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력 -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선종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서는 신성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역설은 사림들이 신성한 것을 재미없어 한다는 것이다. 이제 독서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한 곰팡내 나는 단어만 연상시킨다. 사이토 다카시가 <독서력>을 쓴 이유다.

 

이 책의 전반부는 독서의 역능을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에서 구체적인 독서법을 기술하고 있다. 이 독서라는 신성한 기도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나침반이 되리라 생각한다. 사이토 다카시에게 독서는 자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고,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자아에게 독서라는 것은 하나의 경험이고(input) 저자와의 대화이다. 그레서, 일종의 소통이다. (이건 묵독은 고립이라고 보는 <낭송의 달인,호모큐라스>(고미숙,북드라망)과는 다른 관점이다.) 독서보다 몸으로 하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주장에는 독서가 체험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체험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또한 독서라는 간접경험을 통해 체험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독서를 통해 자신이 풍성해진다는 애긴데, 이를 위해서는 내면의 마찰을 일으키는 책을 읽으라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시종일관 책을 사서 보라고 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아서 읽고, 중요한 문장을 필사한 후 반납하는 나로서는 심히 거슬리는 대목이었다. 저자가 책을 강매(?)하는 이유는 첫째, 돈을 들여야 긴장감있게 책을 읽을 수 있고(다치바나 다카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걸로 기억한다) 둘째 자신만의 책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위험한 출발점이다. 책장을 만드는 순간부터 지옥의 제1관문이 시작될지 모른다. 오키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을 보라. 책 무게 때문에 방바닥이 꺼지는 일은 유도 아니다. 도서관에 가서 총류코너를 찾아보라. 이 지옥의 천태만상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장을 만들게 되면 나만의 지도가 완성되고,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떠올리기 쉬워진다. 책장을 바라보며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강신주 선생님도 그래서 e-book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사라는 이유는 저자의 독서법과도 관련이 있다. 저자는 독서는 스포츠라며 독서력을 높이는 단계를 기술하고 있는데(독서 역시 피아노 연습처럼 계속해야 좋은 연주를 하며 즐길 수 있다.) 듣기, 음독하기, 묵독하기, 삼색 볼펜을 사용하여 책에 밑줄긋기이다. 이런 독서법을 따르려면 당연히 책을 사야 한다. 저자에게 책은 소비재가 아니라 자신이 보낸 시간의 한 부분이다. 밑줄을 긋는 순간 그 책은 자신만의 것이 되어 버린다.(알라딘에 팔 수도 없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책의 내용을 떠올리기도 쉽고, 책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긴장감 있는 독서를 할 수 있다.

저자는 출판문화진흥을 위해서라도 책을 사라고 하는데(아닌게 아니라 조금 전 출판업계가 고사 직전 이라는 신문기사를 보기는 했다) ... 이럴려면 자기만의 주거공간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않을까. 2년마다 메뚜기로 이사를 해야 하는 사람에게 장서는 큰 부담이다. 만만한 서재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공간을 장서로 채울 수 있겠지만, 열악한 주거공간을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 도서관은 구원의 장소다. 저자는 도서관에서 절판된 책을 구하고, “책의 지도를 그릴 수는 있지만, 자신은 대여해서 책을 읽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는 책을 대여해서 읽고, 중요한 문장은 필사하고 다시 반납하는데 책을 읽은 경험을 떠올리려면 필사한 문장을 보면 되고,(사이토 다카시도 책을 기억하고 싶으면 필사하라고 한다.) 반납할 책이기 때문에 긴장감있게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다. 단점은 문장을 필사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아마 이 점이 저자에게 가장 고깝게 여겨지지 않을까. 저자는 음독을 소개하며 예전에는 독서가 신체적 행위였고 수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여건상 자신은 정신적 긴장을 수반하는 독서(묵독)”를 권한다고 하는데, 그 밑바탕에는 책은 정보에 가깝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미 모래알만큼 많은 책이 깔려 있고, 책을 요약할 수 있다면 통독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더 많은 책을 읽기 위해서다. 문장을 일일이 필사하는 것보다 책에 밑줄을 긋는게 훨씬 빠른 독서일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에 독서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라는 주장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여기서는 저자가 말하는 대화의 요령이 오히려 주목할만 하다. 요는 독서가 대화의 맥락을 더 잘 파악하게 한다는 것인데 일종의 테니스게임처럼 대화라는 과정을 묘사한다.

