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지마 요시미츠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니체의 인간학”,“비사교적 사교성” 등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어디대학 교수라는데 지금도 재직하시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렇게 일본에서 지명도가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예를 들면 사사키 아타루 같은 철학자는 우리나라 신문지상에도 종종 등장하잖아요.- 저는 “일하기 싫은 사람을 위한 책”이란 책을 통해 이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사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께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먼 산을 바라보며 흔히 내뱉는 멘트가 있잖아요.

 

“그 날 이후로 내 인생이 바뀌었다”

 

예를 들면 박지성이 차범근 축구교실에 처음 참가한 날, 혹은 김연아가 처음 스케이트를 신은 날 같은 거겠죠.

먼저 “일하기 싫은 사람을 위한 책”을 소개하자면 제목과 달리 이 책은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가 아닙니다. 저자 특유의 인생론이 펼쳐져 있는데, “인생은 부조리다”라는 서늘한 문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저자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대해서 애기합니다. 대가가 된 사람, 어떤 분야의 성공스토리를 쓴 사람은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그런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어떤 결정적 순간이 “우연하게” 닥쳤다는 겁니다.(여기서 강조점은 “우연”에 찍혀 있습니다.) 저자는 정색하면서 말합니다. 재능이 개화하려면 어떤 사람과의 결정적인 만남이나 우연히 들어온 한권의 책, 우연히 겪게 된 한권의 책이 계기가 된다고. 만약 그 우연이 없었으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고. 책에는 주연배우가 쓰러지는 바람에 우연히 발탁된 모리 히쓰코, 책을 잘못 사는 바람에 평론가가 된 아키야마의 예가 나옵니다. 저자는 거듭 강조합니다. 인생은 부조리라고. 미켈란젤로의 재능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며 그 재능도 우연한 기회를 얻어 발휘된 것이라고. 그러니, 인생에 절망하지도, 열광하지도 말고 끝까지 음미하라고. 어찌보면 상당히 사람을 힘빠지게 하는 애기인데 이것저것 책을 읽다보니 정말 그런 순간을 맞이한 케이스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 야구장에서 시원한 2루타를 보는 순간 소설을 쓰자고 마음먹었다는 것은 분명 로맨틱한 성공스토리입니다. 그 자신도 “슬픈 외국어”에서 밝혔듯 안타가 날아가는 각도나 그날의 온도, 습도, 그 날 야구장에서 들리던 함성 같은 것이 절묘하게 어울려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그 자신도 말했듯 그건 우연이었던 겁니다. 그가 슬픈 외국어에서 인용한 잔인한 대사(오손웰스의 영화라고 합니다.) 까지 나카지마 요시미츠의 허무감과 맞닿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은 마루야마 겐지.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끼적거리던 글이 아쿠타가와상에 당선되는 (그 때까지 최연소였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론 그 이후 무카라미 류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경신했습니다.) 문학지망생들이 들으면 열폭할 만한 스토리를 쓴 사람입니다. 실제로 당선 직후 겐지에게 소설가지망생들의 항의편지가 쇄도했다고 하네요.이 사람의 에세이를 읽어보면 묘한 분열같은게 느껴지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소설가라고? 분에 맞지 않아!"라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세이에도 등장하는 편집자의 말처럼 "당신은 문학을 싫어하지만, 문학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라는 느낌입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날 좋아해 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나오겠죠.)그리고, 가장 최근에 읽은 예로는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와타나베 이타루입니다. 이 사람은 약간 신기까지 있는데, 회사에 다니며 장래를 고민하다가 어느날 잠결에 “빵을 만들어 보라”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충고를 듣고 제빵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명하거나 돈을 많이 번건 아니지만,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의 의미를 찾은 사람으로 성공케이스로 꼽고 싶네요. 아, “짚한오라기의 혁명”을 쓴 후쿠오카 마사노부도 있겠네요. 이 사람은 잠들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던 중 새벽에 별안간 대오각성을 하고 농부가 된 사람입니다. 이 후 자연농법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거의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데요, 와타나베 이타루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거짓말을 할 리 없으니 본인의 착각이든 뭐든 대충 진실로 쳐주는게 맞는 것 같네요.

