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해릴린 루소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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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 책을 읽고 “내가 장애인이었다니” 라고 느꼈다면 당신은 화를 내실 건가요. 아니 분명히 그러시겠지요. 혹은 자신의 장애인 동지들과 “여기 병신 추가요” 하는 눈빛을 주고 받으며 저를 조롱하겠지요. 제가 스스로 장애인처럼 느낀 이유는 당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을 사고하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저의 콤플렉스를 떠올렸습니다. 저 역시 당신처럼 자신의 몸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저는 지나치게 마른 몸을 가졌어요. 여름에는 반바지를 입기가 꺼려질 정도입니다. 음, 아마 여성분이기 때문에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체중이 적게 나간다는 것은 한명의 “남자”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쉽게 말해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힘센 애가 목소리가 커지고, 그렇지 못한 아이는 위축되는 것과 같습니다.(남자들의 단순함은 다 아실거라 예상합니다) 아마도 그런 것이 지금까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알게 모르게 미쳐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굵고 억센 팔다리와 가슴을 가진 사람을 왠지 믿음직스럽고 저런 사람들이 삶에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저런사람들은 별 회의나 고민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겠지, 삶에도 적성이라는 게 혹시 있는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보면 당신처럼 저 역시 방어적이고 수비하는 자세로 지금껏 살아온 것 같은데 아마 “생존을 위한 수업을 하도 철저히 받아서 남의 뜻을 따르는 성향이 선택적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발휘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받아들인다는 것, 쉬운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평가기준으로 자신을 바라봅니다. 좋음과 나쁨으로 나누고, 좋음으로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장애같이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은 결국 자기혐오와 무력감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 그것 역시 나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혼자 겨울숲으로 가리라”고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만년이고 이만년이고, 버텨주지 까짓것”하고 생각했었지요. 자기비하가 지반을 뚫고 들어가 일종의 오기 비슷한 것으로 변해 다시 바깥으로 튀어나온 셈이었습니다.  저런 생각을 한 걸 보니 저 역시 청춘이었습니다.

  흠결이 있는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단순히 장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처럼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종이나 국적같은것, 좀 다른 예지만 학벌같은 것도 비슷한 것 아닐까요. 세상이 나에게 찍어놓은, 내가 결코 바꿀 수 없는 낙인이나 딱지 같은 것. 그런 낙인이나 딱지 아래에서는 저는 영원히 결핍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열거해 놓고 보니까 전부 차별과 관련된 문제네요. 흑인이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은 인종차별 때문이고, 명문대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학력차별 때문이지요. 장애인들이 자신을 혐오하는 이유도 결국 그들이 현실에서 받는 차별 때문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서열을 만들고, 거기에 따른 차별을 만듭니다. 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있을 테고, 온당치 못한 것도 있을 것이라고 일단 온건하게 생각해 봅니다. 감히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느끼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장애라는 문제를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모욕하는 것인가요) 당신에게 듣고서 오히려 저 역시 당신과 비슷하게 사고 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당신을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담에야 어떻게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만 어디선가 들은 브리콜라주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피아노의 천재는 피아노줄이 끊어지면 연주를 포기하는게 아니라 편곡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네요. 타이핑을 하고 난 다음 웃음이 났습니다. 하하.

적어도 당신은 지금 당신의 몸을 오래된 친구처럼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가끔 투덕투덕 싸움도 하고 단점도 보이지만, 그래도 정이 든, 이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아 하는 친구 말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정말로 한 점의 티끌없이 무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길 바라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스스로에게 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때에 아주 오래된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근데 이상하네요. 분명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라고 생각하는데 이 대목에서는 당신도 저와 같은 느낌일 거라는 예감이 드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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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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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는 생명을 향한 가장 큰 모독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다른 생명들을 희생시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오로지 도망칠 수 없는 것들만 먹는다.”(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중)

“ 다른 동물을 먹는다는 것”,“채식의 배신”,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한 강의 “
채식주의자”를 읽자 이런저런 책들이 떠올랐다. (물론 이 소설의 주제를 내가 헛다리 짚은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인용한 조셉 캠벨의 문장이 가장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 그런 관점으로 이 책이 읽힐 수 밖에 없었다. 캠벨의 주장은 대충 이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너의 삶을 이어라. 하지만 잊지 마라 너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야 한다.”

