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형님께서 권해주신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형님께서도 제가 나잇값 못한다는 애기를 들으셨는지 이삼십대에 어울릴만한 인생론을 권해주셨더군요. 요새 멘토, 힐링 바람이라는데 이 분도 그런 멘토들 중에 하나인가 봅니다그려. 과연 약력을 보니 빠지지않는 학력에 한 분야에서 대가를 이룬게 치열한 경쟁을 앞둔 이들에게는 <서바이버>가 하는 말처럼 들릴 겁니다. 물론 아직 미욱한 저로서는 이 사람 말에 딱히 이의를 제기할 마음도 없고, 형님께서 보신대로 나잇값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이 사람 말을 충분히 새겨야 할 듯 싶습니다.
“현재를 살아라”,“제대로 보라”,“자기자신 내부의 점을 이어라”,“권위에 굴복하지 마라” 등등 ..우리가 익히 알고는 있지만 실천은 하지 못하는 덕목들을 다시 재미있게 자기 체험을 곁들여 가며 풀어놓았더군요. 이 분은 특히 <주체적인 삶>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인생.... 저자의 이 여덟 단어들을 결국 주체성라는 한 단어로 수렴됩니다. 아마 “. 자신의 내부에 기준점을 잡고”, “동의되지 않는 권위들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현재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는” 삶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 역시 읽고 나면 이제 막 스타트라인에 선 마라톤 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전의가 느껴지게 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배웠다는 식자들이 흔히 비하하는 자기계발서와 이 책과의 차이점은 뭔가요? 이 저자가 취하는 관점이 진보적(?)이기 때문인가요? 저는 이제 A를 하면 B가 된다라는 식의 “인과론”을 믿지 않습니다. A는 A일 뿐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A를 한다면 A밖에 할 수 없거나  A 그 자체가 가치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나 다양한 결을 가지는 현실에서 A가 B를 불러온다는 확신은 저는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자신의 내부의 점을 잇고”,“현재를 주시하며”,“본질을 추구”하고서도 교수가 되지 못하고, 책도 쓰지 못한 수많은 강판근씨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누군가 주체적으로 살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은 주체적이지 않은 삶이 그에게 삶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그가 만약 굴종을 피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린다면 그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서바이버 박웅현이 기회는 언젠가 온다고 했으니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지금부터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라고 마음먹는 다면 그게 무슨 꼴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기회라는 게 뭡니까. 광고제 대상인가요? 광고제에서 대상을 받지 못해도 충만한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 하나 책을 읽으면서 못내 껄끄러웠던 것은 저자가 자신이 비판하려고 했던 외부의 권위를 다시 인용하는 것 같았다는 점입니다.“자존” 편에 인용된 강판근 교수가 교수가 되지 못했다면,이름난 책을 쓰지 못했다면 이 “자존”편에 인용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결국 권위를 비판하는 주장을 해 놓고, 자신의 주장의 설득력을 얻기 위해 , 자신이 비판하려 했던 외부의 권위를 다시 인용한 꼴 아닐까요. 사람들이 권위에 굴복하고 자존을 찾지 못하는 것은 주변의 환경이 그런 삶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좋은 말을 차고 넘치는데 왜 삶과 세상은 요지부동인지가 더 궁금합니다.
 저자의 원래 목적이 강의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면, 좀 더 깊이 있게 내용을 전개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8개의 단어를 가지고 한 단어마다 한권의 책을 쓰는게 나을 듯 싶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애기 하지 않은 담에야 이 애기들이 사람들에게 체화되겠습니까. 읽고 나면 포만감은 들겠지만 당연히 바뀌는 것은 없겠지요.
