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아름다운 아픔이다. 아픔이 너무 아름답게 펼쳐져, 보다 보면 샤오쓰에게 그러지 말라고 내가 안아줄게,라고 하고 싶은 영화다.

영화는 1960년 혼란한 대만 사회에서 견뎌보려는 14살 소년의 필사적 몸부림을 이야기한다. 이는 감독인 에드워드 양의 모습이기도 하다.

1949년 당시 대만 사회는 국공내전 이후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된다.

대만은 공산당 장제스가 대만으로 넘어오면서 독재정치가 시작 되는데, 공산당이 싫었던 본토인들과 쫓겨난 본토인들이 대만으로 넘어오면서 혼란을 넘어 환란의 시기였다.

이 사회적 혼란으로 당시 청소년들은 엘비스와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아노미 현상을 겪으며 폭력에 의존한다.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어른들과 학교라는 조직은 학생들에게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다.

학생들은 보이지 않는 불안 때문에 학생 갱단을 조직해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사이에서 샤오스는 밍에게 의지하려 하지만 밍은 샤오쓰만큼 자신을 원하지 않음에 점점 어둠에 잠식당해 버린다.

[난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 너의 희망은 오로지 나뿐이야] 하지만 밍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너도 다른 애들하고 똑같아] 샤오쓰는 다른 남학생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밍의 그 소리는 뇌관을 건드리고 만다.

샤오쓰는 친구, 가족 좋아하는 밍의 문제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하고 고민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에 건드린 뇌관이 터지고 만다.

샤오마를 죽이려고 들고 갔던 칼로 그만 밍의 배를 찌르고 만다. 대만 역사에서 미성년자가 저지른 최초의 살인사건이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아프고 슬픈 이야기지만 에드워드 양 감독의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이루어졌다.

샤오스의 안타까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한 컷 한 컷이 전부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영화 속 구도를 이룬다. 영화가 시작할 때 샤오스의 모습이 4시간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어둠에 잠식되어 가는 모습이 드러난다.

점점 갱단의 모습이 되어 선생님에게 욕을 내뱉을 때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 모르는 새 무섭게 변해버린 샤오쓰를 본다. 점점 흑화 하는 샤오쓰의 모습과 아름다운 배경이 대비를 이루어서 더 안타깝다.

샤오쓰는 결국 피를 흘리며 쓰러진 밍에게 일어날 수 있다며, 너는 일어나야 한다고 외칠 때는 이미 영화 시작의 샤오쓰의 모습은 사라졌다. 밍은 자신과 아픈 엄마를 지키기 위해 남자들의 호의를 이용할 줄 알았지만 샤오쓰의 눈에는 남자들이 밍을 쉽게 보는 게 싫었다.

샤오쓰는 밍에게 [이제 네게 남은 희망은 나밖에 없어]라고 했지만 결국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14살 소년은 그 혼란 시기에 어떻든 벗어나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밍이 원하는 가슴은 나(샤오쓰)의 가슴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가슴이었음을. 이 소년은 결국 사형을 받았다. 그렇게 밍의 곁에서 평생 지켜 줄 수 있게 된 샤오쓰의 아름다운 아픈 이야기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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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극장에서 봐도 좋을 공포영화가 나왔다. 전작이었던 바바리안(저 앞에 리뷰가 있음)도 꽤나 재미있게 봤었는데, 이번 공포영화는 이전의 공포영화와는 다른 뭐랄까 아주 신선한 공포다.

오자크에서 연기의 신 같았던 줄리아 가너와 타노스의 조슈 브롤린 등 연기가 좋은 배우들이 나와서 긴장을 놓지 못하게 극을 이끌어 간다.

줄리아 가너는 판타스틱 4 보다는 오자크, 웨폰에 나오는 이런 역할이 너무 잘 어울린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인데 보다 보면 후딱 지나간다.

나는 리뷰를 스포 생각하지 않고 죽 적는데, 이 영화는 어제 개봉해서 시놉만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는 스포 없이 리뷰를 하기가 너무 어렵다. 대부분의 리뷰어들이 스포를 했다.

하지만 난 스포는 하지 않겠다. 줄거리는 한 마을의 초등학교 한 반의 아이들 17명이 어느 날 전부 사라진다. 딱 한 명의 아이만 남고 다 사라진다.

사라진 딸을 찾아다니면서 기괴한 사건을 진실을 쫓는 한 아버지와 사라진 반 아이들의 담임이 사건을 스며들면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드러난다.

사건에 관련 있는 사람들의 그 시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준다. 현재와 과거, 이게 잘 섞여서 아주 흥미롭다.

혼자만 남은 소년 알렉스가 왜 혼자만 남았는지, 그리고 부모님을 지키기 위해 할머니로부터 험한 일을 당하면서 버티는 장면까지 공포를 잘 보여준다.

17명의 아이들이 아아아아 하면서 우르르 창문을 깨고 벽을 넘고 목표인 마녀를 찾아가서 찢어발기고 터트리는 장면은 아주 통쾌하기까지 하다.

어린이들의 폭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아이들이라 웃긴데 무서운 거. 웃기면서 무섭다. 이 영화는 딱 그렇다.

