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이 함께 내리는 판단이 더 이성적이며 부조리한 감정들을 걸러낸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때로 우리는 집단이 이루어내는 감정의 과장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래서 집단은 ‘축제’를 만들기도 하고, ‘광란’을 만들기도 한다. 대개의 집단이 이루어내는 최종의 감정 상태는 말 그대로 ‘광란의 축제’에 해당된다.

전쟁을 일으키고 독재와 학살을 일삼는 권력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개인이 취하는 이성의 목소리를 외톨이로 만드는 일이다. 그와 함께 집단의 행할 수 있는 가장 원시적인 심리 상태를 끄집어내어 강력한 함성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외톨이가 되는 것이 두려운 모든 사람들은, 서로 결속되려 하고 그 결속으로 위험한 힘을 과시하며, 이 사회에서 가장 폭력적인 존재가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때로 질 나쁜 군중심리를 생산해내는 ‘대중’인 셈이다.

이 복잡한 사회에서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자기 확신은 턱없이 부족할 테고,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의 판단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왔던 쪽으로 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최악의 결과를 낳을지라도,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지 않고 군중에게 있으며, 그 결정이 최악의 실패를 낳을지라도 모두가 함께하는 참패이기에, 최소한 비웃음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연약한 개인의 목소리를 강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접대하고 연대한다. 그 관습이 접대하지 않는 자에 대한 천대를, 연대하지 않는 자에 대한 적대를 낳곤 한다. 한 배를 타지 않은 자들에게 배타적이게 되고, 공동의 선을 추구했어도 그 이익을 나누는 데에선 배제해버리는 악행을 의도적으로 행하곤 한다.

혼자만의 결정으로 군중을 이탈하여 외길을 가는 삶은 그러므로, 성공한다고 해도 존경을 받거나 하진 않는다. 길은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는 은근히 배타적이다. 기껏해야 예외를 낳은 기이한 경우에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다. 만약 그 숭고한 외길의 삶이 실패를 하게 된다면 영락없는 바보로 전락한다. 존경은 오로지, 같은 판단을 하고 같은 노선을 걸었던 군중 안에서 가장 탁월한 결과를 낳은 자에게 돌아간다.

-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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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탐포포를 비롯해서 야쿠쇼 코지의 연기는 실제로 영화 속 캐릭터이지 않을까 하는 연기를 한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흠뻑 젖어든다.

13년의 복역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 야쿠자였던 미카미는 적응을 하고 싶다. 그 누구보다 이 사회에 야쿠자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사람들 속에 스며들고 싶다.

하지만 이미 몸에 세포처럼 붙어 버린 초조함과 절망에서 벗어나고픈 성급함, 그리고 폭력적인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하지만 미카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들도 많다. 복지사도, 슈퍼의 주인도, 처음에는 돈벌이로 다가온 다큐멘터리 작가도 다 미카미를 응원한다.

우리가 평소에 늘 하던 슈퍼에서 물건을 고르고, 운전을 하고, 사람들과 일반적인 대화를 하는 게 서툰 미카미다. 13년 만에 나온 세상 밖으로 나온 미카미는 실은 세상 밖으로 나온 게 처음일지 모른다.

그 이전에는 야쿠자에 속해 있는 조직원으로 칼질을 일삼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며 결국 사람을 죽이는 일만 해 왔다. 정작 어린 시절부터 조직 생활을 한 미카미는 사회라는 곳이 처음이다.

밖으로 나온 사회는 정의와 선이 가득한 곳이라 생각했지만, 불의에 사람들은 모른 척 지나갔다. 미카미는 강도짓을 하는 양아치 두 명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런 미카미를 사회는 나무란다. 그러지 않는 게 좋다. 그게 흘러가는 이치다.

미카미는 운전면허시험도 계속 떨어지고 결국 예전 야쿠자 동료를 찾아간다. 거하게 대접을 받은 미카미는 역시 야쿠자에 속해 있을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경찰들이 급습하고, 야쿠자로 살아가는 건 요즘 사회에서는 무리라는 걸 알게 된다. 계좌하나 만들지 못하고, 아이들은 유치원에 보내지도 못한다. 평생 몹쓸 짓을 하며 술과 음식 때문에 말년에는 병에 걸려 시들해지는 것이다.

그런 미카미가 딱 맞는 일을 찾는다. 요양보호소에서 보조로 일을 한다. 이렇게 뿌듯한 기분은 처음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에 자부심도 느낀다.

