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ᆢ 예수 시체를 과연 들개가 먹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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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는 삶
알렉상드르 졸리앙 외 지음, 송태미 옮김 / 율리시즈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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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스님 , 정신과 의사가 마음과 관련한 여러가지 대화를 나눈다. 우리가 살면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들, 흔하다보니 딱지가 앉아서 이제는 그냥 무심히 넘어가는 문제들에 관한 애기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얼까? 왜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연연할까? 분노나 좌절같은 부정적감정과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의 실천을 어떻게 해야할까?

 

  세 명의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보니 이야기의 물줄기가 물 위에 떨어트린 물감처럼 사방으로 퍼진다. 말 한마디 마다 화자의 내공이 들어있어 내용을 곱씹게 되고 , 요약하기가 쉽지않다. 나는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곤 하는데 이렇게 많은 문장을 필사하기는 "딜라이라마의 행복론"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상처받지 않는 삶, 그런게 가능할까? 이 책을 읽고 나도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는 "한방"같은 것은 없다. (있다면 오히려 경계할 일이다.) 철학자, 스님, 정신과의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바라본 진실을 각자의 어조로 말할 뿐이다. 전체적인 느낌은 불교적인 세계관이 짙게 깔려있다. (마티유 리카르는 스님이고, 철학자 알렉상드르 졸리앙은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한국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고,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토프 앙드레는 명상을 심리치료 기법으로 사용한다) 

  모든 것은 변하니 집착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안의 진실한 나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한 나를 찾을 때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고,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용골이 튼튼히 박힌 배와 같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진정한 행복은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에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에고의 쾌락이 아닌 내면의 평화라고 애기한다. 철학자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이야기하며 물꼬를 트면(장애인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갈등은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 스님인 마티유 리카르는 불교이론으로, 정신과의사인 크리스토프 앙드레는 좀더 현실적인 심리치료를 이야기하는 식이다. 추상적인 단어들이 많고 , 명상, 기도, 영적 수행같은 어찌 보면 미적지근 한 내용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해서 전부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닐 것이다. 타인을 도울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새로 나온 테슬라의 전기차를 사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일지도 모른다....

 

  결국 "상처받지 않는 삶"에 도달하는 비방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명상, 기도, 이타심 같은 매일매일의 실천이 있을 뿐이다. 철학자,스님, 정신과의사 모두 자신의 부족함을 털어놓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자유와 지혜, 깨달음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독자에게 보내는 감사의 글 중)

 

   그래요, 스님, 철학자선생님, 의사선생님,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정말, 정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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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으로부터의 해방 - 탈성장 사회로 가는 길
니코 페히 지음, 고정희 옮김 / 나무도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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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계속 이렇게 살면 우리 모두 앞으로 X될거니까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다. 저자가 진단하는 문제는 두 가지다. “환경파괴”와 “부채”. 이 책에서는 이걸 기본 베이스로 깔고 논리를 전개하는데 결론은 우리 모두 소비를 줄이는 게 대안이다. 막시즘은 잉여가치를 놓고 벌이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을 다뤘다. 하지만, 그 잉여가치 자체가 환경파괴를 통해 부당하게 얻어진 것이라면? “착취”의 정의가 본인의 수고와 전혀 비율이 맞지 않는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라면 자본가나 사업가들만이 착취자가 아니다. 소비라는 것 자체가 극히 효율적인 착취의 도구다. 더욱이 생태계의 파괴를 전제로 하여 얻어진 것이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결국 환경의 착취로부터 나왔음을 주장한다. 기술향상, 분업으로 효율 증가 등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결국 더 많은 환경 에너지를 투입해서 만든 결과이다. 혹자는 녹색성장을 애기하지만 이것은 기만이다. 인프라 구성에 투입되는 자원부터, 신기술은 새로운 유해물질을 발생시킨다. 전세계가 부유한 소비자로 가득하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지구가 몇 개 더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내놓은 결론은 하나다. 책제목과 같은 “성장으로부터의 해방”. 생활방식의 변화만이 진정한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의 결별이기도 하다. 저자는 간단한 모델로 자본주의가 이윤을 내기위해서는 성장에의 압박에 직면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경제학 수업을 떠올리면 되는데 간단하게 소개 되어 있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말자. 내가 중학교 때 미술선생은 수업시간에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온 애기를 들려줬다. 단체 신혼여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는 커플이 있을까? 서울에 사는 나에게 이제 심리적으로는 부산보다 제주도가 가깝게 느껴진다. 저가항공을 이용해 한 시간이면 제주도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항공여행에 대해 비난을 늘어놓는다. 저가항공은 국가의 보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껏 평생동안 딱 한번 비행기를 이용했다고 한다.)

