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수많은 단편 소설집 중에 아마 제일 얇은 단편집일 것이다. 개똥벌레는 2004년인가? 도서출판창해를 통해서 출판되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초판 격인 이전의 개똥벌레가 있다. 이전에 나온 책은 겉표지에 5세 아이가 초록색 크레파스로 마구 낙서를 해 놓은 듯한 표지인데 나는 그 소중한 책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하루키의 한국 출판 소설은 다 가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닌데 어째서 도망을 가는지 모르겠다. 내 주위에는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아예 하루키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래서 누군가에게 빌려주지도 않는데 찾아보면 없다. 초판의 개똥벌레 표지에는 재미있게도 ‘헛간을 태우다, 그 밖의 단편’라고 쓰여 있다.


이 단편집은 얇은 만큼 두 편이 전부다. ‘개똥벌레’와 ‘헛간을 태우다’가 실려 있다. 헛간을 태우다는 이창동 감독이 영화 ‘버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영화 속에 종수가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하고 꿈을 꾸면 비닐하우스가 불에 타는 꿈을 꾸는데, 헛간을 태우다,라는 단편 소설은 하루키가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를 읽고 오마주를 하여 자기 식으로 쓴 것이고, 이 모든 걸 이창동 감독이 버닝으로 담아냈다.


이창동은 원래 소설가여서 그런지 버닝을 보면 대사가 마치 메타포어 같다. 공백과 공백이 존재하고 그 공백 사이를 은유가 들어앉아서 대사를 이어 주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조명을 기가 막히게 사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종수가 나오는 부분은 자연광을 사용하여 아주 어둡다. 그건 해미가 나오는 부분도 그렇다. 그렇지만 벤이 나오는 장면은 인공광원을 사용하여 아주 밝게 나온다. 그것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과 변두리의 것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조명으로 잘 표현했다.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는 아주 고집불통의 완고한 아버지가 나온다. 주인공 ‘나’는 분노조절이 되지 않아 지주의 헛간에 불을 지르는 아들로 완고한 아버지를 닮았지만 또 평화로운 삶을 바란다. 보통 아버지의 완고함은 가부장적이 아니더라도, 그 반대적인 친밀한 아버지의 모습일지라도 살다 보면 완고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 완고함이 가정을 이루고 그 벽에 꺄지지 않게 지탱하는 모태가 되기도 한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 속 종수와 아버지의 모습도 그렇다. 학창 시절에 꼴 보기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도 막상 나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나면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윌리엄 포크너도, 하루키(는 너무나 많은 소설 속에서)도,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서도 유전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대물림.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고 해도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버닝 영화 속 벤의 모습은 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구심축 같은 존재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 어느 시점에도 존재하는 축. 물질로 이루어져 사람들을 돌아가게 만들고 사람들이 그 축을 따라 움직이며 서로 광기에 사로 잡혀 공격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거대한 사회의 중심이 되는 축. 즉 굳건한 진실 같은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고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구성원만 바뀔 뿐 근간을 이루는 물질 즉 유전자는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다.


그 축은 동시에 우물 같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곳곳에 있는 우물에 한 번 빠지면 어둠에 갇혀 위를 보며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공포에 시간을 보낸다. 그 속에서 흔들리는 가능성 따위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귤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늘 있어야 할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된다. 마치 음식을 먹고 있는데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건 재능도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사실 그곳에도 존재하고 이곳에도 존재한다. 동시 존재한다. 동시 공체일지도 모른다. 스팅이 그에 관한 철학적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 존재하지만 렌선을 타고 그곳에도 존재한다.


구름 없던 하늘에 구름이 모락모락 그림을 그려 한참을 서서 바라보는데 꼭 저 대책 없는 구름의 모습이 나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름 같은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참 어렵다.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양립된 마음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어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한쪽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쩌면 일상의 반은 습관을 유지하려고 자신과 싸우고 또 일상의 반은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해미와 종수는 언어습관이 억울하고 비굴한 일이 많은지 곧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말을 한다. 바늘로 툭 건드리면 마치 눈물이 탁 터져버릴 것 같다. 그 울음이 분에 차서 나오는 울음인지 환희에 차올라 나오는 눈물인지는 모른다. 그에 비해 벤은 유쾌하고 망설임이 없다. 이창동의 세계에서 보면 이전 영화에서도 서민의 얼굴은 늘, 어쩐지, 지극히 그러했다.


