 상처입고 스스로를 옭아메는 여자 진이. 그녀는 '자본주의'란 괴물에 삼켜지기 싫어 도망치지만 괴물의 세상 속에 발을 디디는 순간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한다. 필요이상으로 벽에 도배해 놓은 거울에서 그녀의 불안정하고 솔직해지지 못하는 일그러진 심리를 반영해준다. 거울을 보며 울고, 거울을 보며 욕망을 충족하러 가기위해 준비하고, 거울을 보며 충족된 욕망의 일회성 만족을 느끼며, 무수한 거울들 속에 반사적으로 비춰지는 빛의 산란은 본인을 온전히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마음과 어느 순간이나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느끼게 해준다. 준성은 '괴물'이 만들어낸 소비문화에 편승하지 못하는 성품으로 '괴물'과 대치선상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사소한 장소에서 사소하지않은 하루를 보낸 진이와의 만남으로 '괴물'과 맞서게된다. 그의 평범한 공간에 그녀가 들어오면서 그의 공간은 그녀의 세계로 도배가 된다. 진이가 자본주의 시스템에 점점 잠식되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면서도 끌려다니는 것과 같이 준성은 그런 진이에게서 점점 벗어나기 힘든 감정을 키워나간다. 자꾸 짜증날 정도로 준성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진이에 울화통이 터지고 음울해지는 탓에 꽤 긴시간을 들여 읽었다. 읽는 동안 기분을 전환할 목적으로 다른 도서도 병행해가며 읽었는데 역시나 그 음울함은 책을 덮을 때까지 지속되었을 정도.. 시공간의 뚜렷한 구분을 두지않고 화면을 보여주는 구성 탓에 약간은 붕~뜬 상태의 몽롱한 기분이 지속됐다.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작가가 표현하는 주인공들의 불안정함을 독자로서 온전히 느끼게하는 효과에 플러스 요인이 되었으니 이 경우는 오히려 일부러 설정한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의도적이라면 성공이라고 할 정도로) 진이의 억제하는 못하는 소비적 성향을 빼면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에 가감없는 표현을 이루었다. 어쩌면 이해하기 힘든 그녀의 행동패턴도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자본주의가 낳은 한 형태이니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이라할만하다. 작가는 비주류의 인생을 빌어 자본주의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의 어리석은 욕망에 대한 갈구에 대해 안타까움과 함께 호통을 치고 있다. 어째서 진이와 같이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마주보지 못하고 욕망으로 일그러진 부분만 보고 쫓아가는가? 스스로가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 주체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자본주의사회의 잔인함에 맹렬히 구타당하는 진이처럼 살고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된다. 스스로의 모습을 제대로 봐야한다. 많은 거울보다는 본인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거울 앞에 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