 

입덕은 신중해야 한다. <책장의 정석>(나루케 마코토,비전피엔피) 같은 책이 나올 정도로 책에 집착하는 책중독자들이 있다.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톰 라비, 돌베개)에 나오는 것처럼 책은 이들에게 일용한 양식이고, 책중독은 은근한 자랑질이기도 하다.(장서의 괴로움, 오키자키 다케시,정은문고).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고양이 빌딩을 사지 못할 바에야 책덕후에는 고난의 길이 있을 뿐이다. 멋모르고 이 요지경의 세계에 입덕했다간 일터에서 쫓겨나고(왜냐면 당신은 사무실 서류더미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책을 읽을 테니까), 인간관계는 파탄에 이르고(왜냐면 당신 애인이 더 이상 서점에서 데이트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집에서도 쫗겨날 것이다.(당신 집은 이제 처치불가능한 책들로 거주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책이라는 술의 유혹도 만만찮은 것이어서 이 책을 읽고나면 어느 정도의 장서는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죽하면 피에르 바야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패러덕스) 같은 책을 썼을까. 나는 아직도 이 책이 피에르 바야르가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슬픔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기만술이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소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에는 도서관 방문객을 납치해서 공부를 시킨 다음 그 사람의 뇌를 먹는 악당이 나온다. 공부를 한 다음의 사람의 뇌수는 쫄깃쫄깃한 응어리가 들어있어 맛있다나 뭐라나.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머릿 속에서 음악이 들리는 것 같아하는 약간 뽕맞은 느낌이 든 적이 있다.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나를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 낭송Q 시리즈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씨네21에 실린 게임평론에서 한 평론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청각,시각,촉각,후각,미각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자신은 시각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눈으로는 맛볼수도 있고, 들을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단다. 카프카는 폐렴에 걸려 맥주를 마실 수 없게 되자 술집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맥주를 사주며 그 사람이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아마 지금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심리와 유사하지 않을까 한다. 영화나 연극을 보고 공감하는 것도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대리체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시각이 우리의 감각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인데 <호모 큐라스>에서 고미숙 선생님은 오히려 <청각의 복원>을 주장한다.

이 분의 공부에 관한 열정은 어디까지일까? 수유너머에서 시작해서 남산 감이당까지, <공부와 백수의 공동체>를 운영하고 <호모 쿵푸스>에서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저자는 <호모큐라스>에서 공부의 “새로운 사잇길”을 찾아낸 것 같다. 그 사잇길은 우리가 공부하고 하면 익히 떠올리는 “묵독”이 아니라 “낭독과 구술, 낭송”이다. 일반화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가 예전보다 몸을 쓰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대체로 차로 이동하고, 티비와 컴퓨터를 의자에 앉아 시청하며 보내는 우리의 신체적 활동이다. 고미숙씨는 영화 <아바타>와 <인상여강>을 대비시키며 시각과 청각을 대비시킨다. 시각을 이미지, 환영으로 치환하며 시각보다는 청각이 우리의 신체성을 표상하며 신체성이 잠식되어 야생을 갈구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리, 청각의 복원이라고 주장한다. 말할 때 우리는 현재시점에서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몸을 쓰는 것이다. 말을 할 때의 단순한 의미 뿐만 아니라 소리와 파동이 우리의 뼈에, 우리의 몸에 새겨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최순실 시국에 이런 표현을 쓰고 싶진 않지만, 우주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원천도 소리와 파동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소리와 파동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저자의 지적편력을 보면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이 있는데 이 대목에서 이런 지적편력이 백그라운드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대목에서 설득력이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지금껏 상대적으로 우리가 외면한 소리, 청각, 말하기에 중요성을 상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시사점이 될 것 같다.

