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의 설정은 새로운 게 아니죠. 어렸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TV 명화극장에서 “선셋대로”를 본 기억이 있는데, <추락한 히어로>를 다룬 영화로는 이 영화가 베스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글귀 마냥 위대한 왕국이 퇴락하는 것은 후진 공화국의 붕괴보다 더 서글픈 법이지요. 물론 복권당첨 후 망한 부자들 애기를 들어도 사람들은 한 번 당첨되기를 바라지만, <버드맨>에서 리건 톰슨의 딜레마는 자신의 진짜 욕망을 주변에서 알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살쇼 이후 병원에 입원한 톰슨에게 친구가 묻습니다. “세상이 너를 주목하고 있어. 이게 네가 원하던 거 아니야?” “맞아” 무뚝뚝하게 대답한 톰슨은 그 후 병원 창문에서 하늘로 날아갑니다(?). 간신히 버드맨의 영광을 회복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영화중반 톰슨은 마이크 샤이너에게 레이먼드 카버의 싸인을 건넵니다. 그리고, 카버의 격려가 담긴 싸인이 자신이 배우가 된 계기라고, 아마도 진심이 담긴 고백을 샤이너에게 하지요. 하지만 바로 까입니다. “맙소사 냅킨에다 쓴 거잖아요. 카버는 술에 취해있었던 거라구요” 이후에도 톰슨은 “홈리스의 거시기를 빤 것 같이 생긴” 평론가에게 다시 카버의 싸인을 건네지만 다시 까이고 폭발합니다. (톰슨의 긴장이 극에 달하는 순간입니다. “가서 당신이 쓴 글로 당신 밑이나 닦아!”)
그가 그렇게 분노했던 것은 물론 연극을 말아먹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겠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부인당한 것도 이유일 겁니다. 버드맨 때문에 가려져 있었지만, 아마도 그에게도 샤이너 식의 “메소드 연기주의”가 있었겠죠. (“거봐,나도 연기할 수 있어”) 겉으로 드러난 건 커리어에 대한 위기의식이었지만, 그는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기에, 버드맨에게 “잘있어, 그리고 엿먹어” 라고 말한 뒤 비상할 수 있었던 겁니다. 만약 버드맨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주변의 인정과 주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그 비상이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무언가일 것입니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고,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무엇 말이죠.
영화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카버의 소설 문장처럼 타인에게 사랑받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톰슨처럼 그런 사랑까지 초월한 비상을 할 수도 있겠죠.
“스스로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어디선가 읽은 문장인데 저자를 잊어버렸어요. 쓰신 분한테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인용할래요 큭)
다시 하루키에게 기대자면 (상실하면 역시 하루키죠. 거기에 자신에 대한 연민까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연료가 떨어진 비행기가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수화물을 버리고, 마지막엔 가엷은 스튜어드를 버리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평균수명이 40대였던 과거에 노인들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존경을 받았지만 무조건 젊음을 찬양하는 지금은 우리 모두 조금씩 버드맨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열여섯이 되려면 열여섯에 죽는 수 밖에 없습니다-이것도 하루키)
현실적인 대처 방안이라면 그저 무엇인가를 매일 잃어버리는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쌓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정도랄까요.
그게 돈이든, 추억이든, 관계든, 학문이든 말이죠. 아니면 톰슨처럼 자신만의 비상을 찾아서, 최후의 순간에는 날아오를 수 있도록 평소에 조금씩 노력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또 하나의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영화는 <클라우드 오브 실스마리아>입니다. 줄리아 비노쉬! <나쁜피>의 헤로인인 줄리엣 비노쉬가!!
나이든 내리막 여배우로 등장합니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줄리엣 비노쉬가 여전히 <시그리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줄리엣 비노쉬는 연극에서 어린 팜므파탈이 아닌 나이 들고 비루한 <헬레나>를 연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료배우를 유혹하고, 나체로 강에서 수영하는 그녀는 여전히 <시그리드>입니다. (정작 한창 청춘인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옷을 입고 수영합니다. 연기를 의외로 잘하던데요)
몇 번의 푸대접과 찬밥 신세를 겪은 후 줄리엣 비노쉬는 결국 <헬레나>를 연기합니다. 영화는 헬레나 분장을 한 줄리엣 비노쉬가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끝납니다. 인생무상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지만, 역시 나이든 줄리엣 비노쉬를 보는 것은 가슴이 아려옵니다. 저도,여러분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죠(아니 저렇게만 늙어도 성공이겠지만)
하지만, 뭐랄까요... 담배를 들고 있는 줄리엣 비노쉬의 마지막 모습에는 어떤 의연함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제 시작될 연극에서 줄리엣 비노쉬는 아마 헬레나를 열연할 것 같은 예감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시그리드는 헬레나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하지만, 시그리드와 헬레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만 있는 것일까요? 동료배우가 줄리엣 비노쉬에게 말하는 것처럼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어쩌면 동일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시그리드를 연기하는 어린 조앤도 줄리엣 비노쉬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헬레나>가 되겠죠.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어떤 것은 우리가 끝까지 붙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삶에 대한 태도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게 보니, 담배를 든 채 어딘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줄리엣 비노쉬의 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이네요. 부디 연극 성황리에 끝내길 바랄께요.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