팬터마임, 고양이, 우물, 춤을 추는 무희가 해미를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이런 수식어를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에게서 잘 떠왔다. 망가지지 않게 그릇에 잘 담아와서 그것을 화면에 골고루 펼쳐서 해미를 만들어냈다. 해미는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 나오는 그녀로서, 여러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말하는 동시 존재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지칭할 때 저는 이런 사람, 또는 이건 싫어요, 이건 좋아요, 이 맛은 꽤, 이건 별로,라고 할 때 그것이 정말 나 자신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상대방에 따라 내가 싫어도 상대방이 좋아하면 따라가는 경우가 있고, 나를 가장한 내 속의 또 다른 추한 마음의 내가 있다는 것도 안다. 내 속에도 여러 명이 동시 존재하고 있다.


해미는 마치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의 모습처럼 보인다. 메타포가 뭐지? 하면서도 종수에게 자신도 모르게 꽤 많은 메타포를 안겨준다. 종수는 그 메타포의 끈을 잡고 해미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댄스 댄스 댄스에서도 심지어는 15살 소년 다무라 카프카에서도 잘 나타난다.

매일 아침저녁 벤 녀석이 태울 것 같은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매일 몇 킬로미터나 되는 근처에 있는 낡고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녔다. 떨어지고 찢어진 비닐을 겨우 달고 비닐하우스라는 걸 알아차릴 수조차 없는 비닐하우스는 몇 개나 되었다. 벤 그 녀석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고 했다. 그 녀석이 태울만한 비닐하우스는 내가 다 알아볼 수 있다. 벤 녀석이 비닐하우스 하나를 태웠다면 나는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달 가까이 매일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을 다녀도 타버린 비닐하우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면서 나는 벤 녀석이 나로 하여금 비닐하우스를 태워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 녀석이 건네준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나의 머릿속에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이미지를 심어 준 다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이미지는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점점 커져가고 있는 착각이 든다.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꿈을 꾸면 어린 내가 태워버려 활활 타오르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일종의 절정기를 느낀다. 벤 녀석이 태워버리는 것을 기다리기 전에 내가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내가 쓸모없고 소용없는 것들을 태우는 것이다. 없애는 것이다. 그러는 편이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태워 없애는 것. 수많은 인간들 중에 개츠비 같은 벤 녀석 만이 하는 이 짓거리를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그래야 혜미가 돌아올 것 같으니까. 커다랗고 하루 종일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럼에도 잘 굴러가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내가 태워 없애는 것이다.

"씨발, 나는 해미를 사랑한다구요."

종수가 애타게 말을 하지만 벤은 큭큭큭큭 웃으며 대마를 피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니 안 그런 척 하지만 나 이외의 사람들은 멸시당해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웃음. 킥킥 킥킥 거리며 웃는 소리는 귀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피부를 통해서, 내 얼굴에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서 기어 들어온다. 마치 벌레처럼.

종수는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수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한 번 터지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고 말이다. 종수는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걸 알고 있다.


가진 게 없어도 재미를 위해서 여행을 가고 팬터마임을 배우는 해미는 재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벤과 어울리지만 종수는 낄 수 없다. 공항에서 곱창집으로 가면서 벤은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우수한 DNA를 이어받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종수가 가지지 못한 엄마와 웃음을 난타한다.


종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종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분노조절로 구치소에 간 것처럼 자신도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해미 이전의 해미들이 벤의 서랍 속에서 사라져 갔다는 것을. 유전자는 내면의 호러인 것을.


