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이는 걷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래도 센터에서 타라고 하는 전동차는 죽어도 타기 싫다. 전동차를 타면 편하다. 하지만 편해지는 만큼 두 다리의 힘은 빠질 것이다. 지금보다 더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영이는 무용을 하고 싶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어떻게든 자신의 두 다리로 걷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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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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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지기도 한다. 창피하고 힘들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걷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벚꽃이 피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조깅을 한다. 소영이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나도 저렇게 한 번 뛰어 보고 싶다. 그게 소영이의 소원이다. 겨울을 지나 봄을 보내고 어느 따뜻한 날, 소영이는 동네 공원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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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갈고닦은 무용을 혼자 펼친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 박수도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무용을 하는 동안만큼은 날 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몸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소영의 노력]은 장애를 바라보는 흔한 방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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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극복하는 이야기로 몰아가지도 않고, 소영을 안타까운 사람으로 바라보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큐멘터리인데도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카메라의 시선 때문이다. 영화는 소영을 바라보는 카메라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소영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모습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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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기록한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움직이지 않는 몸, 마음대로 나오지 않는 말, 점점 굳어가는 몸을 자기 손으로 찍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그럼에도 소영은 카메라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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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은 남아 있다. 그래서 소영에게 무용은 단순히 춤을 추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가깝다. 소영 곁에는 희정 선생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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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소영의 김소영도 대단하지만 옆에서 끝까지 소영을 잡아주는 희정 선생님도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영화를 보면서 소영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하게 희정 선생님이 더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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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이 포기하지 않도록 바로 옆에서 동작 하나하나를 반복하게 하고, 넘어지면 다시 일으키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해주는 사람. 자신의 역량을 알고 삼십 대에 현역 무용수의 길에서 내려와 무용을 가르치는 사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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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선생님 역시 자신의 불안과 우울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영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자신도 힘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희정 선생님은 소영에게 동작을 가르친다. 잘되지 않는 동작을 다시 하고, 잊어버리면 다시 기억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또 처음부터 한다. 결국 무용도 삶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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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잘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넘어졌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다시 하고 또 하는 것. 그 과정에서 희정 선생님이 소영에게 말한다.“소영아? 잘한다 못한다 이런 거 생각하지 말고, 제일 중요한 게 뭐냐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선생님이 쳐 줄 거야. 알겠지? 당황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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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와 반복된 고된 노력에 소영은 희정 선생님 앞에서 결국 눈물을 터트린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연습하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한다. 공연 당일까지 몸을 붙잡고 또 연습한다. 그렇게 어렵게 공연을 끝낸다. 공연이 끝났다고 소영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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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관객이 돌아간 뒤에도 소영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서 카메라를 들고 다시 자신의 모습을 찍는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이유로 마지막에 찬란한 음악을 깔고 끝내지 않는다. 꿈을 이루었으니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는 식으로도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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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 걷는 일도 계속해야 하고, 몸과 싸우는 일도 계속해야 한다. 무용 역시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소영에게 노력은 공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는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이 많다. 그래서 갱년기라면 처음부터 눈물을 줄줄 흘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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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소영이 공원에서 혼자 춤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춤을 추던 소영. 그 순간만큼은 몸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달릴 수 없지만 춤출 수 있고, 마음대로 말할 수 없지만 몸으로 말할 수 있다. 몸이 점점 굳어가더라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까지 굳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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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영의 노력]은 장애를 극복하는 영화가 아니라,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이 자신의 몸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영화에 가깝다. 소영은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오늘도 걷고, 다시 연습하고, 춤을 춘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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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 요보비치가 나오지 않는데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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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익숙한 공포영화들이 떠오른다. 괴물들이 서로의 몸을 집어삼키며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해가는 모습은 '더 씽'을 생각나게 하고, 라쿤시티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펼쳐지는 도로와 터널, 건물들은 '사일런트 힐'의 미로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단순히 어디선가 본 것을 가져다 붙인 느낌은 아니다. '레지던트 이블' 특유의 괴물과 고어가 다른 영화의 공포와 섞이면서 나름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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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의료용품을 배달하러 갔던 브라이언은 어쩌다 라쿤시티까지 긴급하게 백신을 배달하게 된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사람이 살아갈 만한 도시가 아니다. 오염으로 변이된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고, 브라이언은 그 안을 통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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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만 놓고 보면 아주 단순하다. 백신을 가지고 들어가서 배달하고 살아남으면 된다. 그런데 브라이언이 문제다. 