시설에서 미카미는 정신지체가 있는 젊은 보조와 친하게 지낸다. 그는 미카미를 보며 항상 웃어 준다. 장애는 불편할 뿐이지 창피한 게 아니라고 미카미는 생각한다. 그런데 보호사 두 명이 그 친구를 괴롭히고 때리는 장면을 본다. 불의를 보면 지나쳐야 한다.

예전처럼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이런 자신이 너무나 밉고 싫다.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데 모두가 그 정신지체 보조를 욕하며 흉내 내며 웃는다. 그때 미카미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같이 웃어 버린다.

밖에서는 태풍이 오기 직전이고 그 정신지체 보조는 꽃을 꺾고 있다. 모두가 그를 놀린다. 그 속에 미카미도 있다. 퇴근하고 집으로 올 때 그 젊은 보조가 와서 미카미를 위해 태풍이 오기 전에 꽃을 꺾었다며 준다.

미카미가 바라는 멋진 세계는 이런 세계는 분명 아니었다.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보고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적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라고 했고, 고레에다 감독은 [서투른 한 남자의 생을 격려와 웃음으로 끝까지 응시한다.]라고 했다. 미카미는 그 꽃을 쥔 채 다음 날 아침 멋진 세계로 가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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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판타지 독립영화다. 하루에 한 번, 헙하고 숨을 참으면 투명 인간이 되는 초능력자 지우는 편의점에서 물건을 가득 들고 숨을 참고 편의점을 나가려다 아르바이트에게 딱 걸린다.

내가 보여요?

그렇게 경찰서에 오니 그 안에는 지우처럼 하루에 한 번 순간 이동을 하는 민성, 하늘을 날 수 있는 하진,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김공익을 만나게 되고, 나이도 같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만 모두가 초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경찰서에 잡혀오게 되는데.

하루에 한 번 초능력을 사용하는 초능력자들이 이렇게 만나게 된 건 우연인 것인지, 왜 모두가 오늘 하루 동안 초능력이 사용이 안 되는지? 어떻게 될까.

어린 시절에 받은 초능력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게 된 어른들의 이야기다. 어릴 때 내가 보는 아버지는 정말 초능력자 내지는 슈퍼맨 같았다. 동네에서 나를 괴롭히는 형을 혼내주기도 했고, 손재주가 좋았던 아버지는 내가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건 용접을 해서 만들어주시곤 했다.

분명 아버지에게 그런 능력을 받은 것 같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사용하기보다 하루를 겨우 버티기 위해서 나 자신에게 소모시킨다.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의 초능력은 다른 슈퍼히어로 영화 속 초능력에 비해 보잘것없고 하찮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투명인간이 되어 몰래 쌀을 기부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잡아낸다. 주인공들은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초능력을 사용한다.

지우는 한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의 초능력을 하찮게 여기지만,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그 하찮은 초능력을 발현시켜 보라고 한다.

아이를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엄마, 부모님을 위해서,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서 초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주위에 가득하다. 그 능력을 하찮다고 여겨서 그렇지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인 것이다.

웹툰 원작이 있다. 감독의 이력이 대단하다. 여러 영화의 스텝으로 많이 활동했지만 이 감독이 연출을 했던 영화들을 보면 원작을 가지고 만든 판타지 영화들이다.

이 영화에는 유명한 배우들이 우르르 나온다, 지우 역의 이유미를 비롯해서 정만식, 김민호 등 보면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조연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이파이브만큼 그래픽은 없지만 소소한 초능력 장면들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의 연출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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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이야기는 흔한 내용이다. 클리셰로 우리가 자주 보던 이야기다.

주인공이 서울에서 망하고 바람피운 남편이 이혼을 요구해도 해주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생계를 위해 도축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자존심이 망가지고, 그 사이에는 고향 친구이자 작업 반장과의 갈등이 있고. 이런 흔해빠진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보고 나면 이 현실과 현실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심정을 너무나 이해하게 만드는 배우들의 연기에 박수가 절로 나온다.

정자는 오랜만에 내려온 고향에서 자신의 이름이 싫어서 가명 새라로 지낸다. 모두가 새라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알고 골프를 즐기고 남편은 해외에 가 있는 줄 아는데 정자라고 본명을 부르는 사람이 나타난다.

바로 작업반장이자 고향 친구인 미옥이다. 서울에서 도망치듯 내려온 고향에서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친언니가 다니는 돼지 창자를 분리하고 씻는 일이다.

그러나 정자는 비위가 상해서 구토가 올라온다, 정자 때문에 작업이 늦어져 반장에게 한 소리를 듣는다.

이 짤막한 장면으로 정자가 서울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반장과는 어떤 사이인지 짐작이 간다. 새라로 살기 위한 정자의 마음처럼 영상은 채도가 전반적으로 약간 빠져있다.