사람들은 버닝이 미스터리하고 애매해서 어렵다지만 실은 버닝은 시처럼 구체적이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모든 장면과 대사가 구체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구체적으로 다 나타난다. 단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구체성을 사람들이 찾지 못해서 어려울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해미는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를 닮았다. 이 단편집의 단편소설 '개똥벌레'가 장편소설이 된 것이 '상실의 시대'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대체로 몸속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느닷없이 다른 형태가 되어 비명처럼 밖으로 툭 튀어나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개똥벌레의 주인공은 친구의 죽음을 본 후 죽음은 생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뿌연 공기 같은 미미한 죽음의 잔존이 주인공을 끝 간 데 없는 결락으로 몰고 간다.


하루키의 단편 개똥벌레를 양쪽에서 잡고 힘 좋은 누군가가 주욱 늘린 것이 노르웨이 숲, 상실의 시대다. 개똥벌레에서 주인공은 친구가 자살을 하고 난 후 친구의 여자친구와 만나게 되면서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누군가의 팔이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체온이 아니라 누군가의 체온이었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문장이 단편인 개똥벌레에서 장편인 노르웨이 숲으로 심도 있게 늘어나게 된다.  단편인 개똥벌레에서는 장편인 노르웨이 숲의 나오코가 요양소에 들어가게 되고 편지를 주고받는 것까지 나온다.


나오코, 그녀에 관한 기억이 와타나베 안에서 희미해져 가면 갈수록 와타나베는 더욱 깊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세계관은 그간 하루키 소설의 어떤 뿌리가 되었다. 토니 타키타니에서도, 하나레이 만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영화가 되어 오토를 잃고 나서야 제대로 상처받는 법을 알게 된 가후쿠처럼.


단편인 개똥벌레가 늘어나서 노르웨이 숲이 되었고 후에 그린 파파야 향기와 씨클로의 트란 안 홍 감독에 의해 영화가 되었다.

감독인 트란 안 홍의 색채는 필름 카메라에서나 볼 법한 색감이 우울함에 번지는 물감처럼 흐릿하다.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닿을 수 없는 붉은 우울을 정화시키는 것은 맑고 투명한 미도리다. 하지만 우울이란 밝음 속에 숨어 있는 우울이 더 단단하고 크고 위험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미도리는 와타나베만 곁에 있어주면 된다. 약속을 해 놓고도 만나러 나오지 않아도 남는 게 시간이라 괜찮아, 자산 같은 시간에 책이나 읽은 돼(이런 대사는 실은 없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스타일을 떠올렸을 때),라고 해버리는 와타나베를 미도리는 좋아한다. 미도리는 그게 사랑이다.


하루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로 옮기는 작업은 어렵기 때문에 많은 영화감독이 포기를 했다. 아마 앞으로 39년은 더 인기가 있을 ‘노르웨이 숲‘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을 때 트란 안 홍 역시 고민이었을 것이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하루키의 문체를 영상으로 뿜어내야 하기에 한 공간에서 세트를 전부 바꿔가며 촬영을 했고 음악은 류이치 사카모토, 미야자와 리에가 쓰러질 듯 말 듯 멋지게 에이코와 하사코를 다 표현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하루키의 영화는 위에서 말한 이창동의 ‘버닝’이다. 그건 정말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루키도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을 언급했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코와 레이코가 요양하는 시설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시설에 들어가서 요양을 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엄청난 시설과 스태프가 훨씬 많기에 돈이 많이 들겠지. 그렇지만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왜곡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왜곡된 마음을 바로잡으려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왜곡을 받아들이려 생활한다. 내게 정말 필요한 시설인 것이다. 그리고 페페를 기르는 카페의 아가씨와 환자 같은 이상한 닥터와 이야기도 나누고 싶고, 나오코가 와타나베의 은밀한 곳을 만져 주었던 강렬한 나무의 냄새가 있던 숲에도 들어가 보고 싶다. 거기서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을 제대로 듣고 싶다. 왜곡된 마음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노르웨이 숲’ 속 미도리는 현실감은 제로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스럽다. 붉은 피로 온통 세상이 덮이려 할 때 미도리 하나 만의 존재로도 와타나베는 살아갈만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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