이런 전제에서 저자는 이러한 소리와 파동의 철학을 낭독, 낭송이라는 공부의 방법과 연결시킨다. 저자가 보기에 묵독은 신체를 쓰지 않는 <뇌의 특권화>이며 고립이고, 체화되지 않은 정보일 뿐이다. 그리고, 체화되지 않은 정보는 삶에 활용할 수 없다. 묵독과 연결되는 암기는 뇌의 비대화를 가져오는 정보의 집적일 뿐이고, 텍스트를 고정화시켜 비판,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에 비해 낭송은 텍스트를 새로 생성하는 창조이며 청중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소통의 장이다. 그리고, 정보가 아닌 체화되는 지혜이다. 저자는 친구들끼리나 학교에서 낭독회를 가져보는 것이 소통의 장이 될 것이며, 수학,물리학에서 말로 읊조리고 표현하는 소리의 공부법이 또다른 알찬 공부방법이 될 것이라고 한다. 낭송 후 내용은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소리와 파동은 몸에 새겨질 것이므로.(여기에서도 <동의보감>적인 시각이 끼어든다.)

이렇게 한 공부는 결국 삶을 변화시키는 <양생의 기술>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또다시 동의보감적 시각) 낭송이 가진 신체성이 몸을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증에는 열하일기, 불면증에는 목민심서가 좋을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마지막에 산책을 하면서 낭송을 하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마치 철학자의 산책처럼, 저자가 꿈꾸는 삶의 한 이미지일 것이다. 더 나아가 손으로 직접 필사하는 신체성을 더한 후 최종적인 지성의 산출을 도모한다. 저자는 이책을 시작으로 낭송시리즈 28권을 출간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책은 일종의 총설이다.

저자가 동의보감과 사주명리학에 관심을 가진 동기가 “왜 공부를 해도 삶이 바뀌지 않는가”라는 질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낭송과 듣기는 결국 앎이 신체와 만나야 한다는 결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여러 책을 읽는 다독가에게는 좀 뜨악한 애기일 수도 있다. 어떻게 모든 책을 낭송한담? 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택스트를 접하는 복원된 경로 중 하나라고 받이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약발이 좋다고 저자가 강조하니 속는 셈 치고라서도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불면증과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저자가 묵독의 폐해를 늘어놓는데 이걸 읽고 그나마 하던 묵독마저 팽개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은 금서가 아니라 책 자체를 금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강신주 선생님 인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홀로 부모를 떠안다 - 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난 사회
야마무라 모토키 지음, 이소담 옮김 / 코난북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부모님께서 부쩍 나이가 드셨다. 아버지는 팔십, 어머니는 칠십이 넘으셨는데 아직 정정하시다. 아직 내가 <개호介頀>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역시 이 책은 내게 남다르게 읽혔다. 물론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대부분 부모님에게 애틋함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호 때문에 자식과 부모가 서로 날을 세우는 이 책의 일화들은 가슴이 아프다. 개호 때문에 결혼과 일상을 포기하고 자식들은 부모를 돌본다. 효자라는 주변의 시선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오히려 부모에게 기생한다라는 시선을 개호자들은 느낀다고 한다. 책에 나오는 문장대로 즐거운 개호는 없다”.

개호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우울감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개호는 부모와 자식간의 닫힌 세계이기 때문에 고립된 세계다. 저자는 개호자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이 고립감이라고 한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큰 도움이 된다고, 개호를 미리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결국 <관계부족>이 원인이라고 저자는 진단하는 것 같다. 저자는 독신자가 부모를 떠안은 개호 스타일을 주목하는데 독신개호자가 미혼으로 생애를 보내게 되고 또다시 고립된 노령자가 되는 악순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본은 이런저런 보완책과 서비스가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서평에서 그래도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천국이라는 취지의 글을 본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비슷한 느낌이 든다. 부족하나마 여러 가지 개호보험과 의료지원서비스가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시작되고 갑자기 끝나는 개호, 결국 문제는 죽음으로 수렴된다. 개호 후에는 예외없이 후회가 남는다고 한다. 그래서,개호 중에는 이를 항상 염두에 두라고 한다.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그래도 나이드신 부모님은 나를 짠하게 한다. 개호라는 상황은 러시안 룰렛처럼 사람을 덮친다고 저자는 환기시킨다. 어머니, 아버지 내가 기억하는 모습들은 전부 과거가 되어버리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누군가처럼 같이 죽자고 부모님께 악을 쓸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쪽이 가라앉았다. 최근에 읽은 책들 중의 키워드가 <관계>였다.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예전에는 수명이 짧아 개호문제라는 게 그리 부각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풍성한 가족이나 기타 친족관계가 서로를 의지하는 계기가 되질 않았을까. 1인가구가 대세인 요즘 우리 모두 마음 한 구석에는 누군가를 절실히 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비를 그만두다 - 소비자본주의의 모순을 꿰뚫고 내 삶의 가치를 지켜줄 적극적 대안과 실천
히라카와 가쓰미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1인가구가 이제는 대세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사회단위로 등장한 개인이 모든 것을 시장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이다. 돈이 사회를 살아가는 안전망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뭐니뭐니해도 money가 최고라는 수십년전 농담)

