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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 둔 말 ㅣ 창비청소년시선 42
김현서 지음 / 창비교육 / 2022년 11월
평점 :
『숨겨둔 말』/ 김현서 시집/창비/2022
사춘기를 비교적 무난하게 보낸 두 아들을 생각하면 가끔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때때로 좀 더 공부 열심히 좋은 대학에 가 주었더라면 자기들 장래도 더 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지만 크게 아픈 데 없이, 사고를 치거나 해서 학교에 불려 간 적 한번 없이 고등학교까지 마쳐주었다. 부모로서 크게 해준 게 없다 보니 뉴스로 전해 듣는 청소년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내 아이가 그 시기를 견뎌준 것에 대해서 대견하기도 하다. 지금 자신들의 길을 누구보다 열심히 개척해 가고 있는 것도 참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청소년시집인 『숨겨둔 말』을 읽었다.
『숨겨둔 말』을 쓴 김현서 시인은 강원도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아기 때의 아름다웠던 기억과 학창 시절 어느 날은 배가 고팠고 어느 날은 잠깐 웃었고 어느 날은 왈칵 눈물을 쏟기도 한 그때의 눈물과 웃음을 자양분 삼아 글을 써 1996년 시 전문지 《현대시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한국일보에 동시가 당선되어 동시도 함께 쓰고 있으며 펴낸 책으로는 동시집 『수탉 몬다의 여행』, 청소년시집 『탐정동아리 사건일지』, 시집 『나는 커서』, 『코르셋을 입은 거울』, 동화 『우주로 날아라, 누리호!』 (공저) 등이 있다.
책을 덮은 뒤의 느낌은 한참 동안 가슴이 찌릿찌릿하다는 것이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청소년, 한참 에너지를 발산해야 할 나이에 교실에 붙들려 공부와 씨름하는 모습은 짠하다. ‘저게 다는 아닌데’ 하면서도 딱히 다른 대안도 없는. 그래서 더 답답하기도 하다.
선생님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쉰다 선생님 문제구나라고 말하니 나는 또 문제아가 되는 것 같다 어항 밖으로 뛰쳐나와 물기가 점점 말라 가는 금붕어! 나는 정말 문제아일까? 나는 자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나는 정말 문제아일까」 일부 (17쪽)
집에 먹을 게 떨어졌다 이제 나는 배가 고프면 안 된다 집이 망했으니 크게 웃어도 안 된다 내 진로는 결정됐는데 선생님은 나를 불러놓고 자꾸 묻는다 보충 수업을 묻고 대학을 무는다 엄마가 없는데 엄마에 대해 묻는다 빨간딱지는 묻지 않고 라이더 알바에 대해 묻는다 가만히 있으면 시건방져 보여서 뭐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말하기 싫다 말없이 내 어깨를 툭툭 쳐 주는 것도 싫다 -「숨겨둔 말」 전문 (38쪽)
찢어진 종이 같은 눈이 날린다 운동장을 백지로 만든다 이제 곧 겨울 방학이다 휴식 같지만 더 빡센 시간이 기다린다 아득바득 달려 봐야 5등급에서 간신히 4등급 찍고 다시 5등급 선생님들은 진짜 특기는 놔두고 가짜 특기에 죽자고 매달리라고 부추긴다 특별 관리는 1등급뿐이고 나같이 애매한 등급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눈물이 나는 건 찬공기에 코끝이 시리기 때문이겠지
-「애매한 인생」 전문 (62쪽)
창가에/ 오래 앉아 있으니/ 내 몸에서도/ 따뜻한 햇빛 냄새가 난다//
-「불안」 전문 (63쪽)
암막 커튼을 젖히며/눈부신 햇살을 쏟아 내는 그 말!//넌 혼자가 아니야/선생님의 말이 입 안에서 사탕처럼 굴러다녀/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탕!/천 개쯤 있었으면 좋겠어//넌 혼자가 아니야/조랑말처럼 다가닥다가닥 소리도 경쾌해/몸집은 적당하고 꼬리는 탐스러워/철퍼덕철퍼덕 똥도 잘 쌀 거 같아//넌 혼자가 아니야/읊조릴 때마다 바닥에 떨어진/종이 쪼가리 같은 내 몸이/나풀나풀 날아올라//노랑나비 흰나비 이리 날아오너라/넌 혼자가 아니야/창문을 열고 높은 담장도 폴짝 뛰어넘어/창공으로 날아올라//넌 혼자가 아니야/사방이 확 트인 구름 해먹에 누워 흔들흔들//밑도 끝도 없는 배짱이 생겨나는 그 말/나는 혼자가 아니었어!//
-「혼자가 아니야」 전문 (82~83쪽)
『숨겨둔 말』 읽으면서 든 생각은 사춘기는 이미 지났지만?(가끔 대들 때도 있어 아닌 것도 같고) 아이들이 사춘기 이전에 내가 이 시집을 읽었다면 아이들을 좀 더 많이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무엇보다 아이들 말을 잘 들어주어야 겠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꾹꾹 가슴 밑바닥까지 참고 삼킨 말이 얼마나 많을지.
내 아이한테도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아이가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을 숨겨두지 않도록 말에 날개를 달아주어 잘 들어도 주는 엄마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김현서 선생님이 본인을 다독인 말 같기도 하고 수많은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한테 하는 말 같기도 한, 이 시집. 아마 둘 다겠지. 그래도 확실한 건 이 시집을 읽은, 또는 앞으로 읽을 많은 독자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