 그에게 생명이란 피로 이루어진 것이고,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삶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고통과 슬픔을 기쁜 마음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삶의 고통과 잔인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말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내가 언젠가 누군가의 먹이가 될 것을 인식하면서 ,타인의 피를 먹는다- 과연 이렇게 상상하면 이 순간이 새롭게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전철을 기다리며 지루하게 보낸 시간은 내가 누군가의 생명을 갈취해서 확보한 것이란 애기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먹힐 순간을 생각하면 이 순간의 특별함은 더해진다. 그러고보니 몇가지 구절들이 더 떠오른다. 살아오면서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묻자 시골의 촌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산다는 게 죄지”. 박지원이 썼다는 문장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포악하다는 애기다” 박지원은 장수가 미덕으로 여겨지던 당시의 상식을 반박하는 의미로 이 문장을 썼다.

  하지만, 캠벨식의 사고에는 어떤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잔인함과 폭력을 과연 어느 정도로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구의역에서 숨진 노동자의 죽음은 잔인함과 폭력의 전형 아닌가. 뮤언가 신선하게 느껴지던(이렇게 쓰고나니 기분이 이상하다. 피가 “신선”하다니) 캠벨의 사고를 여기서 진전을 못 시키기겠다.

  폭력은 여러형태로 존재한다. 원치않는 야근을 시키고 직급에 상관없이 업무와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폭력아닌가? 하급자의 인격과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던 부장검사는 폭력을 휘두른 것 아닌가. 놀랍게도 나는 직장의 본질이 착취라는 것을 이제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강헌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타인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만약 부를 쌓고 싶으면 착취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면 된다. 외국인 노동자도 좋고 월급 70여만의 저학력노동자도 좋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구분도 착취의 사다리를 세분화시킨 것 아닌가. 더 많고 지속가능한 이윤을 위해서 새로운 금을 긋고 새로운 룰을 만든다. 그렇게 구조는 정교해지고 간교해진다.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생물시간에 보았던 아메바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아메바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싸우는 힘으로 아메바는 꿈틀거린다. 메스로 한 부분을 찢으면 참았던 것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폭발 직전의 사람들은 보복운전을 하고, 시끄러운 윗층 사람과, 화장실에서 만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인다. 

   만약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닭을 죽이고, 살아있는 물고기의 목을 땃다면 나는 좀더 “삶”과 “생명”이란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잔인함에 질려 채식주의자가 되었을까 아니면 내 손에 죽어간 생명을 떠올리며 무언가 다른 삶을 살았을까.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내는 동박새를 물어뜯으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브래지어를 벗은 것은 가슴에 생명이 차 있기 때문이 아니라 덥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 정도로 충고하지 않았을까. 이런, 이건 완전히 그 무신경 무책임 남편하고 똑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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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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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얼마 전 이민설명회에 갔을 때 잠시 이 나라의 이름이 나왔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예쁜 이름인데, 동구권의 히든카드인가 하는 감상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다음-비하나 폄하가 아니다- 벨라루스에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초등학교 때인가 체르노빌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아침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심각한 목소리로 애기하던게 기억난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고, 나는 안전했기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중학교 때인가는 학교에서 구독하는 청소년용 신문에 체르노빌의 눈 없는 돼지사진이 실렸었다. 역시 충격이었지만, 공포가 체감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후쿠시마가 터졌을 때는 공포가 있었나? 비를 맞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불편’은 있었지만, 몸에 감기는 공포는 아니었다. 벨라루스는 체르노빌과 인접한 나라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정확한 통계는 잊어버렸지만- 사망률이 급증하고, 평균 수명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암, 백혈병, 기형아 출산 등등... 그리고, 이 재앙은 지진이나 태풍처럼 잠깐 닥쳤다 사라지는게 아니다. 방사능의 반감기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인간과 대부분의 생물종에게 영원에 가깝다. 영겁의 생을 사는 종족이 아니고서야 체르노빌 이후에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고, 새로운 지구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미래의 연대기”다. 그리고, 전기와 인터넷, 휴대전화를 쓰고, 일회용 플라스틱컵에 예가체프 커피를 마시며 여기 지금과 연결되어 있는 나는, 앞으로 존재할 또 다른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에 연결되어 있다.