 그나마 제가 책에서 위안을 느낀 대목은 저자가 40대를 “만혹”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서른평 아파트에 아내와 딸이 있는 저자의 처지가 저와는 심히 다르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이 대목이 가장 웃겼습니다. 많이 오바하다면 정희진씨가 말한 “말하는 자의 위치성” 이란게 이런거 비슷한거 아닐까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지금의 이,삼십대들은 이 대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입니다. 저 역시 그들의 삶은 귓등으로만 들었지만, 아마 이 대목에 가장 큰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한번 읽어볼만한 책이고 지도로 삼을 수 있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좋은 책을 권해주시는 형님께 감사드립니다. 언제 찾아뵙겠습니다란 말로   맺고 싶지만 형님에게만큼은 빈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이란게 참 이상한 것이 마음은 형님을 뵙고 싶은데 ,이상하게 발은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신경 써 주시는 형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나 봅니다. 형님이 주신 편지로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밖은 이미 더위가 닥쳐왔지만 저는 아직 추운 겨울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다시 연락드리지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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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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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젠가 개그콘서트에서 한 개그맨이 관객을 바라보며 던진 한마디.“내일 출근하시죠?” (개그콘서트는 토요일 오후에 방영된다.)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이 던진 한 마디.“ 너희들도 토요일 저녁이면 인생의 비참함을 느낄 거다” 인정하자. 일주일 중 가장 비참한 시간. 다음날 출근과 등교를 생각해야 하는 일요일 저녁.
  대체 일은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 왜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 죽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면서도, 일자리를 얻지 못해 안달인걸까? 게다가 바야흐로 “내리막” 시대다. 경제성장의 파도는 이미 지나갔고 백수,잉여, 비정규직 같은 단어들이 일상화됐다. 어쩌면 우리는 찬밥,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 쪽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하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얼른 스펙을 쌓아서 경쟁에서 승리하라고 한다. 문제는 좋아하는 일에 밥벌이의 무게가 얹히는 순간, 그 일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되고, 생존경쟁에서 승리하는 순간 찰나의 기쁨과 긴 허무가 찾아오기가 십상이라는 것이다.
  “내리막...”의 저자 제현주는 10여년간의 직장생활을 경험한 후 자신만의 일을 시작했다. 자신의 일을 찾으면서 했던 고민과 성찰들을 모아 이 책에 담았다. 일이라는 주제가 워낙 광대하다 보니 하나의 통일성 있는 주제보다는 일에 대한 저자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 저자는 일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부터 시작해서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책을 채워 나간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어떻게 일 할 것인가”하는 물음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우리 일상의 대부분을 일이 채우고 있는 현실에서 일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 삶은 소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일을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일에 관한 성찰이 필연적으로 사회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는 일을 통해 생존을 이어나가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한 회사에 취직해서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자신의 전 생애를 채우던 모델은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제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저자는 리스크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지는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 “노마드”가 되려면 일을 다시 개념짓고(잉여짓은 왜 일이 아니란 말인가?),일터를 다시 개념짓고(일하는 사람이 주인인 회사는 불가능한걸까?), 타인과의 관계(등가교환으로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저자는 분명한 답을 내놓지 않지만 “공동체”라는 개념을 넌지시 제안한다. 저자의 삶이 계속 진행중인 만큼 이 책의 내용도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 아직 정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저자가 말하는 대로 우리에게 “일에 대한 새로운, 자신만의 윤리와 철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같이 고민해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하는 전자출판업이 에너지를 얻는 장소라고 한다. 끝나봐야 모든 걸 알 수 있겠지만 이쯤되면 벌써 절반은 성공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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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의 설정은 새로운 게 아니죠. 어렸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TV 명화극장에서 “선셋대로”를 본 기억이 있는데, <추락한 히어로>를 다룬 영화로는 이 영화가 베스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글귀 마냥 위대한 왕국이 퇴락하는 것은 후진 공화국의 붕괴보다 더 서글픈 법이지요. 물론 복권당첨 후 망한 부자들 애기를 들어도 사람들은 한 번 당첨되기를 바라지만, <버드맨>에서 리건 톰슨의 딜레마는 자신의 진짜 욕망을 주변에서 알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살쇼 이후 병원에 입원한 톰슨에게 친구가 묻습니다. “세상이 너를 주목하고 있어. 이게 네가 원하던 거 아니야?”  “맞아” 무뚝뚝하게 대답한 톰슨은 그 후 병원 창문에서 하늘로 날아갑니다(?). 간신히 버드맨의 영광을 회복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영화중반 톰슨은 마이크 샤이너에게 레이먼드 카버의 싸인을 건넵니다. 그리고, 카버의 격려가 담긴 싸인이 자신이 배우가 된 계기라고, 아마도 진심이 담긴 고백을 샤이너에게 하지요. 하지만 바로 까입니다. “맙소사 냅킨에다 쓴 거잖아요. 카버는 술에 취해있었던 거라구요”  이후에도 톰슨은 “홈리스의 거시기를 빤 것 같이 생긴” 평론가에게 다시 카버의 싸인을 건네지만 다시 까이고 폭발합니다. (톰슨의 긴장이 극에 달하는 순간입니다. “가서 당신이 쓴 글로 당신 밑이나 닦아!”)