저자가 내세우는 대안은 “절제”와 “자급”으로 요약된다. 언뜻 생각하면 궁색해지자는 애기 같은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일종의 윤리의식을 도입한다. 책임감 있게 소비하는 사람이 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 대목에서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 애기가 씨알이 먹힐까? “지들은 다 해먹고, 왜 우리는 안된다고 해?” 라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한번 익힌 소비습관을 줄인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나 너나 다들 근시안적 인간 아닌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지금 살던대로 살아갈 것이다. 이미 돈으로 무엇을 사서 생활 구석구석을 채우는게 우리들의 삶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절제는 궁색함이 아닐까? 절제와 무기력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지만, 여기서 잠깐, 만약 돈이 불행의 씨앗이라면? 저자가 말하는 행복은 “인간관계,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소속감,능력을 인정받는 것, 자기구현, 건강, 안전, 및 온전한 환경 등”에 기원한다. 저자가 내놓은 반전은 이러한 가능성을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 현재의 분업시스템에서는 마르지 않는 원천인 돈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각자의 능력과 시간을 분업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현재의 부와 소비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는 자원을 좀먹는다. 돈은 썩지 않지만 우리는 늙는다! 그것도 금방!

그럼 자급하는 데에는 시간이 들지 않나? 저자는 시장의존적인 삶은 결국 무기력하고, 불안을 가중시키는 삶이며, 자급이 주는 성취감과 충만감이 있다고 한다. 소비는 결국 피상적인 것이며 삶을 소진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직장을 그만두고 자급의 기술을 익혀야 할까? 살아가면서 보통 우리를 괴롭히는 것 중의 하나가 돈인데 돈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저자의 애기가 솔깃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몸에 좋은 유기농 음식이 맹맹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저자의 애기가 일반대중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갈까. 어디까지가 “적정소비생활”인지도 불분명하다. “탄소산출법”같은 애기를 하지만 신뢰성은 마뜩찮다. 아침에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럼 무슨 재미로 살란 말인가”하고 반문할 것이다.

결국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급의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하는 강제일 것이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경기불황이나 최악의 더위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스스로를 제어하지 않으면 언제가 운명적인 힘이 그 일을 대신할 것이며, 그 때는 부드럽게 처리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어쨌거나 일과 관계에 치인 우리는 여전히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근시안적 인간들 아닌가. 인간이 그 정도로 현명했다면 세상은 진작에 좋아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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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
마크 보일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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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29세의 아일랜드 출신 남자가 돈 한 푼 안 쓰고 1년 살기에 도전한다-

자, 어떤 느낌이 드나? 나는 꼭 “물 한방울 마시지 않고 1년 살기”같은 느낌이 들었다. 돈을 많이 썼을 때 “출혈이 심하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이제 돈은 거의 혈액같은 느낌이 든다. 1인 가구인 나는 식료품과 옷을 돈을 내고 사고, 돈을 내고 술을 마시고 돈을 내고 주거지를 임대해 잠을 잔다. 돈은 혈액이고, 공기이다. 하지만, 마크 보일은 돈에 지배당하기 싫었고, 현재의 체제에서 환경이 파괴되는 광경을 참을 수 없었다. 프리이코노미라는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돈없이 1년살기에 도전한다.