총을 처음 잡아보는 사람이라 총을 쏘는 모습부터 어설프고, 괴물을 만날 때마다 튀어나오는 욕과 추임새도 심각한 상황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 사람이 영웅인지 그냥 운 좋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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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오히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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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크레거가 감독을 맡은 것도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한다. '웨폰'과 '바바리안'에서 보여줬던 불편하면서도 기묘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감각이 이번에도 느껴진다. 공포를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무서운 장면 한가운데에 이상한 웃음을 끼워 넣는다. 그래서 끔찍한 장면을 보다가도 피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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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은 이전의 '레지던트 이블'보다 한층 더 과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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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수가 몸에서 뻗어나오고, 하나의 괴물이 다른 괴물을 흡수하면서 더 크고 끔찍한 형태로 변한다. 괴물의 몸이 더 이상 인간의 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계속 변해가는 모습은 아무래도 '더 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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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괴물이 기억에 남는다. 얼굴이 갈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괴물로 변하는데, 이상하게도 새하얗고 고른 치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저 치아를 굳이 저렇게 만들어놓은 이유가 뭘까 싶었다. 무서운 장면인데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다. 이런 순간이 이 영화에는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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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쿤시티에 들어간 뒤의 공간도 보는 재미다. 도로에서 터널로, 터널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어디로 가든 정상적인 길이 아니다. 공간 자체가 사람을 잡아먹을 것처럼 꼬여 있다. '사일런트 힐'에서 죄의식과 공포가 도시를 미로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이 영화의 라쿤시티도 사람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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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브렐라 역시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전 시리즈에서는 세계를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조직처럼 묘사됐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앞으로의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될지는 알 수 없다. 후속작에서 다시 엄브렐라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도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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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은 그 와중에도 백신을 정말 자기 목숨처럼 끌어안고 다닌다. 어떻게든 배달을 끝내려고 한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배달기사는 정말 투철하다. 그런데 치아가 하옇고 고른 어린 괴물에게 팔을 물린 뒤부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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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 영화가 기존의 '레지던트 이블'과 조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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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 요보비치가 연기했던 앨리스처럼 처음부터 강력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브라이언은 강하지도 않고 싸움을 잘하지도 않는다. 총도 제대로 쏘지 못한다.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면 맞서 싸워서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도망가고,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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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게임에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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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괴물이 나오면 그것을 압도적인 힘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약점을 찾거나, 운이 따라주거나, 주변의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겨우 살아남는다. 그래서 괴물을 죽였을 때의 통쾌함보다 ‘이번에도 살았네’ 하는 안도감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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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래서 더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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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레지던트 이블'의 주인공들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브라이언은 그냥 그곳에 떨어진 평범한 사람이다. 괴물이 나타났을 때 싸우기보다는 도망치는 것이 정상인 사람. 그런데 그 평범한 사람이 끝까지 백신을 들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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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순한 이야기가 이상하게 끝까지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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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공포영화였다. 밀라 요보비치가 없어도 '레지던트 이블'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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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하우스를 한번 더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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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액션영화를 보고 있으면 묘한 흐름이 느껴진다. 기존 할리우드 액션 스타들이 하나둘 전성기를 지나면서, 최근에는 리처처럼 선이 굵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액션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어쩌면 할리우드에서 마동석을 보고 배운 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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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로드 하우스'의 제이크 질렌할은 조금 다르다. 몸이 크고 강한데 움직임은 굉장히 날렵하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 같으면서도 동작 하나하나가 빠르고 정확하다. 아무리 봐도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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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스파이더맨의 톰 홀랜드가 제이크 질렌할의 운동량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인터뷰 영상이 인상적이었다. 본인도 운동을 엄청 좋아하고 많이 하는데 제이크 질렌할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 단계를 아예 넘어선 사람이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다시 보니 그 말이 조금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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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크 질렌할은 원래 액션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한 배우가 아니다. '페르시아 왕자'에서는 굉장히 벌크업한 몸으로 액션을 보여줬고, 이후에도 액션영화에서 몸을 쓰는 모습은 계속 인상적이다. '로드 하우스'에서는 아예 액션배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액션배우가 아니었던 배우가 액션배우보다 더 액션배우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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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제이크 질렌할이 비슷한 역할만 해온 것도 아니다. '옥자'에서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박사 역을 맡았고, '라이프'에서는 우주에서 외계 생명체와 사투를 벌인다. '나이트크롤러'에서는 인간의 광기를 보여주었다. 역할을 바꿀 때마다 사람이 달라 보이는 배우인데, 그 사람이 몸까지 만들어 액션을 하니 묘하게 더 강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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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하우스'가 1989년 패트릭 스웨이지 주연의 동명 영화를 다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제이크 질렌할은 이 영화의 주연을 위해 엄청난 양의 훈련을 했고, 그 과정을 맨즈헬스 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상을 찾아보면 왜 화면 속 몸이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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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시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코너 맥그리거다. 실제 격투기 선수인 코너 맥그리거와 제이크 질렌할이 한판 붙는 장면은 액션 자체가 꽤 통쾌하다. 배우와 실제 선수가 부딪히는 데서 오는 묘한 날것의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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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봐도 액션은 여전히 멋있다. 