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시대 - 근대적 여성성과 사랑의 탄생 고미숙의 근대성 3부작 2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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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우리 문화의 핵심 코드는 사랑(혹은 섹스)이다. 마치 사회 전체가 무슨 열병에나 걸린 듯이 사랑을 갈구하고, 또 갈구한다”(p.157) 『연애의 시대』에서 바라보는 현대는 연애의 전성시대이지만, 그 연애는 분열적이다. 연애는 한없이 지고지순한 불멸의 멜로 환타지를 향하고 있고, 공적인 담론에서 사라진 성은 포르노그라피를 질주하고 있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런 연애와 성의 분열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삶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분열적인 모습이 연애의 본질일까? 저자는 연애의 기원을 추적하는 계보학의 관점에서 연애의 본질을 조망한다. 바로 우리나라의 근대성이 형성되기 시작한 1894년에서 1910년까지의 계몽기가 그 대상이다. 저자는 이 기간 동안 사랑이 어떻게 “탈성화” 되었는지를 <변강쇠가>, <덴동어미화전가> 등의 텍스트와 계몽기 신문에 실렸던 텍스트를 통해 고찰한다.

연애와 성은 어떻게 나뉘었는가

저자는 먼저 우리에게 “하드코어포르노”처럼 느껴지는 <변강쇠가>를 소개한다. <변강쇠가>는 성에 관해 억압적으로 여겨지던 중세에 공적인 공간에서 이야기되었으나, 근대에 이르러 그 모습이 사라졌다. 이것은 전근대로 갈수록 성에 대해 억압적이었다는 상식을 깨는 반증 아닐까? 그리고, 네 번이나 개가를 한 덴동어미 이야기를 그린 <덴동어미화전가>는 연애와 성이 일상의 삶이었고, 정절과 순결의 이미지와 멀었던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녀를 움직이는 건 윤리나 이념이 아니라, 일상, 곧 생계의 논리다...... 서민들에게 있어 생계란 곧 식食과 색色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115)

그렇다면 계몽기의 어떤 변화가 성이란 담론을 공적인 공간에서 추방했을까? 저자는 “애국심과 신앙, 순결과 비극성 등의 표상이 연애에 덧씌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몽기에 서구는 우리가 따라야 할 전범이었으며 당시의 모든 시대적 관심은 민족의 계몽과 역량강화에 쏠려있었다. 이러한 관심은 성담론의 배치도 변화시켰는데, 서구처럼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와 다른 조혼, 축첩 등 기존의 관습은 폐지되어야 했다. 또한 민족의 계몽이라는 이상에 복무하는 연애 역시 숭고한 것이어야 했다. “우수한 인종을 생산하는 것, 인구가 번성해야 한다는 것-이 두 가지가 성의 목표로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성은 국가의 철저한 통제와 관리 하에서 행해져야 한다.”(p85). “부부간의 열정조차 허용되지 않는 확고부동한 성적 규범화가 이루어지자, 성적 욕망은 쾌락의 수준을 넘어 악의 표상이 된다.” (p45)

여기에 계몽기에 유입된 기독교적인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이 더해지면서 연애와 성의 이분법이 완성된다.“연애는 거룩해야 한다. 신과 민족에 대한 숭배를 대체한 것이므로”(p108). 이런 이분법은 주체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데 “신과 민족의 이름으로 ‘탈성화’하는 훈련을 고도화해야 하고, 다른 한편 포르노와 사창가를 통해 성욕을 ‘음험하게’ 배설하는 노하우를 터득해야”(p.96)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국민이 되기 위해 호명된 주체는 나라는 자의식에 갇힌 채 접속불능의 연애 무기력증에 빠져든다. “근대국민국가는 명분상 개별적이고 독립된 주체들 사이의 계약관계를 전제한다.....마치 사람마다 고유한 아이덴티티가 따로 존재하는 듯이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유도한다” 결국 접속불능의 신체는 연애 무능력 상태에서 권태에 빠져든다. 이러한 이분법과 권태는 연애와 성을 삶의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 없게 만든다. “성적 욕망이 조금도 삶 속으로 진입하지 않고 있다는 것, 즉 삶의 능동적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p154)

사물에 대한 감수성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한국인과 미국인에게 물어보자. 한국인은 고양이가 “야옹야옹”, 미국인은 “음미냐옹,음미냐옹”하고 운다고 대답할 것이다. 같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왜 두 사람에게 다르게 들리는 것일까? (고양이 종자가 달라서 그렇다거나 한국인과 미국인의 신체구조가 다르다는 주장은 일단 접어두자.) 하나의 공통분모가, 그것도 가장 신체적인 감각이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감각이나 사물에 대한 감성이 시공간의 차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편 아닐까?

『연애의 시대』가 연애의 의미와 표상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르게 감각되는 것을 고찰한 것처럼, 사물에 대한 감수성은 스스로 자명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거시적인 흐름에 의해 형성되며, 어떤 시대적 필요에 의해 권장되기도 하고 배척되기도 한다. 『연애의 시대』에서 보여주는 현대 우리가 감각하는 연애와 성의 모습은 계몽기 시대의 민족, 계몽 같은 시대정신들의 자장 아래 형성된 것들이다. 민족의 계몽을 위하여 연애와 성은 통제되어야 했고, 민족과 국가에 봉사하는 연애는 신성한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숭고한 연애에는 오히려 폭력적인 면이 있는 것 아닐까 . “근대 이전에는 연애라는 감정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다”라고『연애의 시대』는 말한다. 숭고화된 연애는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의리나 우정 같은 관계들을 평가절하하고, 숭고함을 추구하도록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한다. 무엇이 숭고하다는 것은 당연히 그걸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 어려움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할 것인가, 고양시킬 것인가. 적어도 저자가 보기에 연애의 분열적인 숭고함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아래의 개인들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한 명의 개인이 하나의 시대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그 개인의 내부에 그 시대에 호응하는 요소가 이미 존재했기 때문 아닐까. 그런 개인과 시대와의 “교집합”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호응” 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스스로 연애가 숭고해지기를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계몽기에 대한 상황판단을 전제로 한 후 논리전개가 이루어진다. 때문에 그런 전제들에 의문을 가진다면 이 책은 여러 가지 사유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저자는 근대성 시리즈 3부작(『계몽의 시대』, 『연애의 시대』, 『위생의 시대』)의 일부로 이 책을 저술했다. 우리나라 근대성 형성의 기원에 관해 더 의문을 갖는 독자라면 다른 근대성 시리즈를 일독함으로써 이 책의 이해를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자유

『연애의 시대』에서는 민족, 계몽 같은 하나의 시대정신이 그 시대의 전체적인 감성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고찰한다. 이 방법은 지금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감수성이나 관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한다. 지금 여기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고, 지금 여기를 바꾸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 진실을 본 것처럼, 이런 계보학적인 관점은 연애를 포함하여 지금 여기를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망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선망하는 연예인의 아름다움조차 상대적인 것 아닐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선사시대의 비너스는 뚱뚱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의 이상화된 연애와 사랑이 우리를 옥죄는 족쇄로 작용한다면-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지만- 그 족쇄를 부술 때 우리는 하나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연애와 사랑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덧붙여 우리 주변에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들을 한 번 찾아보고 그것이 당연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유를 조금씩 늘릴 수 있을 여지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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