저도 나카지마 요시미츠의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만의 결정적 순간이 언제 닥칠까 하고 신경을 곤두세운 적이 있습니다. 3호선을 타지 않고 5호선을 타면 내 인생이 바뀔까? 혹은 두시 비행기가 아니라 여섯시 비행기를 타면 내 인생이 바뀔까? 두시 비행기는 추락하고, 여섯시 비행기 내 옆자리에서 어썸한 여인네를 만나지 않을까? ..... 물론 그런 일은 없었고, 지금까지 기다려 봐도 저에게 그런 결정적 순간은 없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인생론에서 말한 것처럼 시간이 지난 다음에 우리는 하나의 스토리로 각각의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 내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루키에게 다시 기대자면 적어도 그런 순간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고요. 아니면 저에게 결정적 순간은 어쩌면 이 책을 발견한 것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군 복무 때 휴가나와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서점엘 가서 이 책을 골랐습니다. 휴가 중에 서점에 간 것도 미스테리한데 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저자의 책을 덜컥 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권의 책이 사람을 바꾸진 못하지만, 그 변화의 시작이 될 수는 있겠지요. 이 책을 읽고 나서 “끝까지 부조리를 응시하고 음미하는 삶”이란 태도를 접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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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를 그만두다 - 소비자본주의의 모순을 꿰뚫고 내 삶의 가치를 지켜줄 적극적 대안과 실천
히라카와 가쓰미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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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가구가 이제는 대세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사회단위로 등장한 개인이 모든 것을 시장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이다. 돈이 사회를 살아가는 안전망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뭐니뭐니해도 money가 최고라는 수십년전 농담)

문제는 이제 사람들이 앞으로 돈을 획득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진다는 거다. 일본의 경제성장은 성숙기에 도달했고, 저출산에 고령화, 총수요 감소가 진행중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불행히 겪어보지 못했지만 돈의 유동성이 지극이 높아지면 설사 벌이가 많더라도 인간성 자체가 소모된다고 한다. 40년이상 사업을 해온 저자의 경험담이란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현재 진행중인 “내리막 사회”에서 말이다.저자는 돈 대신 “관계”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고리가 안전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지연”을 강조한다. 여기서 지연은 어디 출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얼굴있는 소비자”가 되어 장소와 결합하는 것이다. 익명의 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매력 때문에 도시화가 진행되고 화폐경제가 발전했다면,이제 다시 “얼굴있는 소비자”가 되어 지역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여기서 평소 저자가 주장하는 “소상공인”의 개념이 연결될 것이다. 대형할인점의 지역파괴와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예로 들면서 저자는 교환가치이고 본질적으로 유동적인 화폐는 평온과 충족감을 주는 삶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애기한다. 가족간의 결속만 중시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미국은 공허한 나라이며 후세에 실패한 나라로 기록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저자가 깨달은 것은 현대인의 과잉소비는 과잉스트레스에서 온 공허감을 메꾸기 위한 대상행동이며, 소비에 대한 욕망은 안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생활 속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게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이나 고미숙씨의 “호모 꼬뮤니타스” 같은 책에서 줄기차게 애기된 것이기도 하다. 증여를 하고 관계를 만들으라는 것. 게다가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삶이 피폐해지는 것이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아닐까. 삶과 일이 함께 가는 것은 소수의 행운아에게나 해당하는 일이다. 아마 저자가 주장하는 소상공인이라는 개념도 아마 이런 행운아에 관한 애기아닐까.

 