내가 후쿠시마 때 공포를 느껴야 했나? 요오드제를 사는 것은 오바였을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 괴물이 땅 속에 웅크리고 있고, 언젠가 지상을 뚫고 나와 바로 나의 뒷덜미를 낚아챌 수도 있다는 것은 직시해야 한다. 순전한 직관이지만 지금 후쿠시마의 땅 속 어딘가에는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지구의 한구석으로 방출되고 있을 것이다. 장사 한두 번 해보나?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은 너무도 닮았다! 사고가 나자 권력은 그것을 덮기에만 급급했고 아무도 책임을 지고 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았다. 도쿄전력이 미적거렸던 것처럼, 소련의 위대한 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행여 흔들릴까 인민들의 충성심을 이용했다. 가장 힘없는 장삼이사들이 체르노빌에서 소모품으로 사고를 수습했고, 후쿠시마에서는 비정규노동자들이 투입됐다.(그렇게 알고 있다.) 그리고, 온갖 기만이 횡행했다. 식사 전에 손만 씻으면 된다. 기저귀 말릴 때만 주의하면 된다. 우리 인민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이번에도 승리할 것이다. 허용치 이하다... 사카구치 교헤였던가.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에서 일본 정부의 당시 해명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들렸던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체르노빌에서 배신자로 몰렸고, 후쿠시마에서는 비국민으로 배척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빠르게 망각해 가고 있다. “체르노빌레츠”들을 한 쪽으로 밀어 놓은 채 말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동일본 대지진이 수백명이 죽은 한건의 사건이 발생한게 아니라 한 명이 죽은 사건이 수백건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담는다. 누군가는 인터뷰를 거부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절절히 토로한다.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황당해한다. 그 중에서 희망을 애기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하루를 체념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그들을 “체르노빌레츠”라는 쓰레기통으로 쓸어 담을 때 저자는 그들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살려낸다. 체르노빌 이후에도 그들의 삶은 이어졌다. 그들은 아직 살아 있으며, 죽은 사람들은 기억과 이야기를 남겼다.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개성이 있는, 존중받아야 할 누군가의 삶이었다. 때문에 저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록했다는 것. 그것 자체로도 저자는 체로노빌 사람들에게 최고의 존중을 보여준 것 아닐까.

책을 읽고 나면 정말 신이라는 게 존재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망한 느낌이 든다. 몇 대를 자연과 더불어 이어지던 삶의 순간들은 너무나 쉽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듬어 주던 자연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렵지 않은가? 이토록 인간은 무기력하다. 하루키의 어느 소설이 생각난다. 청소년기에 왕따를 간신히 버텨 낸 주인공은 성인이 된 후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때는 어쨌든 이겨냈어, 하지만, 그런 폭력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라도 다시 닥칠거야. 주인공은 밤에 잠에서 깨어나 아내를 껴안고 운다. 대체 문명과 원자력은 누가 만든 것일까? 나는 무력하다. 아침마다 지정된 장소에 지정된 시간까지 존재해야 하고, 허접한 상사의 허접한 지시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거대한 빌딩을 세우고, 원자력을 만들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원자력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후쿠시마의 세슘이 혹시 나를 공격해 고통 속에 죽어가더라도 말이다. 체르노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읽는 내내 느껴지는 감정이 익숙했다. 몇백일 전에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다. 우리는 그 사건 역시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놓고 있다. 아직 이어지는 삶들이 있는데 말이다. 사건 발생 몇 달만에 신문을 보며 "이제는 지겹다"고 말하던 윗대가리들. 나가 디져라 