  예상대로 “정상인”의 눈으로 보기에 이것은 가시밭길에 미친 짓이다. 자전거, 퍼스널 컴퓨터,휴대폰, 태양열 전지 등 기본적 인프라 이외에 전부 스스로 에너지를 창출해야 한다. 한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심지어는 씻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다. 신문으로 뒤를 닦으면 치질에 걸리지 않을까? 여자친구와 잠자리는 가질 수 있을까? 혹시 아프기라도 하면 어쩌지? 히치하이킹이 그렇게 쉽게 될까? (이 난리부르스를 직접 읽고 느껴보시기 바란다.) 그는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한 걸까? 아마도 저자가 보기에 지금은 극단의 시대이고, 그런 극단의 시대에는 그에 상응하는 고강도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 같다. 올해같이 찌는 듯한 무더위, 비싼 전력요금에 대한 원망은 있었지만, 이런 기후변화가 무분별한 환경파괴에서 왔다는 것과 닥쳐올지도 모르는 파국에 대한 걱정은 드물었다. 내가 근시안이겠지만 사실 자기의 실공간안에서 환경문제를 절실히 실감하는 사람이 있을까. 미세먼지가 많아지면 외출을 자제하는 정도이지 우리의 문명이 미세먼지를 가져온 원인 중 일부이고, 지금의 소비수준을 지구를 위해서 줄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항상 돈이 부족하다. 이미 풍족한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아 버렸다. 환경보호같은 거대한 주제는 뜨뜻미지근하게 다가올 법한데 저자에게 이 문제는 실험을 시작하게 된 주요한 동기이다. 그리고, 저자의 또다른 문제의식은 돈이 우리를 갈라놓고, 불평등과 인간에 대한 경멸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일을 한다면?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이며 행복은 거기에서 나온다. 이런 저런 책에서 읽을 수 있는 “순수증여”를 저자 역시 강조한다. “우주가 돕는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삶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할 것을 믿고, 누군가에게 증여를 한다면 반드시 보답이 돌아올 것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고, 관계는 강화될 것이며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안전해질 것이다. 저자의 최종목표는 교환이 아닌 증여로 이루어진 자급공동체이다.

  재미있는 것이 최근에 읽은 여러 가지 책들에서 키워드가 “증여”와 “공동체”라는 것이다. (고미숙 씨의 “호모코뮤니타스”나 우치다 타츠루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다가오는 저성장의 시대에서 지성인들이 제시하는 생존전략이다. 저자는 돈 한 푼 안 쓰는 1년 동안 행복했을까? 여기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믿을 수 없다. 이미 자신의 선판단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돈없이 살고 싶지만, 저자의 생활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증여를 하며 유대를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 지금 현재로는 오즈의 나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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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시대 - 근대적 여성성과 사랑의 탄생 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2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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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우리 문화의 핵심 코드는 사랑(혹은 섹스)이다. 마치 사회 전체가 무슨 열병에나 걸린 듯이 사랑을 갈구하고, 또 갈구한다”(p.157) 『연애의 시대』에서 바라보는 현대는 연애의 전성시대이지만, 그 연애는 분열적이다. 연애는 한없이 지고지순한 불멸의 멜로 환타지를 향하고 있고, 공적인 담론에서 사라진 성은 포르노그라피를 질주하고 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런 연애와 성의 분열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분열적인 모습이 연애의 본질일까? 저자는 연애의 기원을 추적하는 계보학의 관점에서 연애의 본질을 조망한다. 바로 우리나라의 근대성이 형성되기 시작한 1894년에서 1910년까지의 계몽기가 그 대상이다. 저자는 이 기간 동안 사랑이 어떻게 “탈성화” 되었는지를 <변강쇠가>, <덴동어미화전가> 등의 텍스트와 계몽기 신문에 실렸던 텍스트를 통해 고찰한다.

연애와 성은 어떻게 나뉘었는가

저자는 먼저 우리에게 “하드코어포르노”처럼 느껴지는 <변강쇠가>를 소개한다. <변강쇠가>는 성에 관해 억압적으로 여겨지던 중세에 공적인 공간에서 이야기되었으나, 근대에 이르러 그 모습이 사라졌다. 이것은 전근대로 갈수록 성에 대해 억압적이었다는 상식을 깨는 반증 아닐까? 그리고, 네 번이나 개가를 한 덴동어미 이야기를 그린 <덴동어미화전가>는 연애와 성이 일상의 삶이었고, 정절과 순결의 이미지와 멀었던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녀를 움직이는 건 윤리나 이념이 아니라, 일상, 곧 생계의 논리다...... 서민들에게 있어 생계란 곧 식食과 색色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115)

그렇다면 계몽기의 어떤 변화가 성이란 담론을 공적인 공간에서 추방했을까? 저자는 “애국심과 신앙, 순결과 비극성 등의 표상이 연애에 덧씌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몽기에 서구는 우리가 따라야 할 전범이었으며 당시의 모든 시대적 관심은 민족의 계몽과 역량강화에 쏠려있었다. 이러한 관심은 성담론의 배치도 변화시켰는데, 서구처럼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와 다른 조혼, 축첩 등 기존의 관습은 폐지되어야 했다. 또한 민족의 계몽이라는 이상에 복무하는 연애 역시 숭고한 것이어야 했다. “우수한 인종을 생산하는 것, 인구가 번성해야 한다는 것-이 두 가지가 성의 목표로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성은 국가의 철저한 통제와 관리 하에서 행해져야 한다.”(p85). “부부간의 열정조차 허용되지 않는 확고부동한 성적 규범화가 이루어지자, 성적 욕망은 쾌락의 수준을 넘어 악의 표상이 된다.” (p45)