저자의 애기가 여러 방면에 조금씩 걸쳐있고, 단문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 눈에 조망이 들어오진 않는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는 구체적인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게 슬프다. 월마트가 아니라 동네소매점에 가 본다고 해보자. 물론 첫걸음이지만, 안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삶이 갑자기 나올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저자도 지적했듯 과거의 지역공동체는 토대이자 동시에 구속이었다. 이미 자유의 맛을 본 익명의 개인들이 타인을 어느정도까지 받아들이려고 할까. 혼밥과 혼술남녀가 유행하는 지금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설정이란 철학적이기까지 한, 만만찮은 주제일 것이다. 그리고, 하루종일 원거리 지역에서 근무하고 저녁과 주말만 집에서 보내는, 야근에 쩌는 직장인들에게 지역공동체는 먼나라 애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요컨대, 노동과 삶, 사람사이의 관계가 총체적으로 엮여 있어 저자의 애기가 실감이 나지 않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애기가 어떤 단초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동네 소매점에 한번 가보자. 소비를 줄이고 그걸 동력으로 다른 노동양식도 상상해보자. 조금씩 조금씩 실천해보면 저자가 말하는 안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있고, 그 곳에서 가족, 친구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행복을 느끼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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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정의다
래그나 레드비어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영림카디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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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게 이 책의 골자다. 무난한 애기 같은데 옮긴이 해설이 심상찮다.

   

       “용기가 있으면 읽어보라”(옮긴이 해설중)

 

과연 서문을 몇 장 넘기고 나면 감정의 파도가 순류,역류를 반복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진부하면서도 가슴뛰게 하는 명제를 누군가에게는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논리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래그나 레드비어드”라는 익명의 저자가(영화로 치면 알란 스미시?) 묘사하는 세계는 철저한 적자생존의 세계다. (그 근거는 명확치 않다. 저자는 그게 “자연적”이라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강자가 약자를 포식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평등이니 우애니, 희생이니 하는 것은 기독교(책에는 “형틀에 매달린 유태인 노예”라는 표현이 나온다. )가 만들어낸 헛소리며 사기극이다. 그리고, 강자를 결정하는 것은 혈통이다. 전사는 전사의 피에서 밖에 나올 수 없는데, 흑인이나 중국인, 유태인 등은 글러먹은 노예근성에 찌든 민족이다. 그들은 당연히 금빛 머리털을 가진 강자들의 희생물로 존재해야 한다. “민중은 개돼지”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이 책에 딱 들어맞는다. 여성혐오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책에 나오는 문장을 메갈에다 올리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저자가 말하는 힘이라는 것도 단순해서 칼, 무기, 육체적인 힘 같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남자들이라면 초등학교 때 한번쯤 겪었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같은 상황이 저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이상적이기까지 하다.

이쯤되면 “19세기에 웬 일베?”라고 하면서 책을 던져버리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사회비판이 그대로 현재의 모습과 중첩된다는 것이다.

 

“헌정수립 이후 백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인의 10퍼센트가 전체 재화의 92퍼센트를 절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자를 위한 법 따로 있고, 빈자를 위한 법 따로 있다“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있는 속담이다.... 실제로 ‘저울의 추’는 투표함 속의 수천만 표보다 물리적 과단성을 갖춘 말없는 실세 열 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현실 아닌가?”

 

“힘들고, 지속적인, 규율에 맞춰 강요된 노동은 용기를 파괴하고, 생기를 고갈시키며, 성격을 버려 놓는다.... 딱하여라, 벌벌 떠는 저 가련한 자들! 자기가 흘리는 땀으로, 아니 심장이 쏟아내는 피로 자신의 손을 씻는구나! 타고나기를 노예인 자들이여, 나면서부터 실성한 자들이여!”

(강신주 선생님이나 고미숙 선생님이 평소 말하는 “정규직노예론”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희가 자유인이라고? 꿈깨라,이 개돼지들아!”(실제로 책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많이 나오니 관심있으시면 직접 읽어보시길. 비아냥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러고 보니 강신주 선생님도 철학강의 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향욱씨의 발언에 사람들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는 자신들이 개돼지라는 것을 들켰기 때문이라고.(벙커1 철학강의 홉스vs클라스트르 편. 동영상으로 시청 가능하다.진지하게 한 애기는 아니니 또 너무 흥분하지 마시길) 여기서 이 “19세기의 일베”는 묘하게도 반역과 혁명의 기운을 부채질한다.

