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달아 보는 영화 속 주인공들을 관통하는 한 단어가 있다. 지질함. 지질하고 지질해서 더는 지질할 수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인데, 그 모습이 어찌나 생생한지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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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남자들은 회피형이 많다. 싸우면 일단 자리를 피하고, 제대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 나중으로 미룬다. 그러다 일이 커질 대로 커지고 나서야 다투게 되고, 끝에 가서는 이럴 바엔 그냥 헤어지는 게 낫겠다고 한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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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는 엠마가 회피형처럼 보인다. 과거를 찰리에게 숨겼고, 찰리와 마주안아 제대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그렇게 된 상황을 피하려고 한다. 찰리는 엠마가 과거의 일을 숨겼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계속 질문하지만 대화가 되는 건 아니다. 찰리 자기가 궁금한 것만 묻고, 답을 듣고도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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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혼자 엠마라는 인간의 형체를 만들어낸다. 점점 부풀려진 그 형체는 어느새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 있다. 친구 앞에서 엠마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주절주절 늘어놓고, 이런 여자와 결혼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한다. 칼을 휘두를 수도 있고 총을 쏠 수도 있다. 영화는 그 상상에 맞춰 엠마의 얼굴마저 섬뜩하게 잡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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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과 찰리 같은 인간들의 특징은 자신이 남에게 준 피해보다 남이 자신에게 준 피해를 훨씬 크게 여긴다는 것이다. 엠마가 저지를 뻔한 일이 자신들이 실제로 저지른 일보다 더 나쁘다고 믿는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은 머릿속에서 얼마든지 키울 수 있으니까. 그렇게 의심하고 부풀리고 겁을 먹다가, 결국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을 더 무서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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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는 엠마를 향한 사랑이 식었다. 그런데도 예정된 결혼식은 올려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직장 동료인 여자에게 엠마 이야기를 구질구질하게 털어놓다가 바람까지 피운다. 참 지질하다. 사랑은 끝났는데 결혼은 해야 하고, 결혼은 해야 하는데 엠마는 무섭고, 무서운 엠마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기대려 한다.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남이 얼마나 위험한 인간인지는 열심히 따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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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도 비슷한 부부가 있다. 결혼한 지 3년. 매일 싸우고, 방도 따로 쓰고, 밥도 각자 먹는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나 싶지만 남편은 별 타격이 없다. 아내가 대화를 시도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자고 해도 남편은 마주 앉는 것부터 싫어한다.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은 한쪽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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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는 게 맞아 보이지만 아내는 이혼한 여자로 남는 게 싫다. 결혼에 실패했다는 낙인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주변의 시선도 만만치 않다. 엄마조차 딸의 행복보다 동네 사람들 눈과 친척들 앞에서의 체면을 걱정한다. 이혼하면 동네 창피에 친척들 볼 면목이 없다는 식이다. 당사자 둘이 어떻게 사는지는 뒷전이고, 남들이 어떻게 볼지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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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다. 둘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어도 신랑이나 신부의 부모가 거대한 빚을 지고 있을 수 있고, 형제자매 중 누군가가 사기꾼이거나 살인죄로 수감되어 있을 수도 있다. 부모가 결혼한 자식들 사이에서 누구는 더 챙기고 누구는 외면하는 일도 생긴다. 당사자들이 아무리 괜찮아도 주변에서 터지는 일까지 막을 수는 없다. 결혼이라는 게 두 사람의 결합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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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는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참 복잡하다.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시작해도 그 마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자꾸 끼어든다. 자존심과 체면, 의심과 두려움, 가족과 주변 사람들까지. 어쩌면 관계를 망가뜨리는 건 처음부터 큰 사건이 아니라,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일을 피하다가 점점 더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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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을 보고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둘은 다시 잘해보려는 걸까. 한바탕 폭력이 오가고 피까지 튄 뒤에, 망가진 관계를 주워 담아 다시 붙여놓으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사랑이 남아 있는 건지, 아니면 끝내는 일이 두려워서 붙들고 있는 건지. 영화가 끝나도 그 둘의 다음 날이 궁금하다기보다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부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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