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혀 울 일이 없을 것 같은 오래된 영화에서 문득 눈물이 떨어질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다. 몇십 년 만에 다시 봤다. 베이다가 토마스를 잃고도 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오래전에는 미처 몰랐던 감정인지 아니면 그때는 알지 못했던 슬픔을 이제야 알아보게 된 것인지.
이 영화는 맥컬리 컬킨이 [나 홀로 집에] 1편을 끝내고 2편이 나오기 전에 출연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맥컬리 컬킨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극장을 찾은 관객이 많았을 것이다. 케빈의 기발한 장난과 유쾌한 소동을 기대했다면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맥컬리 컬킨은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 있다.
베이다는 태어날 때 엄마를 잃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베이다가 그리는 엄마는 온통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직 남은 사진 한 장을 들고. 아빠는 장의사다. 죽은 사람을 보내는 일을 하는 아빠가 정작 살아 있는 딸의 마음은 알아주지 못한다. 그런 아빠가 장례식장 분장사로 들어온 쉘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반지까지 선물하자 베이다는 아빠가 밉다. 아빠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생겼지만 베이다에게 엄마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엄마를 생각하고, 시를 쓰고 싶어 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말로 꺼내기 어려운 마음을 시로 옮기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베이다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른들의 것이다. 어른들은 자기들끼리 사랑하고, 결혼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아이의 슬픔은 그 와중에 자꾸 뒷전으로 밀린다. 베이다가 왜 아픈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누구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아이에게도 어른들이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은유로 보여준다.
그런 베이다 곁에는 토마스가 있다.
토마스는 베이다와 잘 맞는 구석이 별로 없는 아이다. 요즘 말로 하면 완전한 T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밤이 되면 집에 가야 한다. 베이다가 상상력을 한껏 펼칠 때마다 토마스는 현실적인 말로 찬물을 끼얹는다. 온갖 알레르기를 달고 사는 녀석이라 베이다의 모험에 투덜거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결국 따라나선다. 둘 중 누가 더 용감한지 따질 것도 없이, 베이다가 가는 곳에 토마스가 있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베이다에게 토마스는 친구 이상의 존재다. 말하지 않아도 자기 옆에 있어 주는 아이. 베이다의 마음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 마음을 혼자 내버려 두지는 않는 아이. 치매를 앓는 할머니 역시 그런 존재다. 할머니는 베이다의 사정을 말로 풀어 주지 않는다. 그저 곁에 있다. 베이다에게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을 고치려 들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는 사람들.
두 아이가 벌집을 건드리는 장면이 있다. 벌떼를 피해 도망치다가 강물에 뛰어들고, 그 소동 속에서 베이다는 자신이 아끼던 요술 반지를 잃어버린다. 아이에게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다. 손에 쥐고 있으면 무언가 특별한 힘이 생길 것 같은 물건이다. 베이다가 믿는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베이다는 자신이 느끼는 상실을 시를 통해 마음을 붙잡으려 한다.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토마스에게 고백하며 결혼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토마스의 대답이 재미있다. 선생님과 결혼하는 건 불법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시험 점수를 백 점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아이답고, 엉뚱하고, 어딘가 토마스답다. 베이다가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를 해도 토마스는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두 아이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토마스는 힘으로도 덩치로도 베이다를 이기지 못한다. 겁도 많고, 현실적이고,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아이지만 베이다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깊다. 베이다가 잃어버린 반지를 찾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혼자 벌집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달려드는 벌떼에 쏘여 목숨을 잃는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토마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베이다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엄마를 잃고 태어난 아이에게 또 하나의 상실이 찾아왔다. 하지만 엄마는 베이다가 태어나기 전에 떠났고, 토마스는 베이다가 함께 웃고 떠들며 지냈던 시간 속에서 사라졌다. 엄마는 상상으로라도 그려 볼 수 있었지만 토마스는 다르다. 어제까지 곁에 있던 아이가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같이 모험을 떠날 수도,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 수도 없다.
베이다는 슬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어쩌면 슬픔이 너무 커서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상실이다. 밝고 엉뚱했던 베이다의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진다. 토마스를 잃은 베이다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 아이에게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보일지. 한참을 생각하게 됐다.
영화의 후반, 베이다는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한다.
‘눈물을 흘리는 버드나무여, 왜 울고 있나요?’
버드나무는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울고 있다. 어쩌면 토마스도 그런 아이였는지 모른다. 자기 마음을 멋지게 설명하지도 못하고, 베이다가 겪는 일을 모두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늘 그 자리에 있던 아이. 크지도 않고 특별히 강하지도 않았지만 베이다의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누구보다 컸다. 그 아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베이다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조금씩 알아간다.
나는 이 시 낭독 장면이 좋다. 베이다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해서가 아니다. 토마스가 돌아온 것도 아니고, 없어진 자리가 다른 무언가로 채워진 것도 아니다. 그저 베이다는 자기가 느끼는 것을 시로 썼다. 마음속에서 도무지 정리되지 않던 감정이 문장으로 나왔다. 어쩌면 그게 베이다가 할 수 있는 전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아프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놀란 건 맥컬리 컬킨의 연기였다. 같은 해 겨울에 개봉한 [나 홀로 집에 2]의 케빈을 떠올리면 더 그렇다. 케빈은 영리하고 장난기 넘치는 아이였지만, 여기서 토마스는 유약하고 단순하며 어딘가 답답할 만큼 직선적이다. 베이다의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면서도 그 애를 위해서는 혼자 위험한 곳까지 찾아가는 아이. 맥컬리 컬킨은 그 모습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토마스가 더 사랑스럽고, 그 아이가 사라진 뒤의 빈자리도 더 크게 느껴진다. 케빈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다.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본다는 건 가끔 이상한 일이다. 줄거리는 기억나고 결말도 알고 있는데,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장면에서 갑자기 마음이 무너진다. 영화가 달라진 건 아닐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가 달라졌거나, 그동안 살아오면서 조금씩 알게 된 감정들이 화면 속 아이의 얼굴과 겹쳤을 것이다.
베이다는 토마스를 잃고 마음의 공백이 커졌다. 그 공백을 메꾸게 해 줄 무언가도, 그 슬픔을 없애 줄 사람은 없다. 다만 베이다는 시를 썼고, 우리는 그 시를 듣는다. 베이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그 비슷한 성장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 내내 흐르는 기저는 '죽음'이다. 베이다가 느끼는 죽음,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는 죽음에 관해서 이토록 깊이 있게 다루었다. 마지막 베이다는 토마스의 엄마를 안아 준 다음 말한다. 토마스는 걱정하지 마세요, 하늘에서 우리 엄마가 지켜 줄 거예요. 이 계절에 눈물을 흘리고 싶다면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