문제는 이제 사람들이 앞으로 돈을 획득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진다는 거다. 일본의 경제성장은 성숙기에 도달했고, 저출산에 고령화, 총수요 감소가 진행중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불행히 겪어보지 못했지만 돈의 유동성이 지극이 높아지면 설사 벌이가 많더라도 인간성 자체가 소모된다고 한다. 40년이상 사업을 해온 저자의 경험담이란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현재 진행중인 “내리막 사회”에서 말이다.저자는 돈 대신 “관계”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고리가 안전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지연”을 강조한다. 여기서 지연은 어디 출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얼굴있는 소비자”가 되어 장소와 결합하는 것이다. 익명의 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매력 때문에 도시화가 진행되고 화폐경제가 발전했다면,이제 다시 “얼굴있는 소비자”가 되어 지역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여기서 평소 저자가 주장하는 “소상공인”의 개념이 연결될 것이다. 대형할인점의 지역파괴와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예로 들면서 저자는 교환가치이고 본질적으로 유동적인 화폐는 평온과 충족감을 주는 삶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애기한다. 가족간의 결속만 중시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미국은 공허한 나라이며 후세에 실패한 나라로 기록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저자가 깨달은 것은 현대인의 과잉소비는 과잉스트레스에서 온 공허감을 메꾸기 위한 대상행동이며, 소비에 대한 욕망은 안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생활 속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게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이나 고미숙씨의 “호모 꼬뮤니타스” 같은 책에서 줄기차게 애기된 것이기도 하다. 증여를 하고 관계를 만들으라는 것. 게다가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삶이 피폐해지는 것이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아닐까. 삶과 일이 함께 가는 것은 소수의 행운아에게나 해당하는 일이다. 아마 저자가 주장하는 소상공인이라는 개념도 아마 이런 행운아에 관한 애기아닐까.

 

저자의 애기가 여러 방면에 조금씩 걸쳐있고, 단문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 눈에 조망이 들어오진 않는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는 구체적인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게 슬프다. 월마트가 아니라 동네소매점에 가 본다고 해보자. 물론 첫걸음이지만, 안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삶이 갑자기 나올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저자도 지적했듯 과거의 지역공동체는 토대이자 동시에 구속이었다. 이미 자유의 맛을 본 익명의 개인들이 타인을 어느정도까지 받아들이려고 할까. 혼밥과 혼술남녀가 유행하는 지금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설정이란 철학적이기까지 한, 만만찮은 주제일 것이다. 그리고, 하루종일 원거리 지역에서 근무하고 저녁과 주말만 집에서 보내는, 야근에 쩌는 직장인들에게 지역공동체는 먼나라 애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요컨대, 노동과 삶, 사람사이의 관계가 총체적으로 엮여 있어 저자의 애기가 실감이 나지 않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애기가 어떤 단초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동네 소매점에 한번 가보자. 소비를 줄이고 그걸 동력으로 다른 노동양식도 상상해보자. 조금씩 조금씩 실천해보면 저자가 말하는 안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있고, 그 곳에서 가족, 친구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행복을 느끼는 존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힘이 정의다
래그나 레드비어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영림카디널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게 이 책의 골자다. 무난한 애기 같은데 옮긴이 해설이 심상찮다.