친언니가 손이 다쳐도 작업을 강요하는 반장과 공장 직원들에게 폭발하는 정자, 아니 새라 씨.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삶의 구렁텅이와 우울감을 표정과 연기로 오민애는 표현한다.

구토가 올라와 헛구역질만 하던 정자는 시원하게 구토를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며 끝난다.

25분 정도의 분량으로 두 시간가량 되는 이야기를 본 것처럼 연출한 영화, 오민애와 전소현의 연기가 빛을 발했던 [나의 새라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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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22년에 나온 공포영화다. 코난이나 쉬라 같은 판타지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미국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서 꽤나 재미있게 봤다. 주인공 테스는 일 때문에 디트로이트의 한 임대주택에 머물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이 디트로이트라는 곳이 미국에서는 자동차 도시로 인구가 150만 명이나 되는 메트로폴리탄이었다. 하지만 미국 자동차는 다른 나라에서 몰기가 어려웠다. 차도 크고 기름을 왕창 잡아먹으니 점점 쇠퇴하면서 인구가 감소하더니 현재는 유령의 도시 같은 모습이 되었다.

사람이 빠져나가고 난 후의 건물이나 집은 비어서 그대로 흉흉하게 변했다. 테스가 아침에 임대주택에서 나오면 바로 앞의 풍경이 엉망이다. 거리가 황폐하고 집은 전부 폐허가 되었거나 사람이 살지 않아서 너무나 흉흉하다.

테스가 처음 임대 주택에 도착했을 때 그 안에서 남자가 나온다. 두 사람은 자기가 살 집이라고 서로 옥신각신한다. 테스는 할 수 없이 다른 곳에서 지내려고 했지만, 이 도시의 특성상 집이 없다. 그리고 호텔이나 모텔도 없다.

결국 그 남자와 하루를 묵게 된다. 남자의 이름은 키스. 알고 보니 이중 계약이 된 것이다. 테스는 살갑게 구는 키스를 경계하지만 밤에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의 공통점 같은 것도 발견하면서 경계를 푼다.

다음 날 테스가 면접을 보고 난 후 면접관에게 그 동네와 그 집에 대해서 조심하라는 말을 듣는다. 테스는 동네가 황폐하고 흉흉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오는데 한 노숙자가 그 집에서 나오라며 무섭게 따라온다.

테스는 벌벌 떨며 문을 간신히 열고 집으로 들어온다. 키스는 외출을 했고 테스는 집을 둘러보다가 지하로 내려가서 그만 갇히고 만다. 지하실에는 비밀 문이 하나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간 테스는 더러운 침대가 있고 그 앞에는 카메라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벽에는 피가 묻어 있는 것도 본다.

그때 집으로 온 키스가 지하로 내려오는데 테스가 너무 놀라 당장 나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키스는 여기 누가 있다며 더 깊은 지하로 간다. 여기까지 봤을 때 분명 키스가 빌런으로 나오겠구나 싶었다.

키스로 나온 배우는 ‘그것’에서도 무시무시한 역이었던 빌 스카스가드다. 빌 스카스가드의 아버지와 두 형 모두가 배우다. 아버지는 스텔란 스카스가드로 토르와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박사로, 듄, 안도르 시리즈에서도 나올 만큼 유명하다.

큰 형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레전드 오브 타잔에서 엄청난 몸의 타잔이었다. 둘째 형은 바이킹 시리즈에 나온다. 이 가족 남자들이 전부 키가 2미터 가까이 된다.

아무튼 지하로 간 키스는 돌아오지 않고 테스는 키스를 찾아 들어간다. 그때 인간이라는 볼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에게 키스가 잡혀 잔인하게 죽고 만다. 그리고 테스마저 잡히고 만다.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주인공이 그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 집에서 테스와 키스의 흔적을 보며 집을 내놓기 위해 집구석구석의 치수를 잰다. 그러다가 지하를 발견하고 내려가게 되고 그 안에서 더러운 몰골의 테스와 마주친다.

이제부터 그 생명체와의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도시에는 노숙자가 많고 노숙자의 인권이라는 건 거의 보장받지 못한다. 후에 테스가 그 집에 대해서, 그 집 안에 예전부터 뭔가가 있다고 해도 경찰은 테스를 거리를 두면서 노숙자의 말은 정신이상자의 말처럼 여긴다.

이 영화는 중반부까지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키스가 죽고 새로운 주인공(저스틴 롱)의 등장으로 인해 괴생명체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긴장감이 떨어지고 공포 또한 줄어든다. 그래도 공포물을 좋아한다면 꽤 볼만하지 않았나 싶은 영화 ‘바바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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