여기에 계몽기에 유입된 기독교적인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이 더해지면서 연애와 성의 이분법이 완성된다.“연애는 거룩해야 한다. 신과 민족에 대한 숭배를 대체한 것이므로”(p108). 이런 이분법은 주체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데 “신과 민족의 이름으로 ‘탈성화’하는 훈련을 고도화해야 하고, 다른 한편 포르노와 사창가를 통해 성욕을 ‘음험하게’ 배설하는 노하우를 터득해야”(p.96)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국민이 되기 위해 호명된 주체는 나라는 자의식에 갇힌 채 접속불능의 연애 무기력증에 빠져든다. “근대국민국가는 명분상 개별적이고 독립된 주체들 사이의 계약관계를 전제한다.....마치 사람마다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따로 존재하는 듯이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유도한다” 결국 접속불능의 신체는 연애 무능력 상태에서 권태에 빠져든다. 이러한 이분법과 권태는 연애와 성을 삶의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 없게 만든다. “성적 욕망이 조금도 삶 속으로 진입하지 않고 있다는 것, 즉 삶의 능동적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p154)

사물에 대한 감수성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한국인과 미국인에게 물어보자. 한국인은 고양이가 “야옹야옹”, 미국인은 “음미냐옹,음미냐옹”하고 운다고 대답할 것이다. 같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왜 두 사람에게 다르게 들리는 것일까? (고양이 종자가 달라서 그렇다거나 한국인과 미국인의 신체구조가 다르다는 주장은 일단 접어두자.) 하나의 공통분모가, 그것도 가장 신체적인 감각이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감각이나 사물에 대한 감성이 시공간의 차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편 아닐까?

『연애의 시대』가 연애의 의미와 표상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르게 감각되는 것을 고찰한 것처럼, 사물에 대한 감수성은 스스로 자명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거시적인 흐름에 의해 형성되며, 어떤 시대적 필요에 의해 권장되기도 하고 배척되기도 한다. 『연애의 시대』에서 보여주는 현대 우리가 감각하는 연애와 성의 모습은 계몽기 시대의 민족, 계몽 같은 시대정신들의 자장 아래 형성된 것들이다. 민족의 계몽을 위하여 연애와 성은 통제되어야 했고,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는 연애는 신성한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숭고한 연애에는 오히려 폭력적인 면이 있는 것 아닐까 . “근대 이전에는 연애라는 감정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다”라고『연애의 시대』는 말한다. 숭고화된 연애는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의리나 우정 같은 관계들을 평가절하하고, 숭고함을 추구하도록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한다. 무엇이 숭고하다는 것은 당연히 그걸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 어려움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할 것인가, 고양시킬 것인가. 적어도 저자가 보기에 연애의 분열적인 숭고함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아래의 개인들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한 명의 개인이 하나의 시대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그 개인의 내부에 그 시대에 호응하는 요소가 이미 존재했기 때문 아닐까. 그런 개인과 시대와의 “교집합”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호응” 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스스로 연애가 숭고해지기를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계몽기에 대한 상황판단을 전제로 한 후 논리전개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그런 전제들에 의문을 가진다면 이 책은 여러 가지 사유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저자는 근대성 시리즈 3부작(『계몽의 시대』,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의 일부로 이 책을 저술했다. 우리나라 근대성 형성의 기원에 관해 더 의문을 갖는 독자라면 다른 근대성 시리즈를 일독함으로써 이 책의 이해를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자유

『연애의 시대』에서는 민족, 계몽 같은 하나의 시대정신이 그 시대의 전체적인 감성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고찰한다. 이 방법은 지금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감수성이나 관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한다. 지금 여기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고, 지금 여기를 바꾸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 진실을 본 것처럼, 이런 계보학적인 관점은 연애를 포함하여 지금 여기를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망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선망하는 연예인의 아름다움조차 상대적인 것 아닐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선사시대의 비너스는 뚱뚱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의 이상화된 연애와 사랑이 우리를 옥죄는 족쇄로 작용한다면-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지만- 그 족쇄를 부술 때 우리는 하나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연애와 사랑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덧붙여 우리 주변에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들을 한 번 찾아보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유를 조금씩 늘릴 수 있을 여지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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