   

       “용기가 있으면 읽어보라”(옮긴이 해설중)

 

과연 서문을 몇 장 넘기고 나면 감정의 파도가 순류,역류를 반복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진부하면서도 가슴뛰게 하는 명제를 누군가에게는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논리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래그나 레드비어드”라는 익명의 저자가(영화로 치면 알란 스미시?) 묘사하는 세계는 철저한 적자생존의 세계다. (그 근거는 명확치 않다. 저자는 그게 “자연적”이라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강자가 약자를 포식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평등이니 우애니, 희생이니 하는 것은 기독교(책에는 “형틀에 매달린 유태인 노예”라는 표현이 나온다. )가 만들어낸 헛소리며 사기극이다. 그리고, 강자를 결정하는 것은 혈통이다. 전사는 전사의 피에서 밖에 나올 수 없는데, 흑인이나 중국인, 유태인 등은 글러먹은 노예근성에 찌든 민족이다. 그들은 당연히 금빛 머리털을 가진 강자들의 희생물로 존재해야 한다. “민중은 개돼지”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이 책에 딱 들어맞는다. 여성혐오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 책에 나오는 문장을 메갈에다 올리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저자가 말하는 힘이라는 것도 단순해서 칼, 무기, 육체적인 힘 같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남자들이라면 초등학교 때 한번쯤 겪었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같은 상황이 저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이상적이기까지 하다.

이쯤되면 “19세기에 웬 일베?”라고 하면서 책을 던져버리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사회비판이 그대로 현재의 모습과 중첩된다는 것이다.

 

“헌정수립 이후 백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인의 10퍼센트가 전체 재화의 92퍼센트를 절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자를 위한 법 따로 있고, 빈자를 위한 법 따로 있다“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있는 속담이다.... 실제로 ‘저울의 추’는 투표함 속의 수천만 표보다 물리적 과단성을 갖춘 말없는 실세 열 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현실 아닌가?”

 

“힘들고, 지속적인, 규율에 맞춰 강요된 노동은 용기를 파괴하고, 생기를 고갈시키며, 성격을 버려 놓는다.... 딱하여라, 벌벌 떠는 저 가련한 자들! 자기가 흘리는 땀으로, 아니 심장이 쏟아내는 피로 자신의 손을 씻는구나! 타고나기를 노예인 자들이여, 나면서부터 실성한 자들이여!”

(강신주 선생님이나 고미숙 선생님이 평소 말하는 “정규직노예론”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너희가 자유인이라고? 꿈깨라,이 개돼지들아!”(실제로 책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많이 나오니 관심있으시면 직접 읽어보시길. 비아냥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러고 보니 강신주 선생님도 철학강의 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향욱씨의 발언에 사람들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는 자신들이 개돼지라는 것을 들켰기 때문이라고.(벙커1 철학강의 홉스vs클라스트르 편. 동영상으로 시청 가능하다.진지하게 한 애기는 아니니 또 너무 흥분하지 마시길) 여기서 이 “19세기의 일베”는 묘하게도 반역과 혁명의 기운을 부채질한다.

 

“너에게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라. 너와 싸우려는 자들과 전쟁하라.... 굴종하며 사느니 깨끗이 죽는게 낫지 않겠나?... 삶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소중하게 여겨지는가? 세상에는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수치스러운 삶이다”

 

영원한 강자는 없다. 오늘의 강자는 내일의 강자에 의해 반드시 쓰러져야 한다. 수치스럽게 살지 말고 싸워라! 만약 그러다 실패하면? 그럼 죽으면 된다!. 죽음은 탄생만큼 사랑스러운 것이다. 삶은 어둠 속에서 잠깐 반짝이는 불빛에 지나지 않는다. 그깟 삶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도덕이니 정의니 신이니 법이니 하는 것은 너를 지배하는 자들이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편의에 불과하다. 자연에서 정의는 상대를 제압하는 힘이다! 옳고 그름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 내면의 결정에 따라라!

읽고 나면 일종의 프로파간다같다는 느낌도 든다.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보다는 비유와 뉘앙스를 사용하며 마음껏 내지르기 때문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이라는 도덕교과서에 나올만한 애기를 도덕교과서를 깔아뭉개며 주장하는 셈이다. 저자는 타성에 젖은 구제불능의 노예들을 깨우기 위해 독도 잘 쓰면 약이라는 생각을 한 걸까. 그래서, 나치를 연상케하는 인종주의와 곰팡내나는 낡은 여성혐오를 흩뿌려 놓은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느낌에 저자는 인종주의자에다 여성혐오자이다. 하지만, 코브라의 독도 쓰기 나름이라고 나같이 스테로이드 부족 남성들에게는 이 이야기는 꽤 신선하게 다가올 듯 싶다. 물론 쫄파메일이 알파메일에게 져서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긴 하지만 말이다.

 

추신: 강신주 선생님이 강의 중에 한 말-“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의 문제는 ,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죽는다는 거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