 

ps. 커플끼리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 말고 이 책을 같이 읽는 건 어떨까. 지금껏 들은 가장 처절한 사랑 이야기가 실려있다. 게다가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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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에 대하여 - 고대 스토아 철학의 대가 세네카가 들려주는 화에 대한 철학적 사색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김경숙 옮김 / 사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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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나도 꼴에 “아랫것들”이 생겼다. 호명을 하면 누군가가 부산스럽게 나타나서 처분을 기다린다는 듯이 내 옆에서 대기하는 것이다. 처음 이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마음 한 구석에 어떤 자극을 느꼈다. 누군가를 나의 의지대로 한다는 느낌. 변대적으로 집착한다면 묘한 쾌감이 될 수도 있는 느낌 말이다. 이런 느낌이 발전한다면 사내 성폭력같은 걸로 이어지는 거겠지. 대기하는 누군가가 긴 생머리에 토끼귀 장식을 한 야들야들한 언니라고 생상해보라. 근데 가끔은 반대의 상황도 발생한다는 거다. 넌센스지만 세네카의 말을 빌리자면 “노예가 말대답하고 불순한 표정을 짓는다고 왜 화를 내는가?” 이다
  사실 직장이나 학교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 아닌가. 내가 팀장한테 깨질 때 옆 부서 팀장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저렇게 소리 안 질러도 무섭게 할 수 있는데”
직장이나 학교나 결국 유치원이고 군대다. “시키든 대로 안 하면 죽어” - 필수 교양이고 민주주의고 나발이고, 힘이 지배한다. 상대를 짓눌러서 장난감을 빼앗아야 하고, 학교와 군대에선 몽둥이가 날아가고, 직장에선 차마 그럴 수 없으니 말이 날아가고 가끔 결재판을 날리는 사람이 있긴 하다.
 세네카가 보기에 화는 추하다. 사람의 머리털을 뻣뻣하게 하고 얼굴이 붉어진다. 입고 있던 품위 있던 옷을 스스로 찢어버리고, 본인이 다치든 말든 칼날을 향해 돌진한다. 노비투스가 얼마나 화를 잘 냈던지 세네카는 조곤조곤 설득을 시작한다.
  화는 강인함이 아니다. 격정이란 공허하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사랑도 아마 마찬가지?)
너는 화를 에너지로 사용한다고 하지만, 적들을 뿌리뽑고, 도시를 폐허로 만드는 것은 화가 아니라 이성이다. 네가 정말로 복수를 원한다면 공허한 화 대신 강철같은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 화는 약함의 상징이다. 불평을 하는 사람들을 보라. 노인과 아이들이다. 적들이 던지는 창은 강인함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올 것이다.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자는 그것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도 열등한 것이다. 강자는 그런 감정 자체를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인함이란 외부의 조건에 상관없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고요한 마음의 평화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미덕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화는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미덥진 않지만, 세네카에게 인간의 본성은 화합을 원하고, 앙갚음을 원하지 않는다. 고요한 마음의 평화만이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미덕이며 격정의 벗은 슬픔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다. 자비는 자신을 위해 베푸는 것이다. 우리는 화가 우리 내부에서 싹을 틔우기 전에 그 싹을 잘라야 한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이다. 사리분별없는 동물에게 화를 낼텐가? 너는 “부당하다”고 화를 내지만 너 역시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깜냥으로 정당과 부당을 판별하지 마라. 화를 내서 상대방이 두려움을 갖는다면 네가 이긴 것 같지만 악행에는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그 대상 역시 두려워야 할 것이 많다. 사자는 사소한 움직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화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화풀이 본능>에 따르면 생명이 진화하면서 화풀이 본능을 내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집단 내에서 호구로 찍힐 경우 생존이 어렵기 때문에 보복본능을 발전시켰다는 거다. 요새 대세인 뇌3단계론(변연계-파충류의 뇌, 구피질-원숭이의 뇌, 신피질-인간의뇌)에 따르면 화풀이본능은 구피질이나 변연계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네카는 감정보다 이성이 강력하다고 한다. 화를 없애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분노가 치밀으면 그것을 발전시키지 마라. 화를 유예하고 숨겨라. 웃어버리고, 무시하고, 그래도 남는 것은 용서해라. 알렉산더 왕의 아버지 필리포스조차 무례함을 참고 견뎠다. 네가 필리포스 보다 위대한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죽음이 다가와 있을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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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에 대하여 - 고대 스토아 철학의 대가 세네카가 들려주는 화에 대한 철학적 사색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김경숙 옮김 / 사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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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아씨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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