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으로부터의 해방 - 탈성장 사회로 가는 길
니코 페히 지음, 고정희 옮김 / 나무도시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저자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계속 이렇게 살면 우리 모두 앞으로 X될거니까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다. 저자가 진단하는 문제는 두 가지다. “환경파괴”와 “부채”. 이 책에서는 이걸 기본 베이스로 깔고 논리를 전개하는데 결론은 우리 모두 소비를 줄이는 게 대안이다. 막시즘은 잉여가치를 놓고 벌이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을 다뤘다. 하지만, 그 잉여가치 자체가 환경파괴를 통해 부당하게 얻어진 것이라면? “착취”의 정의가 본인의 수고와 전혀 비율이 맞지 않는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라면 자본가나 사업가들만이 착취자가 아니다. 소비라는 것 자체가 극히 효율적인 착취의 도구다. 더욱이 생태계의 파괴를 전제로 하여 얻어진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결국 환경의 착취로부터 나왔음을 주장한다. 기술향상, 분업으로 효율 증가 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결국 더 많은 환경 에너지를 투입해서 만든 결과이다. 혹자는 녹색성장을 애기하지만 이것은 기만이다. 인프라 구성에 투입되는 자원부터, 신기술은 새로운 유해물질을 발생시킨다. 전세계가 부유한 소비자로 가득하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지구가 몇 개 더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내놓은 결론은 하나다. 책제목과 같은 “성장으로부터의 해방”. 생활방식의 변화만이 진정한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의 결별이기도 하다. 저자는 간단한 모델로 자본주의가 이윤을 내기위해서는 성장에의 압박에 직면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경제학 수업을 떠올리면 되는데 간단하게 소개 되어 있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자. 내가 중학교 때 미술선생은 수업시간에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온 애기를 들려줬다. 단체 신혼여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는 커플이 있을까? 서울에 사는 나에게 이제 심리적으로는 부산보다 제주도가 가깝게 느껴진다. 저가항공을 이용해 한 시간이면 제주도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항공여행에 대해 비난을 늘어놓는다. 저가항공은 국가의 보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껏 평생동안 딱 한번 비행기를 이용했다고 한다.)

저자가 내세우는 대안은 “절제”와 “자급”으로 요약된다. 언뜻 생각하면 궁색해지자는 애기 같은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일종의 윤리의식을 도입한다. 책임감 있게 소비하는 사람이 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 대목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 애기가 씨알이 먹힐까? “지들은 다 해먹고, 왜 우리는 안된다고 해?” 라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한번 익힌 소비습관을 줄인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나 너나 다들 근시안적 인간 아닌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지금 살던대로 살아갈 것이다. 이미 돈으로 무엇을 사서 생활 구석구석을 채우는게 우리들의 삶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절제는 궁색함이 아닐까? 절제와 무기력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지만, 여기서 잠깐, 만약 돈이 불행의 씨앗이라면? 저자가 말하는 행복은 “인간관계,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소속감,능력을 인정받는 것, 자기구현, 건강, 안전, 및 온전한 환경 등”에 기원한다. 저자가 내놓은 반전은 이러한 가능성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 현재의 분업시스템에서는 마르지 않는 원천인 돈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각자의 능력과 시간을 분업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현재의 부와 소비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는 자원을 좀먹는다. 돈은 썩지 않지만 우리는 늙는다! 그것도 금방!

그럼 자급하는 데에는 시간이 들지 않나? 저자는 시장의존적인 삶은 결국 무기력하고, 불안을 가중시키는 삶이며, 자급이 주는 성취감과 충만감이 있다고 한다. 소비는 결국 피상적인 것이며 삶을 소진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직장을 그만두고 자급의 기술을 익혀야 할까? 살아가면서 보통 우리를 괴롭히는 것 중의 하나가 돈인데 돈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저자의 애기가 솔깃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몸에 좋은 유기농 음식이 맹맹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저자의 애기가 일반대중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갈까. 어디까지가 “적정소비생활”인지도 불분명하다. “탄소산출법”같은 애기를 하지만 신뢰성은 마뜩찮다. 아침에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럼 무슨 재미로 살란 말인가”하고 반문할 것이다.

결국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급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하는 강제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경기불황이나 최악의 더위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스스로를 제어하지 않으면 언제가 운명적인 힘이 그 일을 대신할 것이며, 그 때는 부드럽게 처리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어쨌거나 일과 관계에 치인 우리는 여전히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근시안적 인간들 아닌가. 인간이 그 정도로 현명했다면 세상은 진작에 좋아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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