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단편소설집으로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고베 지진을 주제로 만들어졌다. 총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인데 장편 같은 소설들이다. 문학사상사에서 출간된 이 책의 추천의 말을 장석주 시인이 썼다. 장석주 시인도 이 책에 수록된 소설은 장편소설을 읽는 것 같다고 했는데 정말 읽어보면 장편 소설처럼 느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베 지진으로 인해 단절과 고립으로 기어 들어간다. 또는 들어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게 된다. 절망의 저 끝으로 가면, 절망의 끝으로 가야만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수록된 소설 중에 ‘벌꿀 파이’는 ‘패밀리 어페어’나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개똥벌레(반딧불이)’와 궤를 같이 하는 소설이다. 리얼리티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하루키 식으로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패밀리 어페어는 너무 좋아서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하루키가 이렇게나 유머러스하다니! 하는 부분으로 채워진 소설이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벌꿀 파이’의 주인공 준페이는 하루키 자신을 투영했다. 아마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을 쓰고 난 후 문단에서 받은 모질함?에 대해서 준페이라는 주인공을 빌려 내뱉고 있다. 준페이는 소설 속에서 나약한 인간이지만 강함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설을 쓰자고 준페이는 생각한다. 날이 새어 주위가 밝아지고, 그 빛 가운데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꼬옥 껴안고, 누군가가 꿈꾸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소설을, 하지만 지금은 우선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두 여자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가 누구든, 정체 모를 상자 속에 처넣어지게 해선 안 된다. 설사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대지가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고 해도.’ -벌꿀파이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은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이다. 보잘것없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회사원 가타키리에게 어느 날 개구리가 나타나 도쿄를 구하자고 한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가타키리는 거절을 하지만 결국에는 개구리 군을 도와 악의 화신은 지하에 사는 지렁이를 물리치고 도쿄를 구해낸다.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이 너무 좋아서 이보다 좀 더 길게 이 소설의 오마주를 써서 계간지에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음에 든다며 그 소설이 실리게 되었다. 오마주한 소설은 여기 브런치에도 있으니 혹시 보고 싶으시면 ‘그리즐리 씨, 고마워요’를 읽으시면 됩니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3088


사람들은, 아니 이전의 전문가들(문학평론가들을 비롯해서 말하기 좋아하는 샌님 같은 문학가들)은 하루키의 소설은 영상으로 옮기기에 애매하고 이상하다는 평을 많이 내놓았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 수가 거의 없다는 식으로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 현시점에서 보면 하루키의 소설만큼 영화가 많이 된 소설가도 잘 없다.


또띠븐 킹이라 불리는 스티븐 킹이나 러브 크래프트는 미지의 세계, 초현실, 기괴한 괴물이나 유령 등이 나오는 이야기니까 주로 영화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제외하고 하루키의 소설만큼 영화로 많이 된 소설도 없다. 무엇보다 하루키의 소설은 여러 나라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신의 아이들은 춤춘다’는 2007년 로버트 로지볼이라는 감독이 조안 첸 주연의 영화로 만들었다. 2008년에 폼 플린트 감독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대해’가 만들어졌다는데 포스터도 찾을 수 없고 영상도 찾을 수 없어서 아쉽다. 2010년에는 카를로스 쿠아론 감독, 스파이더맨의 그녀 키얼스 던스턴 주연의 ‘빵 가게 재습격’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 하루키는 원안으로 참여를 하기도 했다.


이미 1980년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오오모리 가즈키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부분을 하루키는 에세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언급을 했다. [오오모리는 효고 현에 있는 아시야 시립 세이도 중학교의 나의 3년 후배이며, 내가 쓴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영화화되었을 때 감독을 맡은 사람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드라이브 마이카, 버닝, 하나 레이 만, 토니 타키타니, 상실의 시대. 이렇게나 많은 영화가 그의 소설이 원작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영화가 되어 나온다면 정말 좋아 죽을 것 같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빵 가게 재습격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 소설집의 수록은 아니지만 소설만큼 좋았던 영화 하나 레이 베이의 예고편을 올려본다 https://youtu.be/W9O5RXGzrao


하나레이 베이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레이 만'으로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도쿄 기담집'에 실린 단편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하나레이 베이를 한 번 더 봤다. 마지막 사치가 타카시의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들었을 때 감정이 순식간에 바뀐다. 그 감정을, 사치의 마음이 화면을 뚫고 나왔다.


내 마음에 뚫린 공백은 나도 알 수 없다.

길을 잃어버려 뱅뱅 맴도는 느낌일 뿐이다.

이 공허하고 손에 닿을 것 같은데 끝에 도달할 수 없는 이 기분을 어떻게 할까.

나는 10년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일까.

나는 지금 누구이며, 지금 이전에는 누군가의 엄마였고 어떤 남자의 아내였다.

등신 같은 남편이 듣던 헤드 셋이 아들을 건너 내가 결국 듣고 있다.

앞이 보였던 내 인생을 깡그리 망가트리고 깨버린 내 삶에 들어온 남자들을 증오한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그 남자들은 나에게 먼지만큼도 행복을 주지 않았다.

타카시를 가진 것을 알고도 마약에 빠져 있던 남편도, 남편의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타카시도 어쩌면 내가 원하는 바대로 신이 있다면 신이 데리고 가버렸다.

낡은 티브이처럼 죽은 후에도 하얀빛이 화면 위로 깜빡깜빡 헤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뚝 끊어지는 경우처럼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성실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성실한 먼지가 안개처럼 가득 껴서 주변을 떠돈다.

남편과 타카시를 떠올리면 그렇다.

불성실한 공기다.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는 이미 들어와 버린 내 인생의 낙인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그 남자들이 듣던 헤드 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들이 내게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는 새.

그리고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나는, 나는 바보라서... 다리 한쪽이 잘린 일본인 서퍼를 본 순간 나는 내 마음속의 공백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내 자신이 먼 옛날에 죽어 풍화되어 바짝 말라버린 거대한 생물의 미궁과도 같은 체내를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서 나는 시간의 구멍을 빠져나와 그 한가운데에 쑥 빠져버렸지만 타카시가 듣던 음악을 듣는 동안 나는 다리 한쪽이 없는 서퍼가 타카시라는 확신이 들었다.

타카시는, 내 아들은 10년 동안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의 소중한 아들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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