특히 제이크 질렌할이 그렇게 만들어진 몸으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앞으로 액션영화를 한두 편 더 찍어줬으면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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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 시즌 4가 끝나자마자 '니글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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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 마지막 장면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하철역에서 리처가 노숙하는 할머니에게 샌드위치의 반을 건네고 둘이 나눠 먹을 때, 어두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데 그 순간 햇빛이 비친다. 리처라는 인간을 생각하면 이상할 만큼 조용하고 따뜻한 장면이었다. 사람을 때려눕히는 장면보다 그 장면이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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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니글리'가 시작된다. 첫 화부터 리처가 잠깐 모습을 보인다. 니글리를 도와주고 다시 사라진다. 마치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보라는 듯하다. 실제로 이 시리즈는 리처가 사라진 자리를 니글리가 이어받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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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작품은 아니다. 니글리라는 인물을 가져와 그 사람의 성격과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그래서 '리처'처럼 이미 짜여 있는 거대한 원작의 구조를 따라가는 느낌은 덜하다. 대신 니글리라는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조금씩 들여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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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작부터 상당히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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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남자가 옷을 홀딱 벗은 채 지하철에 몸을 부딪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곧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충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는 보인다. 이단종교집단이 있고,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약물이 있고, 사회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사람들을 끌어들여 실험을 하고, 이용하고, 결국 비밀을 알리려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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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는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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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올린 '굿모닝 베로니카'도 시즌 2는 이단종교를 둘러싼 사건이었다. '모범택시'에서도 비슷한 소재가 등장했고, 연상호가 원작을 쓴 '사이비' 시리즈도 종교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욕망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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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종교에 빠지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던 믿음과 외로움, 불안 같은 것을 누군가 이용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곳에 빠져버리면 남은 사람은 어디까지 따라가야 할까. 돈을 가져다 바치고, 가족이 무너지고, 그 사람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가족 전체가 망가지는 일도 현실에서는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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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런 소재를 보면 단순히 악당을 찾아서 때려잡는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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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글리 역시 혼자 움직이는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과 쉽게 섞이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리처처럼 결국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는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할 때 제3의 인물들을 끌어들여 사건을 파헤친다. 그게 니글리라는 캐릭터의 재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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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리처보다 액션이 약하면 어쩌나 싶었다. 리처는 사람이 아니라 거의 걸어 다니는 중장비에 가까우니까. 누군가를 한 대 때리면 그 사람의 인생이 끝날 것 같은 액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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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상 니글리를 보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리처와 똑같을 필요가 없다. 니글리에게는 니글리만의 방식이 있다. 몸으로 밀어붙이는 순간도 있지만 그보다는 상황을 읽고 움직이는 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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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니글리라는 사람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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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와 함께 있을 때는 늘 리처 옆에 있는 유능한 동료 정도로 보였는데, 혼자 세워놓으니 그 사람에게도 과거가 있고 상처가 있고,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원래 조연이었던 사람이 주인공이 되면 이런 재미가 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뒷면을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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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2화를 보려고 하는 중이라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다. 줄거리가 어느 정도 보인다는 점은 오히려 마음에 든다. 요즘은 반전을 만들기 위해 반전을 쌓아 올리는 작품도 많은데, 이건 처음부터 보이는 악의 구조를 조금씩 파헤치는 쪽이다. 그러면서 니글리라는 사람을 따라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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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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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다 마사키가 야마가미 데쓰야를 연기한다는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때도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는데, 최근에는 제작이 중단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공개된 각본에 실제 사건과 전혀 다른 설정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총격범을 진범이 아닌 희생양으로 만들고, 뒤에 종교단체가 있으며 진짜 암살자는 한국인 히트맨이라는 설정이었다고 한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가져왔으면서 완전히 다른 음모극으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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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었을 때는 나도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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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건에는 이미 종교 문제와 가족의 붕괴, 돈, 원한, 정치와 종교의 관계처럼 영화로 만들 만한 요소가 너무 많다. 그런데 거기에 다시 가상의 한국인 암살자를 집어넣어 버리면 현실을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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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실의 사건을 그대로 영화로 만들 필요는 없다. 창작자는 얼마든지 허구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실제 인물과 실제 살인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보는 사람도 계속 의식하게 된다. 특히 정치인 암살처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사건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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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히려 《니글리》 같은 작품이 편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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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라는 걸 알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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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종교도, 약물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도 모두 현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소재지만 이 작품 안에서는 하나의 장르적 세계로 들어간다. 