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니콜 키드먼[로미]이 도로에서 개에게 위협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해리스[사무엘]가 개를 부르는데, 그 순간 영화 [언페이스풀]이 떠올랐다. 아,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중년 여성이 젊은 남자에게 빠지는 이야기구나. [언페이스풀]은 불륜으로 시작해 점점 스릴러로 변해갔다. 이 영화도 그렇게 흘러가려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로미에게는 멋진 남편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할 게 없는 삶이다. 하지만 남편과의 잠자리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던 중 자신의 회사에 젊은 사무엘이 들어오고, 로미는 그에게 먼저 접근해 육체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젊은 육체의 맛을 알아버린 로미는 좀처럼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사무엘이 로미에게 메조킥 성인영화에서나 볼 법한 체형을 요구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쯤 되면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았다. 젊은 남자에게 빠진 여자가 점점 궁지에 몰리고, 결국 파국을 맞는 스릴러. 나는 그런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길 기대하며 봤다. 후반부로 갈수록 섹스에 중독된 로미의 망가지는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때는 [세브린느] 같은 영화가 떠올랐다.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다 컸다. 사회적으로도 이룰 만큼 이뤘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섹스에 중독돼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여러 영화를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 감독이 무슨 영화를 리메이크했나 싶었는데,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
로미는 사무엘이 젊은 여직원과 함께 있는 모습만 봐도 질투에 사로잡힌다. 남편이 따로 있는데도 그렇다. 자신에게는 젊은 섹스 파트너가 필요하고,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욕망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내게 없는 것을 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빼앗길까 봐 안달한다.
결국 로미는 남편도 있고 수많은 사람이 모인 파티에서 사무엘과 끌어안고 있다가 들킨다. 그 과정에서 남편은 사무엘에게 몇 대 얻어맞기까지 한다. 로미는 들키기 전부터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한 번도 당신에게 흥분을 느낀 적이 없다고. 그러고는 사무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킨 뒤 남편에게 울면서 매달린다. 이쯤 되면 남편도 로미도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버린 셈이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이상하게 힘이 빠진다. 로미가 파멸하든 사무엘이 파멸하든, 아니면 둘 다 무언가를 잃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남편과의 관계도 어떻게든 수습하고, 일도 계속하며, 로미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오히려 [세브린느]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면서 인물을 끝까지 밀어붙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지금의 결말은 로미가 겪은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니콜 키드먼이 홀딱 벗고 나오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복근이며 근육이며, 몸을 얼마나 관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몸이 묘하게 낯설다. 가슴은 보형물의 흔적이 너무 도드라지고, 얼굴과 손에서는 세월이 느껴진다. 젊어 보이려고 애쓴 흔적과 감출 수 없는 나이가 한 몸에 공존하는 느낌이다.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를 볼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들었다.
노골적인 섹스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는 아니다. 대신 메조킥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있고, 욕망에 빠져들면서도 불안해하는 니콜 키드먼의 연기를 볼 수 있다. 겉으로는 성공한 남편과 화목한 가정, 사회적 지위까지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삶을 너무 쉽게 판단하는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저 사람은 행복하겠거니, 저 정도면 충분하겠거니 생각한다. 정작 당사자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결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가 던진 질문은 흥미로운데, 그걸 풀어가는 방식도 마지막에 도달한 자리도 영 시원찮다.
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다 알 수 있을까. 가장 가까이 지내는 아내나 남편이라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같이 산 세월이 길다고 마음까지 저절로 읽히는 건 아니니까. 결국 대화를 해야 한다. 싫든 귀찮든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계속 물어야 한다.
그런데 남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대화를 귀찮아하고 피하려 든다.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건지. 그러면서 상대가 왜 변했는지는 궁금해한다. 참 모순이다. 우리는 그런 모순을 안고 살면서도 정작 그 모순을 들여다보는 일은 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