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발단은 투정 부릴 수조차 없을 만큼 맑게 갠, 7월의 일요일 오후였다. 7월의 첫 일요일이었다.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하루키는 7월의 모습을 투명한 유리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하루키만의 언어로 멋지게 표현을 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떠오른 가난한 아주머니가 온 마음을 휘어잡았다.


마치 거대하고 끊임없을 것만 같은 행복을 이어주는 건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난한 아주머니의 가난이란 무엇일까. 성석제와 톨스토이 작품 속 가난은 실존적인 가난이었다. 그러나 하루키의 가난은 메타포 이거나 이데아에 가깝다. 그리고 그 가난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던지면 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은 것이다. 분명 행복하지만 등에는 불행의 짐짝이 붙어 있는 것처럼.


가난한 아주머니는 텅 빈 동공일지도 모르고, 하나의 무형태를 띤 형상일지도 모른다. 잔성처럼 말이다. 가난한 아주머니는 왔다가 사라져 갔다. 어휘는 투명한 탄도처럼, 일요일 오후의 한낮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가난한 아주머니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다. 가난한 아주머니란 그런 존재니까. 아주머니는 다 알지만 그 앞에 가난이 붙으면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야만 한다. 이 세상에는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가까이 있으면 보지 않게 되고 멀리 있는 것만 쫓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아주머니가 진짜로 있는 그녀는 가난한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적당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나는 가난한 아주머니를 전혀 모르지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받아들인 다는 건 동시에 구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가난한 아주머니는 나의 주위, 그녀의 주위, 모든 사람의 주위에 항상 있는 존재다. 하지만 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잘 볼 수 없지만 제대로 볼 수는 있는 존재. 그것이 가난한 아주머니 일지도 모른다. 특징 없는 누군가를 가리켜 누구지?라고 물으면, 응 가난한 아주머니일 뿐이야.라고 하면 된다.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누구였더라? 에도 가난한 아주머니를 집어넣으면 간단하다.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 가난한 아주머니뿐이더냐. 이름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살아남아 용케도 이름의 거리에 당도하여 그들이 공동체를 만들면 그 속에서 가난한 아주머니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가난한 아주머니와 내가 같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름을 잃어버리고 살아왔기 때문에.


가난한 아주머니는 무게도 대단하지 않고, 불쾌한 감각도 아니며 귓전에 대고 냄새나는 입김을 불지도 않지만 표백된 그림자처럼 내 잔등에 착 달라붙어 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 존재에 익숙해진다. 친구들도 썩 신경 쓰지 않는다. 가난한 아주머니란 그런 것이다. 일종의 에테르. 보는 사람에 따라 형상이 뒤틀어지는. 일각수처럼 고정된 형상이 아니다. 평범한 낱말일 뿐이다. 평범한 언어가 가난한 아주머니다. 개념적인 기호일지도.


그리고 겨울이 다가올 즈음 가난한 아주머니는 나의 등에서 사라졌다. 이후 나는 자신을 원래의 나 자신을 꼭 닮은, 또 하나의 자신으로 여겨졌다. 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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