그러니 일단 니글리가 어떻게 사건을 파헤치는지를 따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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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직 2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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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가 떠난 자리에 니글리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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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처럼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앞으로 이 사람이 어디까지 파고들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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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베로니카' 시즌 1은 보는 내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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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처음부터 나온다. 숨길 생각도 별로 없다. 여자를 납치해서 갈고리에 매달아 놓고 가지고 놀다가 죽인다. 그것도 모자라 그 장면을 아내에게 억지로 보여준다. 범인은 육군 대령이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사라져도 잡히지 않는다. 흔적도 거의 남기지 않는다. 경찰이 수사를 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사건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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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지켜보다가 결국 베로니카가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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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베로니카가 무슨 유능한 형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직 형사가 되지 못했고, 현장 수사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경찰이다. 주로 실내에서 근무하던 사람이다. 그런 베로니카가 실종 사건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범인의 아내와 접촉하고, 사라진 여자들을 찾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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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뭔가 해보려고 할 때마다 막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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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청하면 거절당한다. 위에서 수사하지 말라고 한다. 범인 앞까지 거의 다 가놓고도 놓친다. 특공대까지 투입하지만 엉뚱한 곳을 들이닥친다. 베로니카가 뭔가 알아냈다 싶으면 또 다른 벽이 나타난다. 보고 있으면 ‘아니, 거기까지 갔으면 그냥 잡으면 되잖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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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베로니카와 계속 부딪히는 반장도 있다. 경찰 조직 안에서 베로니카와 거의 경쟁자처럼 보이는 인물인데,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여자다. 베로니카 역시 예쁘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마주칠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생긴다. 그런데 정작 베로니카가 믿었던 사람들조차 하나씩 이상한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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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후반에 들어서야 왜 이렇게 수사가 안 되는지 조금씩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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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 하나만 잡으면 끝나는 사건이 아니었다. 경찰의 수뇌부가 이 사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베로니카가 아무리 뛰어다녀도 위에서 막아버리니 사건이 진척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즌 1은 범인을 잡는 수사극이라기보다는, 베로니카가 자신이 속한 조직 자체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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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장면도 상당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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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을 잡아 창고에 가둔 뒤 등의 살갗을 뚫어 천장에 매다는 장면부터 상당히 불편하다. 범인의 아내는 남편이 여자들을 죽이는 장면을 강제로 지켜봐야 한다. 눈구멍이 뚫린 상자를 머리에 쓰고 그 안에서 남편의 살인을 바라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는 것보다,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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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삶도 이미 망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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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오랫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한 탓에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조차 힘들어졌다. 남편이 저지르는 끔찍한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남편을 잡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그 대가가 너무 잔인하다. 불에 태워지는 장면은 시즌 1에서 손꼽히게 안타까운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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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베로니카가 믿었던 사람들도 무너진다.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서장도, 늘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반장도 결국 사건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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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시즌 1은 베로니카에게 일종의 배신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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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믿었던 사람을 하나씩 잃어가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세계가 얼마나 썩어 있는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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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베로니카는 대령을 잡는다. 정확히는 대령을 불에 태워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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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서 베로니카가 완전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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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2부터는 우리가 시즌 1에서 봤던 베로니카와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당한 일과 시즌 1의 사건에 가담했던 수뇌부들을 하나씩 찾아가고, 그들과 연결된 범죄자들을 직접 처단하기 시작한다. 경찰이라는 조직 안에서 정의를 찾으려 했던 사람이 조직 밖으로 밀려난 뒤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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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굿모닝, 베로니카'는 시즌 1과 그 이후의 느낌이 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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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시즌 1은 추천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 답답하다. 범인이 누군지도 알고 있는데 왜 저렇게 못 잡나 싶고, 베로니카가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으면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보면서 욕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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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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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을 어떻게 잡는지가 궁금해서 결국 다음 화를 누르게 된다. 그리고 시즌 1을 어떻게든 견디고 나면 시즌 2부터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베로니카가 더 이상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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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에서 그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던 답답함이 시즌 2부터는 베로니카의 분노로 바뀐다. 그때부터는 누가 누구를 잡을 것인지 지켜보는 재미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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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즌 3까지 나와 있다. 고어한 장면을 견딜 수 있고, 초반의 답답한 수사극을 참고 볼 수 있다면 시즌 1에서 포기하지 않는 편이 좋다. 나 역시 시즌 1을 보면서 몇 번이나 욕을 했지만, 결국 대령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고 싶어서 끝까지 봤고, 그 이후부터는 오히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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