 

“너에게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라. 너와 싸우려는 자들과 전쟁하라.... 굴종하며 사느니 깨끗이 죽는게 낫지 않겠나?... 삶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지는가?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수치스러운 삶이다”

 

영원한 강자는 없다. 오늘의 강자는 내일의 강자에 의해 반드시 쓰러져야 한다. 수치스럽게 살지 말고 싸워라! 만약 그러다 실패하면? 그럼 죽으면 된다!. 죽음은 탄생만큼 사랑스러운 것이다. 삶은 어둠 속에서 잠깐 반짝이는 불빛에 지나지 않는다. 그깟 삶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도덕이니 정의니 신이니 법이니 하는 것은 너를 지배하는 자들이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편의에 불과하다. 자연에서 정의는 상대를 제압하는 힘이다! 옳고 그름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내면의 결정에 따라라!

읽고 나면 일종의 프로파간다같다는 느낌도 든다.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보다는 비유와 뉘앙스를 사용하며 마음껏 내지르기 때문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도덕교과서에 나올만한 애기를 도덕교과서를 깔아뭉개며 주장하는 셈이다. 저자는 타성에 젖은 구제불능의 노예들을 깨우기 위해 독도 잘 쓰면 약이라는 생각을 한 걸까. 그래서, 나치를 연상케하는 인종주의와 곰팡내나는 낡은 여성혐오를 흩뿌려 놓은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느낌에 저자는 인종주의자에다 여성혐오자이다. 하지만, 코브라의 독도 쓰기 나름이라고 나같이 스테로이드 부족 남성들에게는 이 이야기는 꽤 신선하게 다가올 듯 싶다. 물론 쫄파메일이 알파메일에게 져서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긴 하지만 말이다.

 

추신: 강신주 선생님이 강의 중에 한 말-“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의 문제는 ,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죽는다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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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해릴린 루소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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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책을 읽고 “내가 장애인이었다니” 라고 느꼈다면 당신은 화를 내실 건가요. 아니 분명히 그러시겠지요. 혹은 자신의 장애인 동지들과 “여기 병신 추가요” 하는 눈빛을 주고 받으며 저를 조롱하겠지요. 제가 스스로 장애인처럼 느낀 이유는 당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을 사고하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저의 콤플렉스를 떠올렸습니다. 저 역시 당신처럼 자신의 몸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저는 지나치게 마른 몸을 가졌어요. 여름에는 반바지를 입기가 꺼려질 정도입니다. 음, 아마 여성분이기 때문에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체중이 적게 나간다는 것은 한명의 “남자”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쉽게 말해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힘센 애가 목소리가 커지고, 그렇지 못한 아이는 위축되는 것과 같습니다.(남자들의 단순함은 다 아실거라 예상합니다) 아마도 그런 것이 지금까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알게 모르게 미쳐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굵고 억센 팔다리와 가슴을 가진 사람을 왠지 믿음직스럽고 저런 사람들이 삶에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저런사람들은 별 회의나 고민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겠지, 삶에도 적성이라는 게 혹시 있는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보면 당신처럼 저 역시 방어적이고 수비하는 자세로 지금껏 살아온 것 같은데 아마 “생존을 위한 수업을 하도 철저히 받아서 남의 뜻을 따르는 성향이 선택적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발휘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받아들인다는 것, 쉬운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평가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좋음과 나쁨으로 나누고, 좋음으로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장애같이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은 결국 자기혐오와 무력감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 그것 역시 나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혼자 겨울숲으로 가리라”고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만년이고 이만년이고, 버텨주지 까짓것”하고 생각했었지요. 자기비하가 지반을 뚫고 들어가 일종의 오기 비슷한 것으로 변해 다시 바깥으로 튀어나온 셈이었습니다.  저런 생각을 한 걸 보니 저 역시 청춘이었습니다.

  흠결이 있는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단순히 장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처럼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종이나 국적같은것, 좀 다른 예지만 학벌같은 것도 비슷한 것 아닐까요. 세상이 나에게 찍어놓은, 내가 결코 바꿀 수 없는 낙인이나 딱지 같은 것. 그런 낙인이나 딱지 아래에서는 저는 영원히 결핍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열거해 놓고 보니까 전부 차별과 관련된 문제네요. 흑인이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인종차별 때문이고, 명문대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학력차별 때문이지요. 장애인들이 자신을 혐오하는 이유도 결국 그들이 현실에서 받는 차별 때문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서열을 만들고, 거기에 따른 차별을 만듭니다. 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있을 테고, 온당치 못한 것도 있을 것이라고 일단 온건하게 생각해 봅니다. 감히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느끼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장애라는 문제를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모욕하는 것인가요) 당신에게 듣고서 오히려 저 역시 당신과 비슷하게 사고 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당신을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담에야 어떻게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만 어디선가 들은 브리콜라주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피아노의 천재는 피아노줄이 끊어지면 연주를 포기하는게 아니라 편곡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네요. 타이핑을 하고 난 다음 웃음이 났습니다. 하하.