 그가 그렇게 분노했던 것은 물론 연극을 말아먹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겠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부인당한 것도 이유일 겁니다. 버드맨 때문에 가려져 있었지만, 아마도 그에게도 샤이너 식의 “메소드 연기주의”가 있었겠죠. (“거봐,나도 연기할 수 있어”) 겉으로 드러난 건 커리어에 대한 위기의식이었지만, 그는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기에, 버드맨에게 “잘있어, 그리고 엿먹어” 라고 말한 뒤 비상할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 버드맨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주변의 인정과 주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그 비상이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무언가일 것입니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고,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무엇 말이죠.
  영화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카버의 소설 문장처럼 타인에게 사랑받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톰슨처럼 그런 사랑까지 초월한 비상을 할 수도 있겠죠.

“스스로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어디선가 읽은 문장인데 저자를 잊어버렸어요. 쓰신 분한테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인용할래요 큭)
 
 다시 하루키에게 기대자면 (상실하면 역시 하루키죠. 거기에 자신에 대한 연민까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연료가 떨어진 비행기가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수화물을 버리고, 마지막엔 가엷은 스튜어드를 버리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평균수명이 40대였던 과거에 노인들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존경을 받았지만 무조건 젊음을 찬양하는 지금은 우리 모두 조금씩 버드맨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열여섯이 되려면 열여섯에 죽는 수 밖에 없습니다-이것도 하루키)
현실적인 대처 방안이라면 그저 무엇인가를 매일 잃어버리는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쌓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정도랄까요.
그게 돈이든, 추억이든, 관계든, 학문이든 말이죠. 아니면 톰슨처럼 자신만의 비상을 찾아서, 최후의 순간에는 날아오를 수 있도록 평소에 조금씩 노력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또 하나의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영화는 <클라우드 오브 실스마리아>입니다. 줄리아 비노쉬! <나쁜피>의 헤로인인 줄리엣 비노쉬가!!
나이든 내리막 여배우로 등장합니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줄리엣 비노쉬가 여전히 <시그리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줄리엣 비노쉬는 연극에서 어린 팜므파탈이 아닌 나이 들고 비루한 <헬레나>를 연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료배우를 유혹하고, 나체로 강에서 수영하는 그녀는 여전히 <시그리드>입니다. (정작 한창 청춘인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옷을 입고 수영합니다. 연기를 의외로 잘하던데요)
 몇 번의 푸대접과 찬밥 신세를 겪은 후 줄리엣 비노쉬는 결국 <헬레나>를 연기합니다. 영화는 헬레나 분장을 한 줄리엣 비노쉬가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끝납니다. 인생무상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지만, 역시 나이든 줄리엣 비노쉬를 보는 것은 가슴이 아려옵니다. 저도,여러분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죠(아니 저렇게만 늙어도 성공이겠지만)
하지만, 뭐랄까요... 담배를 들고 있는 줄리엣 비노쉬의 마지막 모습에는 어떤 의연함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제 시작될 연극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아마 헬레나를 열연할 것 같은 예감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시그리드는 헬레나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시그리드와 헬레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만 있는 것일까요? 동료배우가 줄리엣 비노쉬에게 말하는 것처럼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어쩌면 동일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시그리드를 연기하는 어린 조앤도 줄리엣 비노쉬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헬레나>가 되겠죠.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어떤 것은 우리가 끝까지 붙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삶에 대한 태도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게 보니, 담배를 든 채 어딘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줄리엣 비노쉬의 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이네요. 부디 연극 성황리에 끝내길 바랄께요.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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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이 상처를 남긴 이유
김윤영.정환봉 지음 / 북콤마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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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살 여공의 삶 - 한 여성 노동자의 자기역사 쓰기
신순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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