인간성의 착취로 인해 자신의 고통과 병과 늙음을 이겨내려는 어두운 마음의 마녀에 대항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영화 속 아이들이 사라진 요일이 수요일이라 어제 개봉을 한 모양이다.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면 봐도 좋을 영화 [웨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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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영화는 욕망에 관해서 말하는 영화다. 남녀가 차를 몰고 산길을 가다가 사고를 내고, 그 사람에게 돈다발이 있다는 걸 알고 돈을 가지기 위해 사람을 유기하고, 남녀도 결국 욕망에 눈이 뒤집혀 서로 죽여 버리는 이야기.

처음에는 경찰에 전화를 하지만 어마어마한 돈에 눈이 돌아간다. 뒷좌석에 둔 돈가방이 사라진 것에 남자는 내내 같이 있었던 여자를 의심하고 급기야 죽이려 든다.

단편영화의 장점이라면 짧은 대신 생각한 여운을 많이 남긴다는 것이다. 노래로 친다면 덤덤한 노래에 가깝다.

듣는 이들에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한다. 하지만 고음으로 현란하게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가수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면서 감정을 전부 발산을 해버려 듣는 이들이 감정을 느낄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조용필의 노래는 굉장한 고음이 없고 기교가 없음에도 모두가 좋아한다.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런 내용의 영화는 많다. 그렇지만 상업영화는 보면서 생각할 여지를 두지 않는다. 기승전결이 있어서 같이 끓어올랐다가 식어버린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욕망에 대해서, 욕심에 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은 돈 앞에서 노예가 될 정도로 돈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돈이 없으면 생활을 못하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밥벌이를 위해 매일 아침 일어나기 싫은 이불을 박차고 나온다. 그러다가 갑자기 돈이라는 욕망이 눈앞에 펼쳐지면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기 쉽다.

원래 그럴 형편도 아닌데 고가의 차를 구입하면 주위에서 뭔가 의심스러워한다. 그러다 보면 비밀이라는 게 새어나가고 불행이 닥쳐오는 것이다.

이 단편의 특징은 남녀가 욕망 때문에 괴물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짤막한 시간의 제약이 따른다. 그래서 어쩌면 인간은 원래 괴물인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지내다가 괴물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성은 실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단편 영화의 취약점은 녹음기술이다. 조용하게 말을 할 때에는 거의 들리지 않기 때문에 자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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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조던 필이라는 이름 때문에 자칫 속아서 보게 된다. 조던 필은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를 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참여를 했지만 조던 필의 느낌이 나는 건 흑인이 주인공이라는 것과 영상미 정도뿐이다.

조던 필이 만든 영화는 그 영화가 인종차별이든, 미디어를 까던, 의미를 굳이 모르더라도 영화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 재미있었는데, 이 영화는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조던 필을 따라 하는 영화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욕심이 차고 흘러넘쳐 욕망이 뇌를 지배하면 어두운 부분을 건드리는데 스포츠 선수와 호러를 합쳤다고는 하나 공포를 준다거나 무서운 장면은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풋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과는 다르다.

웬즈데이가 한국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했음에도 시청률이 떨어지는 이유와 비슷하다. 웬즈데이의 아담스 패밀리의 시작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

미국인들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아담스 패밀리를 티브이 드라마로, 어린이용으로 계속 죽 봐왔었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 웬즈데이가 나오니 열광을 할 수밖에.

이런 럭비에 관한 영화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전혀 관심이 없다. 쿼터벡이 얼만 큼의 슈퍼스타인지 대충은 알지만 미국인들만큼 깊게 관여하기가 싫다.

그런 주인공이 광팬에게 습격당해 뇌손상을 입고 전설의 쿼터백이 내 손을 잡아, 내가 하라는 대로 하고, 먹으라는 음식만 먹으면 다시 영광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

그래서 갇힌 공간에서 점점 반복과 통제 속에 광기로 사로잡히는 종교의식처럼 어떤 경계가 허물어지는데, 영화가 재미가 너무 없다.

뭔가 숨겨둔 의미 같은 게 영상 곳곳에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재미가 없어서 찾는 거 포기.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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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은 랄프로렌을 잔뜩 입고 나왔던 [애니 홀]의 다이안 키튼이 떠오른다. 애니를 보며 올비가 말했다.

“나는 실은 말이지, 아주 비관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어. 말하지만 인생은 호러블 한 것과 미저러블 한 것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어. 호러블 하다는 것은 글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치명적인 경우랄 수 있지. 예를 들으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장애라든가, 그리고 음, 미저러블 한 것은 그 밖의 모든 것이지.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미저러블 한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지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심연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더러운 먼지처럼 퀴퀴한 느낌일 때도 있고, 푹신한 솜사탕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조금은 부드럽고, 조금은 딱딱해서 조금은 안타깝고 조금은 안정된, 그런 기분이 든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싸구려 스킨 냄새가 난다.

후퇴한 시간의 냄새가 시월의 첫 주말에 흐린 바람을 타고 풍겨온다.

애니 홀의 냄새다.

싫지 않은 냄새. 할머니의 살갗에서 나는 냄새.

좋은 냄새는 아니나 나쁜 냄새도 아닌,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냄새. 아버지 등에 붙어있던 작업복 냄새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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