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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개개비 ㅣ 상상 동시집 15
전병호 지음, 이유민 그림 / 상상 / 2022년 12월
평점 :
『비 오는 날 개개비』/전병호 시/ 상상/ 2022
봄날 같은 동시집
글을 읽으면 그 글을 쓴 사람이 보인다. 때때로 동시도 난해하고 꽈배기처럼 배배 꼰 그런 동시도 눈에 띄지만, 동시는 동시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 독자를 염두에 두고 남녀노소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비 오는 날 개개비』를 읽을 때 마음이 편해지면서 ‘그래, 동시집은 이래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단에 계셨던 분이라 그런지 시 속에 어린이를 배려하는 마음을 오롯이 만날 수 있어 더 반갑다. 모처럼 만난 따스하고 편안한 이 동시집은 상상 동시집 15번째로 전병호 선생님이 쓴 『비 오는 날 개개비』다.
전병호 선생님은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비닐우산」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세종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천상병동심문학상, 열린아동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펴낸 책으로 동시집 『들꽃 초등학교』 『봄으로 가는 버스』 『민들레 씨가 하는 말』 『백두산 돌은 따듯하다』 등이 있고, 동시조집 『자전거 타는 아이』 『수평선 먼 섬으로 나비가 팔랑팔랑』 시그림책 『우리 집 하늘』 『달빛 기차』 등이 있다.
육교 건너 시내버스 정유장 앞을 지날 때면, 매일 아침 꼭 이때쯤이면 단추 공장에 일 나가는 용민이 엄마가 할아버지 아침밥 차려 드리다가 늦어 “잠깐만요!” 소리치며 달려오고 부릉부릉 떠나련 시내버스가 잠시 섰다가 용민이 엄마를 태우고 떠나면서 보도블록 틈에 떨어뜨리고 가는 금단추 하나, 둘, 셋, 넷, 다섯…….
- 「민들레꽃」 전문 13쪽
민들레를 단추를 표현한 시가 더러 있는데 이 시에서는 단추 공장 다니는 용민이 엄마가 할아버지 밥 차려드리고 서둘러 가면서 떨어뜨린 금단추라고 설정했다. 산문시 형식을 취하고 있고 이 시에는 삽화도 없지만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듯이 환해서 시에 한참 눈이 간다.
옆집 할아버지는 열심히 농약을 친다./ 농약을 뿌리지 않는 우리 집/ 풀들이 다 우리 집으로 건너왔다.// 후두두두/ 후둑후둑// 메뚜기도 같이 왔다.//
- 「건너왔다」 전문 22쪽
시골 묵정밭이 떠오른다. 주인이 멀리 있다 보니 묵혀둔 채 몇 년이 됐다. 주인이 동네에 살면서 관리한 밭과는 천지차이인데 잡초뿐만 아니라 이제는 나무까지 자리 잡으려고 한다. 그 나무에 새가 앉고 노래하고 더러는 산짐승들한테도 쉴 자리를 내어주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농약 안 치고 주인이 찾지 않는 밭이라서.
후드득!// 바람도 없는데/ 떨어지는/ 도,/ 토,/ 리,// 순간,/ 산이/ 두 손 모으고/ 내려앉으면서// 도토리를 받았다.//
- 「가을 산이 깊어지다」 전문 (49쪽)
어제도 도토리 껍질이 수북 쌓인 동네 뒷산을 걸었는데 왜 산이 두 손 모으고 도토리를 받았다는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장맛비에 꺾여 쓰러진/ 코스모스.// 줄기에서 하얗게/ 실뿌리를 내리더니/ 땅을 짚고 일어선다.// 마디마다 줄기를 꺼내고/ 줄기에서 가지를 꺼내고/ 가지에서 꽃송이를/ 몇 개씩 꺼내 들었다.// 쓰러졌다 일어난/ 코스모스 한 그루만으로도/ 앞마당이 환하다.//
- 「앞마당이 환하다」 전문 (50쪽)
사람은 때때로 동식물에 힘과 용기를 얻는다. 죽을 고비를 넘긴 반려동물이 그렇고 시에서처럼 꺾여 쓰러졌는데 다시 잎을 내고 열매를 맺는 나무나 꽃을 보면 생명의 신비는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재작년 코로나 초기 때 꽃을 보며 힘내라고 보내온 튤립 화분이 있었는데 도저히 꽃이 숨을 쉴 수 없는 흙에 심겨 왔다. 그해에는 꽃을 못 보고 구근을 잘 두었는데 다음 해 다른 흙을 섞고 거름을 보충해 애지중지 키웠더니 노오란 튤립 일곱 송이를 피웠는데 집의 중심이 베란다에 있는 튤립 화분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그 환한 느낌을 이 시에서도 발견한다.
외에도 눈이 가는 동시가 많은데 百聞不如一見이다. 몇 편 소개하는 시보다 직접 동시집을 읽어 보면 훨씬 다양하고 재밌는 시에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재작년에 저자의 시그림책인 『우리 집 하늘』이 좋아서 보고 또 보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한 사람의 작품이 눈에 들어보면 그 사람의 다른 책이나 작품까지 찾아보게 되는데 『비 오는 날 개개비』를 읽어 보면 왜 읽기를 권하는지 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