적어도 당신은 지금 당신의 몸을 오래된 친구처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가끔 투덕투덕 싸움도 하고 단점도 보이지만, 그래도 정이 든, 이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아 하는 친구 말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정말로 한 점의 티끌없이 무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길 바라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스스로에게 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때에 아주 오래된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근데 이상하네요. 분명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라고 생각하는데 이 대목에서는 당신도 저와 같은 느낌일 거라는 예감이 드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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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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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는 생명을 향한 가장 큰 모독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도망칠 수 없는 것들만 먹는다.”(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중)

“ 다른 동물을 먹는다는 것”,“채식의 배신”,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한 강의 “
채식주의자”를 읽자 이런저런 책들이 떠올랐다. (물론 이 소설의 주제를 내가 헛다리 짚은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인용한 조셉 캠벨의 문장이 가장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 그런 관점으로 이 책이 읽힐 수 밖에 없었다. 캠벨의 주장은 대충 이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너의 삶을 이어라. 하지만 잊지 마라 너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

 그에게 생명이란 피로 이루어진 것이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삶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고통과 슬픔을 기쁜 마음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말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내가 언젠가 누군가의 먹이가 될 것을 인식하면서 ,타인의 피를 먹는다- 과연 이렇게 상상하면 이 순간이 새롭게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전철을 기다리며 지루하게 보낸 시간은 내가 누군가의 생명을 갈취해서 확보한 것이란 애기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먹힐 순간을 생각하면 이 순간의 특별함은 더해진다. 그러고보니 몇가지 구절들이 더 떠오른다. 살아오면서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묻자 시골의 촌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산다는 게 죄지”. 박지원이 썼다는 문장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포악하다는 애기다” 박지원은 장수가 미덕으로 여겨지던 당시의 상식을 반박하는 의미로 이 문장을 썼다.

  하지만, 캠벨식의 사고에는 어떤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잔인함과 폭력을 과연 어느 정도로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구의역에서 숨진 노동자의 죽음은 잔인함과 폭력의 전형 아닌가. 뮤언가 신선하게 느껴지던(이렇게 쓰고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피가 “신선”하다니) 캠벨의 사고를 여기서 진전을 못 시키기겠다.

  폭력은 여러형태로 존재한다. 원치않는 야근을 시키고 직급에 상관없이 업무와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폭력아닌가? 하급자의 인격과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던 부장검사는 폭력을 휘두른 것 아닌가. 놀랍게도 나는 직장의 본질이 착취라는 것을 이제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강헌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타인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만약 부를 쌓고 싶으면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면 된다. 외국인 노동자도 좋고 월급 70여만의 저학력노동자도 좋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도 착취의 사다리를 세분화시킨 것 아닌가. 더 많고 지속가능한 이윤을 위해서 새로운 금을 긋고 새로운 룰을 만든다. 그렇게 구조는 정교해지고 간교해진다.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생물시간에 보았던 아메바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아메바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싸우는 힘으로 아메바는 꿈틀거린다. 메스로 한 부분을 찢으면 참았던 것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폭발 직전의 사람들은 보복운전을 하고, 시끄러운 윗층 사람과, 화장실에서 만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인다. 

   만약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닭을 죽이고, 살아있는 물고기의 목을 땃다면 나는 좀더 “삶”과 “생명”이란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잔인함에 질려 채식주의자가 되었을까 아니면 내 손에 죽어간 생명을 떠올리며 무언가 다른 삶을 살았을까.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동박새를 물어뜯으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브래지어를 벗은 것은 가슴에 생명이 차 있기 때문이 아니라 덥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정도로 충고하지 않았을까. 이런, 이건 완전히 그 무신경 무책임 남편하고 똑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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